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마주치는 감정을 위한 서랍 속 음악들
불현듯 생각치도 못하게 어떤 감정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마주한다기보다는 부딪힌다는 단어가 좀 더 어울리겠다. 보통 그것들은 대단한 사건들로 비롯되기보다 어느날 갑자기 느껴진 비맞은 풀냄새나 찬공기 냄새처럼, 익숙하지만 급작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요 며칠 작년에 입었던 맨투맨을 꺼내며 이맘때쯤 익숙하게 찾아오던 것이 또다시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지극히 익숙하지만 겪을 때마다 아직도 어찌할 바를 잘 모르겠는 것. 나는 요즘 좀 우울하다.
이렇게 닥친 우울감에는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오히려 나는 가끔 인간의 기본 상태가 0이 아닌 -1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1을 0 혹은 그 이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을 만나고 활동을 하는건 아닐까 하고. 긍정적인 일보다 부정적인 일에 뇌가 더 크게 반응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었다. 긍정적인 것으로 얻는 기쁨보다 부정적인 일로 받을지도 모르는 어두운 감정을 피하려는 우리 종 생존 전략의 일환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어느날 알아챈 환절기 찬 바람에도, 개다 만 빨래에도, 늦은 밤 벌레 우는 소리에도 우울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원인 모를 우울감은 이유를 모르는만큼 해결이 어렵다. 사실 해결이라는 것은 애초에 거만한 단어고 직면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인 셈이다. 감정을 직면하는 일은 이렇게 단어로 나열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요근래 나의 화두 중 하나이기도 한데, 부정적인 감정을 빠르게 해소하거나 없애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태를 인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렇다고 침잠하지는 않아야 하니 역시 감정은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잘 잡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실 이런 날에는 무엇을 해도 텁텁하게 허기진 느낌이 잘 가시지 않는다. 서래처럼 아이스크림을 퍼먹어도, 삼순이처럼 양푼 가득 비빔밥을 해먹어도 심리적인 허기는 잘 채워지지 않는다. 그와중에 아직 붙들고 있는 현대인으로써의 '건강한' 자아 역시 9시 넘어 냉장고 파먹기를 의식적으로 금지시킨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고 또 내 안의 무언가가 충동을 저지하려 들 때, 가장 쉽게 손이 가는 곳은 바닷속에 침잠해있는, 그동안 조금씩 모아둔 노래들로 가득한 플레이리스트 서랍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노래들을 반드시 우울한 날에만 듣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울한 날에 이 노래들은 평소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보통 때 압사당할 것 같은 출퇴근길 인파에게서, 질식할 것 같은 뉴스들로부터 나를 분리시켜준 무의식적 게이트키퍼 역할을 했던 노래들은 이런 날에는 그 역할을 달리한다. 마치 코를 박은 채 죽은듯이 엎드려 누워있고 싶은 익숙한 이불 냄새처럼, 가장 안전한 곳에서 고개를 뉘일 수 있는 안전지대가 된다. 우울하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일까. 한낮에 새로움을 찾아 한없이 뛰어다니다 저녁 즈음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어쨌든 우리에겐 필요한 것처럼, 익숙하고 안전한 것들이 필요하다고 나에게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꺼내먹었던, 서랍 속의 노래들.
영화 '타락천사' OST인 The flying pickets의 'Only You'. 영화 자체에 대한 감흥보다도 이 곡에 대한 애착이 더 크다. 그저 잠시 어딘가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과 찰나의 안식을 원하는 마음이 한데 섞인 엔딩씬과 이 곡의 조화는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솔직히 영화는 제목 이름 값이 다했다. "타락" "천사" (심지어 영어 부제도 Fallen Angels다) 라니..
영화 '변산' OST인 방백의 ‘변산 (이른바 김고은 테마곡)'. 이 또한 영화 자체에 대한 감흥보다도 곡에 대한 애착이 더 크다. 이 노래가 나오는 장면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눈시울이 붉어진 김고은과 그 뒤로 어렴풋이 나오던 이 노래가 그 순간 그렇게 꽂혔더랬다.
