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바이가 된 거버넌스, 동원된 시민들

이식된 민주주의는 어떻게 공동체의 주체성을 기만하는가


[신수연의 Insight Report : 시스템의 재구성] Vol. 1 거버넌스



Intro. 주체인가, 동원된 병풍인가

며칠 전, 강서청년네트워크 위원으로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했다. 2년 만에 참여하는 거버넌스인데다 이사오고 첫 지역 활동이라 기대와 궁금증이 공존했다.
하지만 행사장 문을 들어서는 순간, 지독한 기시감이 뒷덜미를 잡았다. 명색이 '청년이 주도하는' 네트워크인데, 마이크를 쥐고 행사 전체를 통제하는 것은 철저히 관(官)과 그것을 수행하는 용역사였다.
청년들은 그저 구색을 맞추기 위해 동원된 박수치는 '병풍'에 불과했다.
이 촌스런 촌극은 비단 강서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국가 단위에서 벌어지는 '이식된 민주주의'의 초라한 민낯이다.
나는 2021년 '노원청년정책네트워크'를 시작으로 2022년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문화예술분과 운영위원'을 거쳐, 2024년 서울문화재단의 청년예술청 SAPY로 활동했다. 시기상으로 박원순 시정의 끝에서 오세훈 집권의 시작점으로 관 주도 거버넌스의 붕괴를 현장에서 목도한 상실의 기록이었다.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는 현 시장이 속한 정당의 청년 등용문으로 악용됐다. 또, 청년예술청 SAPY는 서울문화재단의 '마지막' 거버넌스가 됐고, 이후 모든 소통 창구는 권력자의 손짓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자발적 민주주의와 거버넌스의 경험이 부재한 이 척박한 땅에서 관이 주도해서라도 판을 깐다는 초기 순기능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유통기한은 이미 끝났다.
지금의 거버넌스는 시민에게 주체성을 돌려주지 않는다. 그저 귀찮은 업무를 떠안은 공무원들이 용역사를 돌려가며 서류에 '시민 의견 수렴'이라는 도장을 찍기 위해 만들어낸, 거대한 '행정적 알리바이'일 뿐이다.
권력자의 선의와 관의 주도에 기대 연명하는 이 기형적인 시스템을 '거버넌스'라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까지 행정의 들러리로 동원돼야 할까.
이번 글에선 이식된 민주주의의 환상에서 깨, 진짜 당사자들이 주도하는 거버넌스의 본질을 묻고자 한다.



1. 통치(Government)에서 협치(Governance)로

한국의 기형적인 거버넌스 실태를 해부하기 전에, 먼저 이 단어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도대체 거버넌스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국가 운영 주체는 오랫동안 '정부(Government)'의 독점물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명령하고 통제하는 수직적 권력 구조, 이른바 '통치(統治)'의 시대였다. 국가는 똑똑했고 시민은 '계몽의 대상'이었으며, 세금만 내면 국가가 알아서 길을 닦고 문제를 해결해 주던 공식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1980~90년대), 서구 사회는 거대한 벽에 부딪힌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파편화되며, 국가라는 단일 거대 조직의 힘만으로 환경, 빈곤, 지역 갈등 등 다원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른바 '정부의 실패'였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개념이 바로 '거버넌스(Governance)'다. 국가가 '다 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고, 시장(기업)과 시민사회(주민, NGO 등)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는 것'이 핵심이다. 수직적 명령 체계를 해체하고 당사자들이 동등한 테이블에 앉아 의사를 결정하는 수평적 '네트워크'이자 '협치(協治)'의 룰을 만든 것이다.

즉, 거버넌스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철학의 핵심은 시민을 더 이상 통제의 대상이나 동원하는 '객체'로 보지 않고, 스스로 룰을 정하고 책임을 지는 '주체'로 인정하겠다는 권력 이양인 것이다.

