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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정빈 Oct 05. 2020

인생은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면으로

  이집트 왕자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Mose)'의 일대기를 다룬다. 1998년도 영화니까, 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와 함께 극장에 갔던 것이 이 영화와의 첫 만남이었다. 미미한 기억이지만 아빠가 그날 없었고 나와 엄마와 형이 나란히 앉아 큰 스케일에 압도되어 보았던 것 같다. 그 첫 만남에 홀랑 빠져 시간이 반짝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에는 그런 친구들이 있다. 전학을 와서 첫 만남에 순식간에 서로 친해졌다가, 갑자기 다시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가야 한다고 했던 친구.  

  그런데 그 친구가 가끔씩 내 앞에 예기치 않게 나타나곤 했다. 적적히 길을 걷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에 '어?' 하고 '너!' 하는 것처럼 적적히 TV 채널을 돌릴 때 내 앞에 나타나 리모컨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서로 잘 지내고 있는지 반가워하며 확인하곤 했다. 때로는 1시간 30분 정도 진득이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얘기가 끝나면 그 친구에게, "너 여전히 감동적이구나"  한 마디 해주고 헤어지곤 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한 10년 넘게 만나지 못해 이제는 기억에서도 사라져 가고 있을 때쯤 오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내 앞에 불쑥 나타난 이 녀석.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넓은 광장 수많은 얼굴들 중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그 그리운 얼굴. 넷플릭스라는 이름의 광장 안에 수많은 영화들 중에 역시나 '어? 너!' 하게 만드는 인상적인 포스터. 나는 손가락으로 그 친구를 가리킨다. 내 옆에 사랑하는 아내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지만 셋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고 헤어진 후  "와, 잘 만들었다"하고 아내가 말했을 때 나는 "그지?"하고 그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여운을 곱씹었다.  어릴 적에는 단순히 가슴이 쿵쾅거렸다고 느꼈던 장면들이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감정 이상의 사유를 하게 한다. 어떤 격정적인 순간에선 '내가 이런 것에서 감동을 느끼는구나'하고 깨닫기도 하고 다른 격정적인 순간에선 '지금 세상에 꼭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네.' 하며 소통의 욕구를 느끼기도 했다. 옛날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주고 싶은 할머니처럼 나는 얘기를 듣고 싶은 손주들을 불러 내 곁에 앉힌다. 옛날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모세가 살았단다.  

  

  모세는 원래 이집트의 노예 신분이었던 히브리인들의 자손이었지.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노예의 인구를 조절한답시고 이집트 왕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모조리 수장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거지 뭐니. 모세의 친모는 모세를 살리고 싶어 안감힘을 썼지. 모세의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갓 낳은 모세를 바구니에 담아 나일강에 띄우는 거였단다. 눈물을 눈에 머금고 자장가를 부르면서 모세의 바구니를 강에 띄우고 제발 살기를 기도했단다.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던지 모세는 강물 따라 넘실넘실 흘러 이집트 왕비의 손에 거두어지게 되었어요. 마음씨가 따뜻했던 이집트 왕비는 모세를 번듯이 잘 키워내었단다. 배 다른 형인 람세스와도 아주 사이가 좋아서 주워온 자식이라고 의심 한번 해본 적 없이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장년이 되지. 

  너무나 행복했던 삶이 지옥으로 변한 건 한 순간이었지. 우연히 자신이 히브리인의 자손인걸 알게 된 게야. 자신을 행복하게 했던 물질적 풍요들이 사실은 나를 있게 해 준 사람들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니. 심지어 내가 아버지로 생각했던 이집트 왕이 실은 나를 죽이려고 했다니. 그로 인해 내가 이렇게 왕자가 되었다니. 이 인생의 알 수 없는 연결고리들에 정신이 미칠 것 같았지. 그때까지 가축 정도로 생각했던 히브리인들이 자신을 낳아준 인간,  동등한 인격체로 보이는 순간 모세는 엄청난 죄책감과 무력감에 짓눌리게 되었단다. 머릿속 혼란, 긴장과 식은땀이 그의 전신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의 눈앞에 들어온 것은 노예 감독관이 히브리인들에게 채찍질을 하는 모습이었지. 그리고 힘 없이 쓰러진 노인에게 무자비하게 일을 하라고 쳐대는 채찍질 앞에 그의 감정은 격해졌지. 격해진 감정에 몸을 맡긴 순간 눈 깜짝할 새 감독관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린 자신을 발견한 모세는 그 길로 이집트 왕궁을 박차고 사막으로 도망가버렸어. 깨져버린 거울 앞에 서서 산산조각 난 자신의 몸을 계속 바라볼 수는 없는 것처럼 깨져버린 자신의 삶에서 황급히 비켜야만 했던 거야. 그것만이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는 길이었지. 

  사막에 목숨을 맡긴 모세는 운이 좋은 건지 하나님의 이유 있는 인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한 유목민족의 거점에 이끌리게 된단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사막 도적들에게 곤경을 겪고 있던 유목민들의 아이들을 구한 모세는 그들에게 큰 환영을 받게 된단다. 유목민족의 제사장, 족장이라고 하는 것이 편하겠구나, 족장은 모세를 가족으로 받기 위한 큰 잔치를 준비한단다. 그 자리에서 족장은 모세에게 큰 감사를 전하지. "당신 덕분에 우리 아이들이 목숨을 구했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실망과 미움으로 인해 자괴감에 깊이 빠진 상태였단다. 그래서 그런 칭찬을 받고도 침울한 얼굴을 지우지 않았지. 모세를 본 족장은 밝은 얼굴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유쾌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하는 거야!.


