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욕망과 팝업의 유통기한
[신수연의 Insight Report : 도시] Vol.4
주말의 성수동은 거대한 테마파크 자체다.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 앞, 명품 브랜드 로고가 박힌 가벽이 세워지고 그 앞엔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또 하나의 벽을 이룬다. 사람들은 공장 외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2주 뒤면 철거할 팝업 스토어에서 한정판 굿즈를 전리품처럼 챙긴다.
우리가 열광하는 화려함의 실체는 무엇일까?
땀이 밴 노동 현장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자본이 짜놓은 정교한 세트장이 세워졌다.
주민은 없고 소비자만 넘치는 거리.
이것은 도시재생이 아니라 박제에 가깝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수동의 비극은 성공한 정책에서 시작된다.
성동구는 정원오 구청장 부임 후 일찌감치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조례를 만들고, '붉은 벽돌 건축물 보전 사업'을 통해 공장 지대 경관을 지켜냈다. 정원오 구청장은 공공연하게 "성수동을 한국의 브루클린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 전략의 일환으로 붉은 벽돌을 보존해 물리적 환경을 지켜낸 건 분명한 성과다. 덕분에 성수동은 여타 서울의 도심처럼 무분별 개발되지 않고 고유의 풍경을 유지해 지금의 분위기를 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기엔 태생적 오류가 있다.
가져온 모델인 '브루클린(Brooklyn)'은 행정이 기획한 도시가 아니라 맨해튼의 살인적인 임대료에 밀려난 예술인들이 폐공장을 점거하고 치열하게 피워낸 '야생화'다.
반면 성수동은 관이 "이곳이 한국의 브루클린"이라고 규정하고 판을 깐 '조화'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카고 컬트(Cargo Cult, 화물 숭배)'라고 하는데, 원주민들이 비행기 모형만 흉내 내면 화물이 올 거라 믿었듯 성수동은 '붉은 벽돌'만 흉내 냈다. 그 기저에 깔린 '예술인의 생존과 시간'은 이식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관이 만들어준 근사한 껍데기 안을 채운 건 예술인이 아니라 돈을 쫓는 거대 자본이었다.
성수(聖水)는 이름 그대로 '성스러운 물'이 흐르던 곳이자 1960년대부터 서울 경제를 받친 '생산 기지'였다.
새벽부터 인쇄 기계가 돌아가고 구두 장인들이 망치질하던 곳이다. 그 붉은 벽돌에는 노동의 땀과 시간이 끈적하게 스며 있다. 하지만 지금 성수동을 찾는 이들에게 공장은 그저 '인스타그램용 배경 화면'일 뿐이다.
2017년 500여 개에 달하던 수제화 업체는 불과 2년 후인 2019년 200여 개로 반 토막이 났다. 골목을 채우던 인쇄소와 가죽 공장들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동두천, 남양주 등 외곽으로 밀려났다. 이들의 노동으로는 하루 대관료만 수천만 원에 호가하는 자본을 이길 재량이 없다.
그렇게 망치 소리가 끊긴 자리에 들어선 건 최저 시급에 한정판 굿즈를 포장하는 청년들의 2주짜리 단기 노동이다. 구세대 노동은 살인적 임대료에 쫓겨났고 신세대 노동은 팝업 스토어의 가벽처럼 쓰다 버려진다.
사람들은 낡은 벽 앞에서 사진이 어떻게 잘 나올지를 궁리하고, 목적을 달성하면 미련 없이 떠난다.
삶의 현장(생산)이 인증샷의 현장(소비)으로 주객전도된 성수동.
우리는 그곳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이미지와 유행을 소비한다.
이것이 우리가 도시를 대하는 지극히 천박한 태도다.
성수를 '배경 화면'으로 소비하는 동안, 선진 도시는 공간에 밴 시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독일의 사례를 가져왔다.
3-1. 과거의 서사를 대하는 태도 : 루르 공업지대 (촐페라인 탄광)
독일 서부의 루르 지역은 유럽 최대의 탄광이자 철강 공단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 산업이 쇠퇴하고 폐광이 이어졌다. 하지만, 독일은 이 거대한 공업 단지를 밀어버리거나 상업 시설로 채우지 않았다. 대신 낡은 기계와 녹슨 용광로를 '산업 기념물'로 지정했다.
대표적인 곳이 '촐페라인(Zollverein) 탄광'이다.
한국이었다면 거대 쇼핑몰이나 프리미엄 아파트 단지로 싹 밀어버렸을 폐광은 노동의 역사를 간직한 박물관이 됐다.
과거 석탄을 씻어내던 거대 세탄장은 지역의 아픈 역사를 기록한 '루르 박물관'으로. 뜨거운 열기를 뿜던 보일러실은 세계적인 '레드닷 디자인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심지어 광부들이 석탄 가루를 뒤집어쓰던 코크스 공장 한가운데에는 시민들을 위한 수영장과 겨울철 아이스링크를 만들었다.