서구 사회는 수십 년에 걸친 시민 주도 투쟁과 토론을 통해 이 수평적 네트워크를 아래에서부터 자생적으로 구축해 냈다. 권력을 내어놓기 싫어하는 관(官)과 권리를 쟁취하려는 시민의 치열한 합의의 결과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서구의 거버넌스 시스템이 이식된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 땅에서 거버넌스가 처참하게 실패한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는 서구처럼 시민이 아래에서부터(Bottom-up) 권력을 쪼개 가져온 역사가 없다. 중앙집권제(군주제)에서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해방 이후에도 이 국가를 지배한 건 철저한 '국가 주도' DNA였다. 관(官)이 예산과 권력을 쥐고 새마을운동 하듯 위에서 아래로(Top-down) 꽂아 내리면, 시민은 그에 따라 열심히 하던 시절의 관성이 뼛속 깊이 박혀 있는 것이다.

군부독재를 몰아내고 투표권이라는 '정치적 민주화'는 이뤘을지 몰라도, 일상과 밀접한 '행정적 민주화'는 여전히 요원했다.

그러던 중 1997년, 외환위기(IMF)와 함께 국가 주도 모델이 파산하며 세계적 유행을 타고 거버넌스가 수입됐다. '지방의제21'을 시작으로 故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 거버넌스는 국가의 공식 의제로 격상됐다.

이후 이 뜬구름 같던 담론을 행정 현장으로 끌고와 폭발적으로 활성화시킨 건 故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시민단체의 방식과 철학을 관료 조직에 강력하게 이식했다. 그에 따라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주민참여예산 확대, 서울문화재단 내 거버넌스 활성화 등 수많은 협치(協治)의 판이 깔렸다. 또한, 지자체의 대장격인 서울시를 전국의 지자체들이 따라 나서 바야흐로 大거버넌스 시대였다.

하지만 여기서 한국 거버넌스의 태생적 한계가 드러난다. 이 모든 건 시민이 투쟁해 쟁취해 낸 '권리'가 아니었다. 진보적 철학을 가진 몇몇 행정 장(長)이 위에서 아래로 은혜롭게 내려준 '시혜적 하사품'에 불과했다.

권력을 나눌 철학도, 의지도 없는 공무원에게 거버넌스란, '시장이 까라고 해서 까는' 귀찮은 업무였을 뿐이다. 아래부터 끓어오른 열망이 아니라 위에서 억지로 덮어씌운 껍데기. 이것이 한국에서 거버넌스가 시민을 동원하는 '행정적 알리바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던. 그리고 권력자가 바뀌자마자 붕괴해 버린 결정적 이유다.



2. '알리바이'로 전락한 거버넌스 : 시민은 결재판 도장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억지로 이식된 거버넌스는 권력을 나누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철학 없는 관료 조직에게 거버넌스란 정책을 실행하기 전 "시민의 의견을 수렴했다."는 명분을 얻기 위한 '행정적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시민은 주체가 아니라 관료들의 빈약한 기획안을 통과시켜 주는 '결재 도장'이자, 향후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쓰일 뿐이다. 이 기만적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자체마다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주민참여예산' 제도다.

원 취지라면 주민들이 동네에 진짜 필요한 사업을 직접 발굴하고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하지만 이 미개한 행정 현실에서는 공무원들의 '예산 확보 셔틀'로 악용되고 있다.


'주민참여예산'의 기만적 예산 확보 알고리즘


힘이 없어 자체 예산을 따내지 못한 부서들은 지자체 관변(官邊) 단체(지자체의 지원과 육성을 받아 운영되는 비영리 단체로 새마을운동중앙회 등)나 소수 어용 주민 조직(권력자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며 그들의 지시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주민)에게 자신들의 사업을 일러준다. 그러면 그 조직들은 그것을 '주민 제안'인 것처럼 위장해 제안서를 제출한다. 결국 관이 기획하고, 관이 승인해, 관이 예산을 타는 완벽한 '자급자족 촌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부패한 사슬 속, 떡고물을 나눠 먹는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시민은 그저 행사장 뒷자리에 앉아 'N명 참여'라는 통계 수치를 채워주는 병풍으로 전락한다. 권력을 시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제도가 오히려 관의 배를 불리고 부패한 카르텔을 공고히 한다. 이것이 바로 주체성 없이 껍데기만 이식된 한국 거버넌스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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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구 모 구청 "가족, 지인 이름 빌려서라도 실적 채워라" (2023년 적발) 각 부서별로 주민참여예산 사업을 강제 할당한 뒤, 공무원이 직접 제안할 수 없으니 "가족이나 지인 명의를 도용해 등록하라"고 지시하다 내부 고발로 적발.

