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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정빈 Sep 22. 2020

모여라, 다시 약속할 때이다.

  토요일에 학교 선배 결혼식이 있었다. 식장에는 거의 10년 만에 보는 선, 후배들 있었다. 반가웠다. 얼굴만 봐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반갑다는 표현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자 절로 밝아지는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만든 단어였나 보다. 성당에서 하는 결혼식은 처음이었다. 일반식보다 더 진지한 식이었고 시간도 대략 30분 정도 더 걸렸다. 진지하고 길다 보니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나는 결혼식은 가벼운 것보다는 진지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도 결혼 3년 차에 접어든 사람으로서, 결혼은 가볍게 하면 불행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키워나가겠다는 각오, 그리고 그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공증절차, 그리고 그걸 잘 아는 선배들의 지도(주례), 이 3가지는 진실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가벼움은 이 세 가지 진지한 마음에 긴장을 풀어주는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 좋다. 물론 싫으면 이혼하면 되지, 하고 간단히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말이긴 하다. 

  어쨌든, 성당 결혼식은 이 이외에도 여러 가지 종교적인 절차들과 행위들이 곁들여짐으로 천주교가 아닌 사람들 입장에서야 확실히 길긴 길다. 그래도 종교라는 특성답게 식의 전체적인 과정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경건해지고, 따뜻해지는 순간이 군데군데 있다. 이번 결혼식에서도 어김없이 그런 순간이 있었다. 신부님이 신랑 신부에게 하는 말씀. 


 "신랑 신부는 서로 도와 주변에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돌보겠다고 약속하겠습니까?"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삶이 안정되면 그다음은 주변에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돌보겠다고 맹세하는 모습. 진지한 맹세는 감동을 준다. 사명감이 느껴져서 일까. 그리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돌보겠다는 마음이 점차 희귀해지고 있는 지금 현실에서 그 감동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감동을 더 크게 느끼려면 현실이 더 팍팍해지면 되는 것인가 생각이 들어 웃음이 피식 난다. 신이 있다면 참 얄궂은 장난이다.

  식이 다 끝나고 경건한 예배실 밖으로 나와 넓은 야외 광장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다 마치자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식사가 되지 않아 이제는 헤어지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일찍 헤어지기는 못내 아쉬웠다. 서로 바빠서 이런 일이 아니면 쉽게 만나지도 못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래도 대학을 다니는 몇 년간 꽤 재미난 추억을 함께 쌓았다. 물론 산 줄기가 높은 산과 낮은 산이 굽이치듯 어떤 사람과는 높게 어떤 사람과는 낮게 쌓았지만 산줄기는 하나다. 나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추억이란 줄기로 그렇게 연결돼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사람들도 내 아쉬움을 같이 느꼈던 모양인지 우리는 어느새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가 앉아 간소히 국밥을 한 그릇 씩 먹으면서 화기애애했다. 오랜만에 만나 그런지 궁금한 것들이 서로 많았다. 뭔가 변한 듯 안 변한 듯, 자세히 보면 변한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10년 전 모여 수다 떨던 것과 크게 다른 듯 안 다른 듯. 다만, 주제는 확실히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예전에는 뭘 해봤다, 어딜 갔다 왔다, 뭘 먹어봤다, 수업이 어떻다 등이었는데 지금은 어떤 일을 하는가, 아이는 있는가, 뭘 먹으면 아이를 가질 때 좋은가, 사는 곳은 어딘가, 재테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벼운 주제에서 무거운 주제로, 재미에서 생계로 주제가 변한 것이다.

  그중에 한 선배는 선배들 사이에서도 재테크의 전문가(?)로서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하긴, 요새는 어느 모임에 가도 그 모임에 하나쯤은 민간요법형 투자 전문가들이 있는 법이다. 나와 인연이 있는 또 다른 모임에서도 민간요법형 주식 전문가가 있다. 그리고 이 모임에서는 부동산 쪽 전문가가 있었다. 민간요법형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는 없는 세상이다. 요즘은 좋은 리영~(영)도자가 개미 무리를 이끌어가는 곳도 더럭 있기 때문이다. 이 선배도 그런 경우에 속하는 것 같았다. 많은 에너지를 쏟아서 부동산 공부도 하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살 곳을 물색한다. 다들 자기한테도 투자할 때를 알려달라면서 웃음꽃이 핀다. 이번에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한 선배의 주택 청약 쪽으로 옮겨간다. 선배는 이번에도 청약에 떨어진 모양이다. 울상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넘어간 이 두 이야기 사이에 자연스럽지 않음을 느낀다.  한쪽은 집 값이 오르길 바라는 이야기, 한쪽은 집 값이 떨어지길 바라는 이야기. 두 관계는 분명 대립 관계인데 왜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되어지는 걸까. 