건물의 '껍데기'만 남겨 명품 브랜드의 로고를 박아 넣은 성수와 달리, 독일은 그 공간을 관통했던 사람들의 묵직한 '서사'를 보존했다. 이것이 유네스코가 볼품없는 폐광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이유다.
3-2. 거대 자본을 대하는 태도 :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과거를 존중하는 이들은 현재를 자본으로부터 지켜내는 법도 안다. 베를린의 '크로이츠베르크'는 가난한 예술인과 이민자들이 모여 독특한 하위문화(Sub Culture)를 꽃피운, 초기 성수동과 유사한 동네다.
2018년, 이 동네에 세계 최고의 기업 중 하나인 '구글(Google)'이 1만 제곱미터(약 3천 평) 규모의 거대 업무 캠퍼스를 짓겠다고 선언했다.
한국이었다면 "지역 상권이 살아나고 집값이 오른다"며 쌍수를 들고 현수막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로이츠베르크 주민들은 "구글은 꺼져라"라는 구호를 내걸고 2년 넘게 시위를 벌였다. 이는 단순한 님비 현상이 아니었다. 고임금 IT 노동자들과 거대 자본이 들어서면 임대료가 폭등하고 오랜 시간 동네를 지켜온 이민자들의 작은 상권과 예술인들의 작업실이 쫓겨날 것이라는 생존의 문제였다.
결국 구글은 시민 연대에 막혀 입주를 포기했다. 그리고 구글이 들어오려던 거대한 공간은 대기업 사옥 대신 지역 노숙자와 빈곤층을 돕는 비영리 단체들의 공동체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눈앞의 이익보다 일상을 지키는 것을 택한 선진 시민의식의 승리였다.
한국의 성수는 공장 벽에 대기업과 명품 로고가 박힐 때마다 줄을 서고 인증샷을 찍느라 바쁘다. 독일은 과거를 추모하고 현재의 자본을 이겨냈지만, 한국은 과거를 지우고 자본의 '자발적 호객꾼'이 되었다.
본 글이 성수의 공장과 붉은 벽돌을 안타까워하는 건, '수제화'나 '인쇄'라는 특정 산업 자체를 억지로 연명시키자는 게 아니다. 산업이 시대의 변화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쇠퇴하고 수명을 다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앞서 살펴본 독일 역시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탄광 산업의 폐광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산업의 문을 닫았을 뿐 '이전 세대에 대한 존중'까지 닫은 게 아니었다. 이것이 한국과 독일의 결정적 차이다.
한 인간이 수십 년간 같은 자리에서 망치질하고 석탄을 캤다는 건, 단순히 생존을 위한 밥벌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먼지 속에는 누군가의 청춘과 추억이 녹아 있고 함께 동고동락한 이들의 '공동체'가 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정부는 광산 폐쇄 후, 일자리를 잃은 광부들이 우울증과 사회적 고립에 빠지는 현상에 주목했다.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된 독일에서 그들이 상실한 것은 당연하게도 돈이 아니라 '소속감'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은 폐광을 박물관으로 재생하며 과거의 광부들을 해설사로 채용해 예전 직장으로 다시 '재출근'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낡은 작업복을 입고 다시 출근한 광부들은 관광객들에게 "내가 청춘을 바쳐 돌리던 기계"라며 역사를 증언했고 일이 끝난 뒤엔 동료들과 모여 흩어졌던 공동체를 다시 결집했다.
수십 년 된 물리적 공간을 해체한다는 건 단순히 시멘트벽을 부수는 게 아니라 한 세계의 숨통을 끊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재생하려 들 때 공간만을 대상으로 삼아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성수의 개발은 이전 세대의 흔적을 자본의 표백제로 박박 닦아내는 과정이었다. 50년을 버텨온 장인들의 공동체를 단숨에 해체해 변두리로 내쫓고 그 빈자리에 유행을 좇는 이들의 향수 냄새로 채웠다.
산업을 지우는 것을 넘어 그 안에 살아 숨 쉬던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지워버린 것이다. 보존과 기록의 가치를 망각하고 껍데기만 남긴 도시는 미래 세대에 물려줄 어떤 철학도, 영혼도 남지 않는다.
성수의 비극은 수제화 장인과 인쇄소가 변두리로 쫓아낸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본의 칼날은 이들에 이어 성수를 이른바 '힙한 동네'로 만들어 놓은 개국공신으로 향한다.
바야흐로 '재(再) 젠트리피케이션(Re-gentrification)'의 덫이 가동된 것이다.
초기 성수에 생기를 불어넣은 이들은 거대 자본이 아니었다. 붉은 벽돌과 공장 냄새의 가치를 알아보고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스며든 젊은 예술인, 디자이너, 독립 카페와 공방을 운영하는 '1세대 창작자'들이었다. 그들은 원주민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자신들의 독창성을 덧칠해 성수만의 독특한 문화를 직조했다.