2. 제주도 "구청 숙원 사업을 주민 제안으로 위장" (2023년 지적) 산책길 보수(3억), 노후 번호판 교체 사업 등 구청이 일반 예산으로 해야 할 관급 공사들을 주민참여예산으로 둔갑.

3. 전국 공통: "결국 남는 건 CCTV와 아스팔트뿐" 전국 지자체 주민참여예산 선정 결과 매년 1~3위는 방범용 CCTV 설치, 도로 포장 등이 자리함. 이는 주민의 창의적 아이디어가 아니라, 지자체가 예산이 부족해 미룬 '기본 행정 인프라 유지보수'를 주민참여예산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



3. 철학 없는 관료주의 : 용역사 뒤에 숨은 행정

거버넌스는 본질적으로 치열한 소통과 갈등의 조정 과정이다. 따라서 이 판을 까는 행정가(공무원)에게는 공동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학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미개한 행정의 현실은 참담하다. 거버넌스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이해도는 처참한 수준을 넘어, 업무를 방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이 거버넌스를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는 '시민 교육과 자생적 장(場)의 부재'다.

정말 이 제도를 활성화할 의지가 있다면, 그저 위원회 하나 만들고 끝낼 것이 아니다.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거버넌스 교육을 제공하고 능력을 배양하는 '주도적 이식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관(官)은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교육도, 훈련도 없이 그저 껍데기만 가져다 놓는다.

왜일까? 시민들이 똑똑해져 진짜 권력을 요구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거버넌스란 하라고 하니 떠맡은 귀찮은 '추가 업무'이자, '시민 의견 수렴'이라는 도장을 찍기 위한 알리바이일 뿐이다.

철학과 의지가 없는 행정이 선택하는 가장 쉽고 비겁한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외주화(하청)'다.

현재 대부분의 관 주도 거버넌스는 행정이 직접 시민과 부딪히지 않는다. 예산을 핑계로 중간에 '용역사'를 끼워 넣는다. 시민들과 소통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입찰로 선정된 행사 대행업체에게 넘겨버리는 것이다.


이식된 거버넌스의 기형적 하청 구조


용역사의 목적은 시민의 주체성 함양이 아니다. 물론 거버넌스에 진심인 문화NOT공장과 같은 단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계약된 과업 지시서에 맞춰 OT, 워크숍 등 'N회 행사 개최'라는 과업을 사고 없이 끝내고 잔금을 치르는 것이 목표다. 이 하청 구조 속에, 청년과 시민들은 거버넌스의 주체가 아니라 용역사가 기획한 행사를 빛내는 동원된 '엑스트라'로 전락한다.

행정은 책임을 내팽개친 채 용역사 뒤에 숨고 용역사는 행정의 눈치만 보며 영혼 없는 이벤트를 찍어낸다. 그리고 그 무대의 가장자리에 진짜 당사자인 시민들이 멍하니 앉아 박수를 치고 있다. 시민을 길러낼 생각조차 없는 이 썩어빠진 구조를 과연 거버넌스라 부를 수 있을까?



4. 시혜적 민주주의의 비극 : 시장이 바뀌면 룰도 무너진다

앞서 한국의 거버넌스가 '시혜적 하사품'에 불과했다고 지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구처럼 시민이 쟁취한 제도가 아니기에, 그 하사품을 거둬들이는 것 역시 권력자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법과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행정 장)'의 선의에 기댔던 제도는 태생적으로 한 번의 파도에도 쓸려갈 모래성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화려했던 모래성이 어떻게 짓밟히고 무너지는지, 거버넌스의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목도했다.

2021년, 나는 노원청년정책네트워크를 시작하며 동네에 필요한 정책을 제안했다. 놀랍게도 정책에 실제 예산이 반영됐고, 이듬해인 2022년에 나는 단순 제안자를 넘어 운영자로서 정책을 완결 짓는 경험을 했다. 시민의 목소리가 행정을 움직이는 것. 이때 나는 거버넌스의 가능성을 잠시나마 엿보았다.

