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사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내가 글을 잘 썼다면 수필로 먹고 살 것이고, 그림을 잘 그렸다면 만화. 목소리가 좋다면 팟캐스트나 외모가 속상하지 않다면 카메라 앞에서 썰이나 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뭘 해도 애매한 주제에 하고 싶은 이야기만 잔뜩인 나는, 결국 이 모든게 다 들어간 다큐멘터리 필름을 선택했고. 첫 연출작부터 11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변변찮은 단편 하나 만들지 못했다. 그렇지만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영화라는 근사하고 그럴듯한 포맷에 현혹되어 지금까지의 작업들을 비관할 필요는 없다(무엇보다 영화로 만들고 싶은 소재가 아직도 안 떠올랐지 않는가!). 중요한건 11년간 쉬지 않고 꾸준히 무언가를 만들어 왔던 것이고. 내가 만든 것들이 나를 대표한다. 이게 중요하다. 부끄러운 작업도 많지만, 그 역시도 나를 대표한다.
그래서 요즘엔 크게 압박을 가지지 않는다. 글로 좋은 이야기가 있고, 팟캐스트로 좋은 이야기가 있다. 가끔은 만화로 그렸을때 효과적인 이야기, 극영화로 풀어야 하는 이야기. 장편 시놉시스, 단편 시나리오, 초단편 숏폼 콘텐츠. 세로냐 가로냐, 인물이 등장하냐 목소리만 얹어지냐 자막만 있느냐. 자막의 굵기 자간 크기 폰트의 다양성 그림자 두께 따위, 하나같이 전부 다 도구일 뿐이다. 도구는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어떤 도구를 썼던간에, 그 도구로 하는 이야기가 나를 대표한다. 11년 전에 만들었던 작업에서 색보정을 쓰레기같이 하는 바람에 눈 흰자가 청록색이라던가, 사운드 밸런스가 엉망이라던가 하는건 하등 중요하지 않다. 몰스킨 노트에 쓴 글이 곰돌이 푸 연습장에 쓴 글보다 좋을게 뭐야. 그때 내가 잘 썼으면 잘 쓴거지.
그렇다면 이쯤에서. 그럼 나는 왜 도구를 갈고 닦는가? 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단지 도구일 뿐이라고 하기엔 벌써 7년 넘게 마음에 딱 맞는 장비를 찾아 헤맨다. 블로그가 좋을지 브런치가 좋을지. 세로가 좋은지 가로가 좋은지, 모든게 더 나은 도구를 향한 집착이다. 왜 집착하느냐. 이거 진짜 중요한 얘기다. 볼드 기능이 있으면 다음 문장에 넣어도 된다. 도구를 따져야 장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갈고 닦는건 평생토록 해나가야 할 숙제입니다. 작품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죠. 그리고 더 좋은 인간이 되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 작업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작업물들 중 최고를 가리는 기준은 뭔가요? 결국 도구입니다. 생각은 생각인채로 끝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의 당신의 생각은 생각인채로 끝나도 됩니다. 아무렴요, 하찮은 쓰레기라고 생각해도 무관합니다. 하지만 그런 당신도 언젠가 근사한 사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그 근사함을 어디에 담을겁니까. 지금 당장의 당신의 생각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언젠가 혹시나 만약, 이렇게 계속 꾸준히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면. 어떤 생각의 정수를 풀어낼 때가 있을거에요. 그것은 기록일수도 감정일수도 사고일수도 아주 재밌는 농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곧 당신의 정수일거에요. 당신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지금의 도구가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해서, 당신의 마지막까지 그래야 할까요? 물론 우리는 최후의 한 작품을 위해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잘 가다듬어진 도구는 최후의 한 작품만을 담아내지도 않습니다. 서두를건 없어요. 당신의 생각은 아직도 하찮으니까요. 하지만 생각이 성장하듯, 생각을 쏟아 붓는 연습을 하듯. 그 생각을 담는 도구도 가다듬어야 옳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