하지만 그들이 닦아놓은 문화 위로 '돈 냄새'를 맡은 대기업과 명품 브랜드들이 상륙하며 생태계는 파괴됐다.
대기업 '팝업 스토어'는 애초에 그곳에서 물건을 팔아 월세를 낼 생각이 없다. 그들에게 수천만 원의 하루 대관료는 단순 '마케팅 비용'일 뿐이다. 자본을 앞세운 왜곡된 수요가 임대료의 천장을 무한대로 뚫어버리며 커피를 팔고 가죽을 다듬어 월세를 내던 1세대 창작자들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다.
결국 재주는 영세한 창작자들이 부리고 돈은 건물주가 쓸어 담고 과실은 무임 승차한 대기업이 따먹는다.
이것은 단순 상권 교체가 아닌 도시의 '자생력'이 거세되는 과정이다. 2주마다 간판이 바뀌는 팝업 스토어들만 남은 거리에는 아무런 문화가 축적되지 않는다. 대기업들이 단물만 빨아먹고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성수에 남는 것은 천문학적인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텅 비어버린 붉은 벽돌의 유령 도시뿐일 것이다.
서두에 말했듯이 붉은 벽돌은 죄가 없다. 문제는 그 벽돌에 스며든 50년 치의 역사를 자본이라는 표백제로 지우고 그 자리에 하루짜리 휘발성 향수를 뿌려대는 천박한 태도다.
성수와 독일 에센(Essen)은 모두 쇠퇴한 낡은 공장 지대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두 도시는 완전히 다른 결말을 향하고 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정부는 기계에 묻은 광부들의 지문을 보존하며 과거의 공동체를 살려냈다.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시민들은 끈끈한 연대를 통해 거대 자본으로부터 일상을 지켜냈다.
그 결과, 공간은 시대를 초월한 '유산'이 됐다.
반면 한국은 공간을 철저히 기만했다. 누군가의 수십 년 터전이었을 공장을 2주마다 바뀌는 팝업 세트장으로 전락시켰고 골목에 문화를 불어넣은 1세대 창작자들을 재(再)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무참히 짓밟았다.
사람과 서사가 거세된 채, 오직 자본주의가 소비할 이미지만 남은 공간. 우리는 이것을 '재생'이라 착각하며 열광하지만, 본질은 영혼이 빠져나간 거대한 '박제'에 불과하다.
거대 자본은 유목민과 같다. 그들은 성수의 단물을 다 빨아먹고 유행이 지나면 언제든 미련 없이 간판을 떼고 떠날 것이다. 자본의 썰물이 빠져나가고 팝업 스토어의 가벽이 무너진 자리에 남는 것은 천문학적으로 뛰어오른 임대료와 텅 빈 붉은 벽돌의 유령 도시뿐일 것이다.
도시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건 명품 브랜드의 로고나 하루 수천만 원짜리 화려한 조명이 아닌 그 공간을 관통한 사람들의 축적된 서사다.
누군가의 터전을 한낱 '인스타그램 배경 화면'으로 소비하며 낄낄대는 도시. 이전 세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잃어버린 도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껍데기만 남은 도시의 끝은 결국 폐허일 것이다.
우리는 공간에 새겨진 서사를 돈으로 환산해 휘발시키는 얄팍한 시대를 살고 있다.
성수동의 몰락을 기록한 이유는 자본에 먹힌 거리를 단순히 비판하고 조롱하기 위함이 아니다. 공간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의 '사람'을 품어야 한다는 '문화NOT공장'의 철학을 다지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5년 후에 성수동의 대척점인 독일 루르(Ruhr)에 가 광부들의 공동체를 되살려낸 현장에서 그들이 공간과 사람을 지켜낸 방식을 체득하고자 한다.
자본이 단물만 빨아먹고 버린 유령 도시에는 미래가 없다. 자본에 밀려난 창작자들과 원주민들이 다시 연대할 수 있는 진짜 삶의 터전. 그런 공동체를 훗날 부산의 버려진 폐교 위에 세우고자 한다.
배경 화면으로 소모되는 가짜 세트장이 아닌 사람의 서사가 계속해 이어지는 진짜 무대를.
Editor. 신수연 (문화NOT공장 CHIEF DIRECTOR)
부서질 것 같던 스물에는 서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위태롭습니다.
그래서 혼자가 아닌 '함께'를 택했습니다.
효율적인 공장을 거부하고 비효율적인 문화를 만듭니다.
정의를 말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시대에도 꿋꿋하게 '공공선'과 '책임 있는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거대한 사회를 바꿀 수 없다면,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를 작게라도 만듭니다. 상상하고, 실험하고, 실패하는 것이 허락된 공동체를 짓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