하지만 그 희망은 너무도 짧았다.


행정 권력 교체에 따른 거버넌스 붕괴 타임라인


2021년 하반기부터 2022년으로 이어지는 시기, 행정 권력이 오세훈 시정으로 교체되며 공기는 무섭게 얼어붙었다. 2022년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문화예술분과 운영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자본의 논리와 얄팍한 '효율'을 내세운 행정 권력은 거침없이 예산을 삭감하고 시민과의 소통 창구를 틀어막았다. 당시 관련 부서들이 여력이 없다는 핑계로 문화예술분과의 모든 정책 제안을 불수용했으며, 급기야 청년 시민들의 공론장이어야 할 서울청정넷을 시장 소속 정당 청년들의 '정치적 등용문'이자 스펙 쌓기 무대로 전락시켰다.

파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4년, 나는 최후의 보루라 생각했던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청 거버넌스 SAPY로 활동했는데, 참담하게도 그것이 현재로썬 재단의 '마지막' 거버넌스가 됐다. 행정 장의 기조 변화와 지시 한 번에 시민들이 수년간 쌓아 올린 거버넌스 기구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관(官)의 시혜에 기대 연명하던 '이식된 거버넌스'의 유통기한은 끝났다.

시스템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다. 법과 제도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선출직 공무원의 정치적 철학과 기분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구조. 그저 권력자가 시민들에게 잠시 내줬던 마이크를 자기 입맛에 맞지 않자 폭력적으로 다시 빼앗아 간 이것은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5. 관 주도를 넘어 : 진짜 '당사자성'을 발굴하는 실험

권력자가 시혜적으로 내려준 룰은 언제든 그들의 입맛에 따라 무참히 거둬들여질 수 있다는 것. 법과 시스템이 아니라 권력자의 선의에 기댄 거버넌스는 결국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미개한 행정 현실 속에, 진짜 시민 주도의 거버넌스는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관(官)이 던져주는 예산과 기획안에서 영원히 엑스트라로 동원되어야만 하는 걸까?

아니다. 행정이 판을 깔지 않으면, 우리가 바닥부터 진짜 '당사자성'이 작동하는 시스템을 증명하면 된다.

문화NOT공장 기획의 핵심 철학은 '참여자 주체성'에 맞춰 있다.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수동적인 부품(숫자)이 아니라, 온전한 권리와 책임감을 가진 주체(서사)로 나아가는 실험이다.

그 대표적인 대안이 바로 예비예술인 사업에서 진행하는 '상호 심의'와 '예산분배 토론회'다.


이식된 거버넌스와 자생적 거버넌스 운영 방식 비교


기존 지원 사업들은 갈등을 피하고 행정적 편의를 위해, 한정된 예산을 참여자 수에 맞춰 기계적으로 1/n로 배분하는 게 대부분이다. 여기서 문화NOT공장의 기획이 반격을 시작한다. 우리는 관(官)이 던진 그 '행정 편의 사업'을 받아, '소프트웨어(룰)'를 뜯어고쳤다. 기계적 1/n 배분 대신 '예산분배 토론회'를 열었다. 참여자들이 직접 프로젝트 실행비를 논리적으로 방어, 타협하고 때로는 양보하며 예산을 나누게 했다.

또한, 몇 권위 있는 심의위원이 참가자를 채점하고 탈락시키는 폭력적 관행도 폐기했다. 대신 참여자들이 서로를 평가하고 선정하는 '상호 심의'를 전면 도입했다. 이는 누군가에게 평가당한다는 수동적 감각을 지우고 "내가 이 사업에서 함께할 동료를 직접 선택한다."는 강력한 주체적 감각을 주기 위함이다.

룰을 강제하지 않고 스스로 정하게 하자, 참여자들은 단순 수혜자가 아니라 이 사업의 파트너로 변모한다.

자발적 거버넌스의 경험이 부재한 이 척박한 땅에서도 제대로 된 철학과 시스템이 주어진다면 시민은 언제든 주체로 깨어날 수 있다. 관(官)을 통해 이식된 알리바이 시스템을 언제까지 방관할 것인가 묻는다면, 나는 고일대로 고인 제도를 가져와 우리만의 룰로 바꿔 실행하는 현장의 실험들을 대안으로 반박하고자 한다.