외국어로 쓰인 가사가 멜로디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면 모국어로 된 가사는 가사의 한 단어 한 문장을 곱씹는데에서 오는 매력이 있다. 특히 음원보다 미리 공개한 라이브 버전을 좋아하는데 백현진씨의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가 마치 진심을 토해내듯 들리기 때문이다. "이 노랜 사랑노래 멍든 우리가 부르고 있는 노래 벅차서 부르는 노래"라니 이 얼마나 먹먹하고 절절한가.
올해 방백의 방준석씨가 타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었던 사람은 얼마나 해상도 높은 세상을 살았던걸까 생각하며, 그리고 덕분에 나도 조금은 더 해상도 높게 살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현경과 영애의 '그리워라'. 사실 이 노래는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알게 된 노래인데, 은찬이 한결 집에서 이 노래를 듣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장면에서 나온다.
포크라는 장르는 참 특이하게도 살아보지 않은 시절과 잊고 있던 기억이 합쳐준다. 1974년에 발매된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만 들으면 어린 시절 뒷좌석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봄날 시골길을 지나갔던 기억들이 생각난다. 어떤 몽글몽글하고, 또 따뜻하면서도 돌아갈 수 없는 어떤 때의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는 기분.
파라솔의 '베개와 천장'. 이 노래는 우울할 때 정말 많이 들었는데, 가사가 너무나도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우울한 심정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가사와 애써 밝게 보이려 노력하지만 단조의 정서를 줄곧 안고 있는 기타리프가 일품이다.
한 구절 한 구절 와닿지 않는 구석이 없는 노래인데, 가장 절묘한 것은 역시 제목의 의미를 알려주는 후렴구다. "불안은 언제나 머리에 숨어 웃어보려 할 때 내 속에 스며 참기 힘든 생각에 둘러싸여 베개와 천장 사이에 떠있네." 느껴본 사람은 모두 안다. 베개와 천장, 이 사이가 얼마나 아득한지.
실리카겔의 'Kyo181'. 워낙 발매하는 노래들이 좋고 실험적인 시도를 자주 하는 밴드라 꽤 오래 좋아했는데, 우울할 때는 실리카겔의 노래들 중 이 노래를 집어서 듣게 되더라. 잘은 모르겠지만 의미를 모르게 'kyo' 라는 존재를 지속적으로 부르는 행위에서 이상의 시를 볼 때 느꼈던 이질감과 으스스함, 도돌이표같은 메인 사운드에서 느껴지는 몽환적인 기분, 그리고 반복되는 가사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이 공존하면서 이 노래에 나의 불안한 감정을 위탁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음악은 물론이고 비주얼 역시 감각이 너무나 좋은 아티스트.
물론 지금은 최근 발매한 No Pain을 정말 잘 듣고 있지만, 이 노래는 밝은 날 희망차게 새 출발을 하고 싶을 때 주로 들으니 패스.
윤상 '새벽'. 음악가로써, 그리고 직업인으로써 정말 존경하는 아티스트가 윤상인데, 다룰 수 있는 범위가 너무나 넓고 또 그러면서도 그 퀄리티가 매우 훌륭하기 때문이다. 초창기부터 그리고 줄곧 실험적인 시도들을 끊임없이 하는 부지런한 아티스트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이 앨범은 정말 보석같은 앨범이다.
마치 초겨울 2시에서 3시 정도, 잠 못든 채 시린 코 끝으로 밖을 방황할 때 들을 것 같은 노래다. 모두가 기쁨을 나누는 연말에 느끼는 외로움의 정서라고 해야하나. 맨 처음 흘러나오는 벨 소리 같은 사운드가 그러한 외로움과 고독을 더하는 듯 하다. 같은 앨범의 '너에게'도 참 좋아하는 노래.
위는 Orange Blood의 'Time will tell', 밑은 우타다 히카루의 'Time will tell'. 시간이 말해줄거라는 두 노래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비슷하다. 그토록 고통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답은 '시간' 뿐이라는 것처럼, 두 곡은 우리가 우울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직면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해 말해주는 듯 하다.
올타임 레전드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