  한 선배는 한숨을 쉬며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정치,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보니 모임에 가면 종종 이런 반 농담적인 질문을 받는 일이 많다.


 " 정빈아, (집 살 수 있게) 어떻게 좀 해줘라." 


  나는 슬며시 웃음 지으며 "대안은 많이 있죠..."하고 내 옆에 앉아 있던 부동산 전문가가 돼버린 형의 어깨를 탁 안았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근데 그거 하면 형님이 이런 거 못하게 돼요."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형은 "그러면 안돼 정빈아, 나도 힘들어."하고 귀여운 행동으로 내 장난을 받아주신다. 웃음이 한 바탕 지나가고 갑자기 귀신이 지나간 듯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나에게 어떻게 좀 해달라고 얘기했던 선배는 이 가라앉은 분위기가 자기 책임인 것 같았나 보다. 말을 꺼내 허공에 무거워진 분위기를 갈무리한다.  


 "아이고, 부동산 얘기를 하니 이렇게 분위기가 마무리되네. 다 먹었으면 가자!"


  이곳엔 분명 잘못한 사람도, 또 미움도 없었다. 다만, 먹구름이 몰려왔다가 비를 뿌리지 않고 지나가 버렸을 뿐이다. 그 자리에 대부분이 집이 없었고 부동산 투자는 집 값을 올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순간 깨달았을 때, 혹은 우리 모두가 사이좋게 집을 가질 수 있는 날은 없겠구나라는 것을 순간 깨달았을 때 몰려든 먹구름. 어쩌면 이 부동산 투자하는 선배도 월세살이일 수도 있다. 어떻게든 더 많이 돈을 모아 자기 집을 사려고 꾸역꾸역 힘들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아이도 낳아야 하니까. 투자 수익이 좋을수록 우리나라의 집 값은 오르겠지만 자기 집 한 채는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나저나, 우리는 언제부터 이런 세상에 살게 된 걸까. 친구들끼리의 친근한 대화 속에 서로가 적대 관계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따끔한 가시가 숨어 있는 이런 세상 말이다. 친근함이란 햇볕에 들떠 함께 뛰어놀다 예기치 못한 먹구름에 각자로 흩어지는 세상이라니. 결혼식에서 인상 깊었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신랑 신부는 서로 도와 주변에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돌보겠다고 약속하겠습니까?"


  내가 사랑과 축복을 잔뜩 담아 잘 되기를 기도했던 이 선배 부부는 자기 집 마련에 성공할 수 있을까. 그래서 약자에서 벗어나 아직 벗어나지 못한 약자들을 돌봐 줄 수 있을까. 오히려 까딱하면 이들도 약자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말이다. 우리가 이보다 먼저 약속할 것이 있는 건 아닐까. 주변에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돌보겠다는 것보다 먼저 더 이상 약자들을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이 먼저여야 하는 거 아닐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쉴 수 있는 집 한 채 정도는 소유할 수 있어야 집은 있지만 일을 못해 가난한 자들, 병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자들을 돌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자연의 모든 짐승들에게도 지구가 자기 몸 하나 쉴 곳은 보장해주듯이. 부모가 자식들에게 따뜻한 집 한 채씩은 어떻게든 물려주고 싶듯이. 친구들이 모여 서로 공정한 분배를 통해 의리를 지키듯이. 그렇게 약속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약속. 가족도 친구도 아닌 '우리'는 그럼 어떻게 약속해야 할까. 그 방법을 위해 정치가 있다. 정치는 '약속'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그 약속의 산물인 헌법을 포함한 모든 법(法)이 있다. 정치는 내편, 네 편들을 억지로 모아놓고 경쟁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원래 약속은 서로 믿을 수 있고 위할 수 있는 존재들 간에 일어나는 일이고 약속의 산물인 정치는 우리를 서로 믿을 수 있고 위할 수 있는 존재로 유지하고 싶어 생긴 장치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로 묶인 집단을 삶을 같이 하는 집단,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모든 자식들은 귀한 자식이다. 누구네 집 자식은 귀하고 누구네 집 자식은 천할 수 없다. 그래서 모두가 집 한 채 정도는 물려받을 수 있는 곳이 공동체이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약속은 뭔가 잘못됐다. 모두 모여라. 이제 다시 약속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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