6. 결론 : 앞문이 아닌 옆문을 부숴야 할 때

영화 <설국열차> 중 한 장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이런 문(앞문)이 아니라 이쪽 문(옆문)을 여는 거야.
18년째 꽁꽁 얼어붙은 채로 있다 보니까 무슨 벽처럼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지. 밖으로 나가자.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에서 꼬리칸 사람들은 엔진칸을 차지하기 위해 '앞문'을 향해 돌진한다. 하지만 보안설계자 남궁민수는 기차에서 권력을 쥐는 대신, 기차의 시스템 자체를 벗어나는 '옆문'을 열자고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관(官) 주도 거버넌스 안에서 투쟁해 온 건 어쩌면 꼬리칸의 반란과 같다. 권력자가 설계한 기차에서 결재판(엔진칸)에 자리를 조금 더 내어달라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그 앞문을 열고 들어가 봐야, 우리는 결국 '알리바이 거버넌스'라는 거대한 기차를 굴리는 또 다른 부품(숫자)으로 소모될 뿐이다.

시혜적으로 이식된 민주주의는 권력의 풍향이 바뀌자마자 힘없이 멈춰 섰다. 지난 몇 년간 누렸다고 착각한 거버넌스는 권력자가 잠시 내어준 '임대 정원'이었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대우를 요구하며 닫힌 앞문을 두드릴 것이 아니라, 관의 허락 없이도 자생하는 룰(Rule)을 만들 '옆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 스스로 쟁취하지 않은 권리는 언제든 회수당할 수 있는 대여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화NOT공장이 현장에서 관의 사업을 받아 룰을 뜯어고치는 실험들은 이러한 옆문을 두드리는 일이다. 일방적으로 빼앗긴 마이크를 미련 없이 버리고, 스스로 새로운 공론장을 탈환하는 과정이다. 행정 서류의 실적을 채우기 위한 'N명의 참여자(숫자)'에서 책임과 권리를 지닌 '진짜 주체'로 복원하는 저항이다.


거버넌스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마주 앉아 갈등하며, 마침내 타협과 합의를 끌어내는 과정이다. 이는 철학 없는 관료나 잔금을 쫓는 용역사가 결코 대신할 수도, 해서도 안 된다. 진짜 거버넌스의 씨앗은 행정의 기차 안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문을 부수고 나간 현장에 있다.

이것이 내가 그 처참한 붕괴를 목도하고도 포기 없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는 이유다.



[Epilogue : 신수연의 한마디]

지난 4년간 부딪히며 목도한 것은, 사람(행정 장)의 기분과 정치적 득실에 따라 언제든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리는 가짜 거버넌스의 허상이었다.

그렇다고 나와 문화NOT공장은 절망하거나 행정의 앞문을 두드리며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 관(官)이 짜놓은 판이 엎어졌다면, 미련 없이 기차의 룰을 버리고 우리만의 새로운 판을 짤 것이다.

18년 동안 벽인 줄 알았던 그 얼어붙은 옆문. 이제는 그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갈 차례다. 관의 알리바이를 위해 엑스트라의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 룰을 만들고 연대하며 책임져 진짜 당사자들의 생태계를 그 척박한 눈밭 위에 기꺼이 세워낼 것이다.

행정 서류에 박제되는 무의미한 '숫자'가 아니라, 펄떡이는 현장의 고유한 '서사'로 연대할 동료들을 찾는다. 부서진 문 밖, 진짜 거버넌스가 시작되는 그 뜨거운 현장에서 뵙기를 바란다.



Editor. 신수연 (문화NOT공장 CHIEF DIRECTOR)

부서질 것 같던 스물에는 서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위태롭습니다.

그래서 혼자가 아닌 '함께'를 택했습니다.


효율적인 공장을 거부하고 비효율적인 문화를 만듭니다.

정의를 말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시대에도 꿋꿋하게 '공공선'과 '책임 있는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거대한 사회를 바꿀 수 없다면,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를 작게라도 만듭니다. 상상하고, 실험하고, 실패하는 것이 허락된 공동체를 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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