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브랜딩에 대한 단상
휴직 전 나의 일과를 돌이켜보면 절로 피로 회복제가 떠오른다. 당시를 회고해보면 벌려놓은 일로 깔려 죽기 직전이었다. 월요일에는 합평, 때에 따라 영상 편집, 간간히 있는 화상 영어 수업, 그리고 가끔씩 꽂히는 불특정 새로운 취미 혹은 수업들. 퇴근 후의 시간은 항상 뭔가를 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누가 강요한 것은 아니다. 모두 내가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벌여놓은 일들이었다. 이런 현상이 비단 나에게만 해당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주변에서 누구는 요즘 뭘 한다더라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많은 경우 할 말이 없을 때 ‘퇴근하고 뭐해?’라고 물었던 것을 보면 ‘퇴근 후의 할일’은 잠정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 같다.
퇴근 후의 할일이 최근에서야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류의 자기 계발 역사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아마도 어느 측면에서라도 나아지고 싶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여전히 더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이마저도 이제는 지겹지만) 있는 그 자체로서도 괜찮다는 말이 등장한 것도 불과 몇 년 안 된 이야기다. 다만 그 흐름이 조금은 바뀌고 있는데, 이전에는 자기를 계발하는 것 자체가 목표였다면 이제는 계발된 본인을 어떻게 세상에 드러내는가가 화두가 되고 있다. 한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었던 사람들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죽고 싶어도 먹고 싶었던 떡볶이가 무엇이었는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이야기한다. 바야흐로 자기 계발을 넘어 셀프 브랜딩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사실 셀프 브랜딩이라는 말이 근래에 생겼을 뿐이지 그 본질 자체는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비슷한 예로 자기 피알이라는 것을 우리는 취준 할 때마다 한번쯤은 들어보지 않았는가. 짓궂은 면접관들은 셀프 브랜딩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을 예견이라도 했는지 본인을 나타내는 ‘키워드’나 ‘한 문장’을 꼽아보라며 예행 연습을 시켰다. 어쩌면 밀레니얼 세대가 셀프 브랜딩에 딱히 심적 거부감이 덜한 배경에는 이토록 오래된 면접관들과의 스터디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밀레니얼들 사이에서 셀프 브랜딩을 하는 방법은 자연스럽게 체득되어 있는 것 같다. 인스타그램 프로필 아래에 링크 하나씩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본인이 무엇을 해왔는지, 혹은 무엇을 하는 중인지에 대한 요약이다. 훌륭하다. 인스타그램이 하나의 포트폴리오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제와 부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나 역시도 이 브런치 링크를 남루한 인스타그램에 심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전에 없이 ‘드러내야만 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어린 시절 장래희망을 이야기 할 때만 해도 우리는 ‘평생 직업’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몇 년만 선생님’이라거나 ‘기간제 과학자’ 등이 아니었다. 자라나면서 아이들은 점점 그때의 장래 희망과 멀어져갔고 직장인이 된 우리는 이제 더이상 지금의 직업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코로나 시국으로 잘려나간 일자리는 논외로 두더라도, 적어도 회사는 자아 실현을 시켜주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안다. 많은 기업들이 함께 ‘성장’할 인재를 찾고 있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이미 성장이 완료된 인재들을 뽑아 그 성장판의 득을 보려는 것이 기업이라는 것을 안다. 그야 물론이지. 회사는 돈을 주고 다니는 학교가 아니고 돈을 받고 다니는, 일종의 교환이 일어나는 곳이니까. 소속이 나를 책임져주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예전만 같았어도 실현되지 않은 자아들은 결혼이라는 새로운 가족 형태에 의탁하거나, 혹은 회사 안으로 자아를 축소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자아들은 다르다. 해소되지 않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을거라고 믿게하)는 다른 공간들이 생겼다. 플랫폼이다. 역량을 키워준다는 교육 플랫폼, 나아가 나의 콘텐츠를 세상 사람들에게 손쉽게 공개할 수 있는 미디어 플랫폼, 그리고 내 재능을 어쩌면 돈벌이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재능 마켓 플랫폼까지. 길 잃은 자아들은 플랫폼 구천을 떠돈다. 플랫폼들이 사용하는 수식어는 대부분 비슷하다. “나만의 것”
돌이켜보면 내 또래의 밀레니얼 세대들은 주체적으로 살기를 꽤나 오랫동안 요청받았다. 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전형적인 7차 교육 과정이지만 이 수많은 인구가 마케팅의 주요 먹잇감인 2, 30대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장 MZ 세대를 겨냥한 광고 속 메세지들은 모두 비슷하다. “ㅇㅇ을 나답게!” 이들에 따르면 무엇이든 주체적인 것이 옳다. 광고 속에 나오는 우리 세대의 군상 역시 대부분 비슷하다. 태블릿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고 가끔은 그래피티도 그리는 우리들. 창의적으로 나만의 것을 만들어내는 멋진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광고가 숱하게 보여주는 이 역량들은, 결국 스스로가 증명해내는 수밖에 없어졌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어째 점점 세계 각국이 신자유주의와 멀어져가는 모양새인데, 노동 시장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신자유주의 우산 아래로 모여드는 것 같다. 모든 것은 개인의 역량으로 통한다. 광고 속 우리는 결과로서만 존재할 뿐, 그렇게 되기까지 필요한 과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과정은 우리 몫이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 자리하고 있는 플랫폼들은 스리슬쩍 소비자들의 어깨에 ‘크리에이터’라는 딱지를 붙여준다. 어느날 갑자기 유명해진 성공 사례들을 보며, 그리고 얼결에 붙어있는 그 딱지를 다시 한 번 둘러보며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언젠가는 ‘그럴 자격이 있는’ 잠재적 크리에이터이자 잠재적 IP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브런치도 마찬가지다. 블로그는 아무나 글을 쓸 수 있지만 브런치는 아니다. 모종의 누군가가 검증해주었다는, 작가에게는 조금 자랑스러운 딱지를 제공한다. 정제된 콘텐츠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자에게도 분명 윈윈이겠지만, 브런치가 그토록 글쓴이들에게 ‘작가’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이유는 있다. 좋은 그리고 많은 IP가 모인 곳에 소비자는 따라온다. 그리고 물론, 지금 나도 여기에 편승하고 있다.
마케팅을 무럭무럭 먹고 자란 MZ 세대는 나다워지기 위해 비슷해진다. 오늘도 누군가는 트레바리에서 독서 모임을 신청하고 누군가는 패스트캠퍼스나 클래스 101에서 유튜브를 시작하기 위한 강의를 듣는다. 나 역시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르는 ‘제안하기’를 기대하며 브런치에 글을 올린다. 모두가 훌륭한 예비 작가이자 예비 일러스트레이터다. 우리 세대가 노인이 되었을 때는 프리랜서에 의한 프리랜서의 경쟁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수요를 넘는 공급은 언제나 을이기에, 그 미래에서 어째 좀 쓴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