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거북목으로 고생하는 전형적인 현대인 중 한 명이다. 목의 뻣뻣한 통증, 어깨와 팔 밑까지 타고 내려오는 저림 현상. 요새는 유튜브에 괜찮은 헬스 트레이너들이 많다. 나도 도움을 받기 위해 유튜브 검색창에 '거북목'을 쳐보았다. 예전부터 종종 재미있게 보아오던 빡빡이 아저씨 채널에서 거북목을 위한 교정 스트레칭을 알려주는 방송이 있었다. 나는 '오?' 하는 마음에 단숨에 화면을 톡! 쳤다.
빡빡이 아저씨는 먼저 이론 설명을 자세히 해주셨다. 현대인들이 거북목을 많이 앓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인류 진화론... 굉장히 흥미로운 설명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빡빡이 아저씨에 따르면, 아니 진화론에 따르면 인류가 거북목이 생기게 되는 이유는 자신을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진화한 자세가 그대로 계승되어 내려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주 오래오래 전, 인류가 굉장히 야생적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는 외부의 위협이라고 할 것이 큰 짐승들이었을 것이다. 혹은 예상치 못한 여러 생명체들의 습격이었을 것이다. 인류는 이러한 외부의 위협에서 가장 합당한 방어 자세를 찾았으니 그 자세가 바로 거북목을 만드는 자세다. 허리는 앞으로 굽히고 목은 바짝 앞으로 치든다. 몸과 머리를 보호하면서도 눈은 정면을 유지하여 시야를 가장 넓게 확보한다. 딱 우리가 긴장하면서 컴퓨터를 하는 자세다.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머리는 모니터를 꽃꽂이 바라본다. 오래도록 그 자세가 유지된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거북목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중요한 원인이다.
우리는 컴퓨터를 하면서 항상 있지도 않은 외부의 위협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는 외부의 위협이 큰 짐승에서 우리 주변에 무엇인가로 바뀐 것일까? 어쨌든, 거북목 현상이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한 가지. 우리들은 어떤 짐승도 쳐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에 가만히 앉아서도 마치 야생과 같은 목숨이 걸린 긴장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감지하는 위협의 정체는 가히 귀신이나 유령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지만 실제 하는 긴장. 아니면 이런 것일 수도 있다.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실체.
나는 이 말할 수 없는 실체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어릴 적 어머니의 바람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자기는 그런 사람이 제일 멋지다고. 왜 머리는 차갑다고 비유된 것일까? 그리고 머리가 중시되는 바로 이 현대에서 머리가 차갑다는 것과 사람들이 느끼는 보이지 않는 무서운 유령은... 알지만 말할 수 없는 실체는 뭔가 연관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소위 '머리'를 이성이라고 말한다. '합리적'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이성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가장 적합한 대칭으로 불려진다. 'ratio(비율)'에서 파생된 'rational(합리적)'은 분명 계산적인 속성이 있다. '계산한다'는 단어는 분명 우리에게 차갑다. 누군가 나를 계산한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느껴진다. 존엄한 나를 감히 물질적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에 대한 저항감일까. 아닐 것이다. 누군가 나를 계산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 불의를 보았을 때 느껴지는 분노의 일종인 의협적인 마음과는 다르다. 누군가 나를 계산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누군가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다. 그래서 두려움이다. '나를 계산한다'라는 문장에서 '나'를 없애고 그냥 '계산한다'라는 단어만 세워놔 보면 이 단어는 우리에게 어떤 느낌도 주지 못한다. 결국 계산은 누군가에게 사용되었을 때 우리에게 감정을 전달한다. 누군가가 마음을 담아야만 우리에게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공격하는 마음을 가진 누군가가 쥐면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그러고 보면 '계산'은 칼과 같은 속성을 지녔다. 칼은 가만히 놓여있으면 그냥 가끔 빛에 번쩍임을 튕기는 한 물건이지만 남이 들면 무섭고, 엄마가 들면 내가 먹을 따뜻한 요리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의 머리가 이성이고 이성이 계산이고 계산이 칼과 같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 씩 보이지 않는 칼을 차고 산다. 우리가 항상 일상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의 정체, 알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주변 사람들을 범인으로 지목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은 아닐까.
다시 엄마의 바람이 생각난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따뜻하게'. 엄마는 나에게 따뜻한 정신으로 칼을 쓰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 엄마가 나에게 해줬던 것처럼, 칼은 사랑하는 주변 지인들에게 요리를 하는데만 쓰라고. 그런 사람이 제일 멋지다고.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그 말을 너무 간절히 전달하고 싶을지도. 그렇지만 용기 내어 얘기하지 못하는 상황일 수도. 그래서 그 마음이 느껴져 내가 이 글을, 다음의 문장을 쓰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가족들아, 친구들아. 동료들아, 이웃들아,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따뜻하게 살자."
오늘은 우리가 들고 있는 그 칼, 내 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요리를 하는 데 사용해보는 게 어떨까. 우리 마음속 간절한 바람에 응답해 보는 게 어떨까. 그리고 그 순간, 야생에 있던 우리가 안락한 집에 들어와 쉬고 있다는 평온을 한 껏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그 평온을 정신과 온몸으로 되새겨보고 그다음 날도 해보자. 그리고 가까운 지인에서 조금 더 먼 지인에게도 그렇게 내 머리에 따뜻한 가슴을 담아 사용해보자. 더 이상 머리가 차갑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멋진 세상으로 남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모두 그렇게 해보자. 조금씩, 조금씩, 위험을 벗어나고픈 새끼 거북이가 모래사장을 파헤치며 평온한 심해로 나아가는 것처럼. 그러면 나를 그리고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거북목이 영영 사라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