  "양탄자 끝에 실 한 올로는 양탄자 전체에 새겨진 아름다운 무늬를 볼 수 없다네! 사람은 사람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 한다네."


  그래, 하나님의 눈으로. 마치 우리가 양탄자를 한눈에 보고 그 그림의 모습을 알듯이 하늘에서 인생이라는 그림을 한눈에 봐야 그 사람의 전체적인 무늬를 평가할 수 있는 거란다. 할미가 오늘 너희들에게 꼭 얘기해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야! 사람은 멈춰있는 존재가 아니고 움직이는 존재란다. 때문에 사람은 하나하나 점을 찍고 있을 뿐이지. 마치 잉크 인쇄기가 종이에 그림을 인쇄하는 것과 같단다. 잉크 인쇄기 아니? 요새는 레이저 프린트가 많아서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잉크를 부착한 노즐이 잉크를 위아래 댕기면서 백지 위에 색을 입혀 나간단다. 위에서 아래로 찍찍- 소리를 내며 점을 선으로, 선을 면으로 바꿔가지. 마치 우리 인생처럼 말이야. 점을 찍다 보면 선이 되고 선을 긋다 보면 면이 되어 죽을 때가 되면 완성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 그 인생의 전체 그림에서 검은 점이 한두 개 있다고 해서, 그림이 망가지진 않는단다. 그 검은색 점도 얼마든지 멋진 그림의 일부가 될 수 있지. 모세는 이런 족장의 격언을 듣고 나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단다. 과거의 검은 점은 그대로 놓아두고 더 이상 붙잡고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단다. 앞으로 어떤 색을 칠해 나갈지가 중요할 뿐이었지. 훌훌 털고 일어난 모세는 새 삶을 시작한단다.   

  그런데 이쯤에서 분명히 얘기해둘 것이 있구나. 이 할미가 얘기해주는 말이 일부러 검은색 점을 찍어도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단다. 아름다운 그림이 되려면 검은색도 있어야 된다는 식으로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인생을 그리는 것은 유사하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단다. 그림을 그릴 땐 내가 결정해 놓은 크기의 백지 위에 어떤 완성된 모습을 머릿속에 세워놓고 그린단다. 그러니 검은색 점을 일부러 찍는 것이 멋진 그림을 만드는 수법이 될 수 있는 것이란다. 그러나 인생이란 백지는 크기가 얼마 난지, 세모인지, 네모인지, 동그라미인지 조차 알 수가 없단다. 그리고 내가 그 백지 위 어디에서 그림을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니 완성된 그림에 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그려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망망대해 가운데 떠 있는 표류하는 배가 어디로 가야 좋은 지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여기서 만약 내가 일부러 알 수도 없는 백지 위에 검은색 점을 찍는다면 마지막에 내 완성된 그림에 그 점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있겠니. 그것이 적당한 정도였는지, 너무 많았는지, 아니면 너무 적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란다. 그 검은색 점 덕분에 인생을 마칠 때 자기 스스로도 해석할 수 없는 혼란한 그림을 보게 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죽음이라는 공간으로 나아갈지 모르지. 그래서 할미는 인생이라는 그림을 그릴 때는 검은색 점은 실수의 산물로 남겨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단다. 그래야 그나마 적당히 검은색 점이 내 그림에 찍힌단다.  마치 표류하던 배가 의도하지 않아도 검은 먹구름을 만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먹구름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래 모세처럼 말이다. 모세는 새 삶을 살기로 다짐한 후 결코 다시는 왕자의 신분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집트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단다. 놀랍게도, 모세는 자신이 부렸던 노예들을,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집트 왕궁으로 돌아간단다. 그는 자신의 뒤에 찍혀있던 검은 점을 보고 다음 발걸음은 태양과 같은 밝은 색 점을 찍어나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란다. 모세의 인생 그림은 덕분에 너무나 아름답게 완성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선지자로 기억되고 있단다.  

  이 할미는 살면서 자기의 과거를 미워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과 반면에 자기의 과거에 당당해서 현재를 잘못되게 살면서도 씩씩한 자들을 많이 보았단다. 그림에 검은색 점 하나 찍혔다고 포기 해버 리거나 검은색 점도 인생의 묘미라면서 계속 찍어대는 자들이지. 그런 관점들은 자기에 대한 시선에서 그치는 것이라 타인에 대한 시선에도 그대로 적용된단다. 타인의 실수 한 번을 보고 그 인생의 가능성이 0이 된 것처럼 혐오하고 무시하는 자들과 자기와 가까운 타인을 사회적 비난으로부터 감싸주면서 별 것도 아닌 일로 성질낸다고 하는 자들. 죄는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적당히 죄를 짓고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 

  할미는 우리 손주들이 모세처럼 살길 바란단다. 자신에 대한 미움을 지우고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자. 자기의 어두운 과거를 벗 삼아 밝은 미래를 선택하는 자.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처럼 타인을 보아주고 이끌어 주기를 바란단다. 그래서 서로의 어두운 과거에 밝은 빛을 비추고 주변 사람들을 서로의 죄와 미움에서 해방된 자유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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