여행을 한 나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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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규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인상 깊은 풍경이 몇이나 있을까. 끽해야 보성 녹차밭이나 해남 청보리밭이 전부였던 나에게, 산 마르코 광장은 너무 자극적이었다. 장관의 조건에는 어떤게 있을까. 먼저 크기겠지? 압도적인 크기의 광장에서 밀려오는 스케일에 감탄하면서도, 생각해보면 서울 시청도 같은 구조 아닌가? 스케일로만 따지면 더 크잖아. 그럼 역시 형태의 디자인인가. 확실히 유럽의 건물들은 한정된 재료로 지어진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게 단순 낯선 것을 대할때의 신비로움일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초중고 다 베네치아에서 나왔어도 이렇게 감탄을 할거냐. 짧은 순간 뇌를 계속해서 돌려봤지만 뚜렷한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고. 뭐 어쩔거야. 미소와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뛰어다니며 광장을 만끽했다.


단순 디자인적인 쾌감을 제외하고도, 오픈 형태의 바들이 각각 거리를 유지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인상깊었다. 이탈리아 뮤지션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한명도 없지만, 왠지 모를 음악의 도시 느낌이 뿜어져 나온다. 여기선 음악이 없는게 더 이상하다. 이태원 바이닐 앤 플라스틱 청음매장처럼, 몇 걸음만 옮겨도 다른 곡이 흘러나오는데 신기하게도 곡들이 겹치는 구간이 없다. 그걸 다 염두해서 바들을 배치했겠지? 여성 피아니스트, 할아버지 피아니스트, 젊은 콘트라 베이시스트 등 뮤지션들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광장의 핵심 구성 요소다. 여기 가게 중 아무데나 앉아서 하릴 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해가 지기도 했고.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지 말자, 숙소에 가서 여독을 좀 풀기로 하고 광장을 빠져나갔다. 막상 글로 옮기고 나니까 산 마르코 광장에서 느꼈던 기분이 팍 식어버리는 느낌이 들어 아쉽다. 현장에서 느낀 기분을 녹음이라도 했어야 한다. 다음엔 꼭 그래야지.


일몰을 보기 위해 선착장 위주로 마냥 걸었다. 태양은 수면에 비쳐 황금빛을 내밀었고, 여유롭게 움직이는 여행객들의 뺨에 와닿았다. 나는 그 모습들을 찍느라 신이 났다. 카메라와 함께 하는 직업을 10년 가까이 곁에 두고 있지만, 정말이지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엉터리 물건이다. 또 반대로 태양이 너무 정수리 위에 있거나 빛이 너무 강해도 마찬가지로 화면을 망친다. 해 지기 한 두시간 전이 가장 좋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미련 없이 가방에 넣는다. 이건 고작 그런 물건이다. 억지로 어떻게든 찍을 수 있긴 하지만, 억지로 찍은 화면은 경험상 도무지 쓸 데가 없다. 그럴때면 <월터 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숀 펜 처럼, 가끔은 찍지 않는게 더 좋을 때가 있는 것 처럼 굴어버린다. 하지만 명심하자. 찍지 않는게 더 좋은 때란 없다. 무조건 찍으면 더 좋지만, 찍는데 쓰는 시간이 아까운 것 뿐이다. 여행은 여행대로 하고 촬영 감독을 따로 붙이는게 가장 좋다는 뜻이다. 언젠가 사이어인들을 따라다니는 닥터 게로의 카메라처럼, 인물을 따라다니며 모든 장면을 촬영하는 초소형 드론이 있다면. 이 유튜브라는 시장의 판도가 크게 바뀔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말이야.


마침내 해가 완전히 지고, 마트에 가서 저녁 찬거리를 샀다. 리조또, 가지 요리, 각종 치즈와 정체 불명의 음료수. 마트 앞 피자 가게에서 사기 전과 사고 난 후의 가격이 바뀌는 마법의 마르게리따 피자까지 테이크아웃 하고 숙소로 복귀했다. 샤워를 마치고 한바탕 기분 좋게 와인을 마시고 싶었지만 와인 오프너가 휘어져 있던 바람에 결국 와인 하나는 평생 딸 수 없는 와인으로 만들어버리고. 나머지 하나의 와인을 따서 즐거운 저녁 식사를 끝마쳤다. 여기까지 적고 나서 생각해보면, 사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저녁 식사였는데 내가 그 시간이 즐겁다는 이유로 이렇게 한 문단을 써서 적어도 되는걸까? 적어도 최소한, 읽는 사람을 배려하는 글이라면 조금의 재미나 혹은 조금의 교훈, 하다 못해 조금의 이야기적인 장치를 갖추고 있어야 한 문단을 차지해도 되는게 아닐지. 진짜 이제 겨우 여행 하루 지났는데,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단순히 있었던 일의 나열이 아니라 여행을 한 나와의 대화가 되어야 한다. 여행에서 저녁 식사 뭐 먹었는지 하나 하나 이야기하는 나와는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다. 이번 문단은 그래도 이런 깨달음을 줬으니까 살려준다. 다음에 두고볼꺼야. 처신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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