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정빈 Sep 07. 2020

미세 플라스틱 없는 생수

  -미세 플라스틱 없는 생수-


 동네 카페 야외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특유의 광폭한 엔진 소리를 내며 눈 앞을 지나가는 버스를 보았다. 옆면에 부착되어 있는 커다란 전면 광고에는 '미세 플라스틱 없는 생수'라는 제목이 크게 적혀 있었다. 아메리카노라는 상당히 물에 가까운 액체를 흡수하고 있는 내 입이 실룩였다. 살짝 실소를 머금은 얼굴.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예전에 중학교 때, 재미있게 보았던 성룡이 나오는 '턱시도(Tuxedo)'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턱시도'에서는 식수원에 독을 풀어서 생수 시장을 독점하려는 악당이 나온다. 벌써 본 지가 15년은 되었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그 악당이 곤충인 소금쟁이를 이용해서 식수원에 독을 푸는 방법이 기발해서 아직까지 영상의 잔재가 머릿 속에 남아있다. '미세 플라스틱 없는 생수', 저런 생수가 나오려면 나는 악당이 있어야 하는 줄 알았다. 악당 없이도 나올 수 있을 줄이야. 살짝 실소를 머금은 얼굴.

 물론 악당 없이 이런 일은 발생할 수 없다. 플라스틱은 분명 인간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인위적인 물건이다. 우리 모두가 악당이라 악당이 없는 것이다. 모두가 악당이니 이분법이 필수적인 선악구도가 생기지 않아 악당이 없을 뿐이다. 

 정치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제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독일 태생에 저명한 철학자로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독일인으로서 나치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한나 아렌트는 아히히만(Otto Adolf Eichmann)이라는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전범을 연구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아히히만을 연구하면서 내가 커피를 마시면서 뱉어내었던 실소를 끊임없이 머금었던 모양이다. 악마를 기대했던 아렌트에게 너무나 평범하고 근면했던 아히히만은 기대를 반전시킨 순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하나인 웃음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악의 평범성'은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 어떤 체계 안에 들어가면 모두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체계를 핑계로 개인에게 합리화되어버린 악행은 더 이상 그의 양심을 훼손시킬 수 없다. 나치 안에서, 당시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은 평범한 일상 중 하나였을 뿐이다. 우리가 잔인하게 닭을 키우고 한 달에 여러 번 그 닭을 튀겨 야식으로 먹는 것처럼 누구나 하는 평범한 행위일 뿐이다. 그것을 명백한 악행으로 보기 위해선 그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외부인의 시야를 빌릴 수밖에 없다. 다행히 나치는 넓은 세계에 비하면 유럽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또, 다행히 나치는 패전하였다. 나치의 악행에 분노했던 많은 세계인들과 나치에게 당했던 많은 유대인들, 그리고 사람들은 악행이 입고 있던 평범함이라는 옷을 벗겨버렸다. 단추가 등 뒤에 있어 벗길 수 없는 옷을 남이 벗겨준 것처럼. 

 그런데 우리의 악행이 입고 있는 평범함이라는 옷을 벗겨 줄 누군가는 어디에 있을까? 미세 플라스틱 없는 생수라고 쓰여 있는 저 생수도 병은 결국 플라스틱이다. 물론 그 플라스틱 병은 친환경 마크로 무장했고, 생분해라는 과학적 용어로 우리의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있긴 하다. 그리고 100퍼센트 재활용 가능이라는 완전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충만하게 한다. 폭염과 내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 너무나 긴 장마, 그리고 이런 기후위기 속에서 끊임없이 재탄생을 예고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충격들 속에서 스쳐 간 불안감은 새로운 생수병의 탄생에 위로받는다. 그러나 재활용은 에너지를 들여 다시 사용하는 과정이다. 소비 주기가 빠르면 빠른만큼 탄소가 더 많이 배출된다. 일회용 플라스틱 생수병은 끊임없는 탄소 배출이라는 유전자를 태생적으로 타고난 물건이다. 자연에서 미생물에 의해 분해된다는 의미인 생분해라는 말도 '생분해 플라스틱'의 경우에는 58도의 고온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자연 상태에서 쉽게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이대로 온난화 현상이 계속된다면 빠른 시일 내에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얼마 전 중동지방은 50도를 찍기도 했다), 아직은 아니다. 우리를 위로해주는 생수병에 적힌 친환경 단어들이 아주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기후위기를 극복하기에는... 우리를 폭염, 기나 긴 장마, 끊임없이 진화하는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탈피시켜주기에는 부족할 뿐이다. 코로나가 걸렸는데 화이 투 벤이나 타이레놀, 판콜 S를 주는 꼴이다. 유대인을 죽이는데 착하게 죽인다고 세상이 변하진 않는다. 우리에게도 평범함이라는 옷의 뒷 단추를 풀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대체 어디에 있을까? 모든 세상이 한 마음으로 석유에너지를 신나게 사용하고 생태계를 파괴해온 지 오래다. 독일과 유럽에서만 일어났던 나치즘과는 차원이 다른 범세계적인 자유방임주의적 경제체제 속에서 우리의 외부인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도 얼마 전, 나는 인터넷을 하다가 우리의 옷을 벗겨 줄 외부인이 아직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국제적 환경단체인 국제 생태발자국 네트워크(GFN)라는 곳에서는 매년 의미 있는 통계자료를 발표하고 있는데, 각 국의 생태발자국을 수치화하여 보여주는 통계를 내고 있다. 생태발자국이란 우리가 지구의 자원을 얼마나 많이 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개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생태발자국의 정상 기준은 1.7 헥타르인데, 헥타르인 이유는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 당 매년 1.7헥타르 정도의 면적의 자원을 사용해야 지구 자원의 적정량을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2020년 1인당 생태발자국 지도를 함께 보자.



 가장 옅은 살색을 가진 나라들이 1인 당 지구의 자원을 정상적으로 소모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오른쪽 상단, 조그마하지만 우리나라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나라는 가장 심각한 적갈색에서 한 단계 낮다. 다행히 우리가 형님으로 모시고 있는 미국보다는 역시 동생이 못하다. 지구 절반 넘는 영역이 색깔이 짙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 옅은 살색을 유지하고 있는 면적도 상당 부분 남아있다. 우리의 평범이라는 옷을 벗겨줄 외부인들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우리 악행들에 옷을 벗겨줄 그 은인들이 우리가 후진국이라고 무시하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들이라는 것이 역시나 실소를 머금게 한다. 나치즘의 옷을 벗겨준 사람들도 나치가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던 비 게르만 민족들이 아니었는가. 우리가 무시하던 사람들이 우리의 은인이 될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서 이런 기괴한 형태가 항상 도사리고 있으니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우리가 이런 기괴한 형태를, 모순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실상을 회피하려고 하는 마음이 오히려 우리를 패전국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나치가 패전을 하고 나서야 외부인들에게 자신의 평범이라는 옷을 벗겨달라 맡겼듯이, 우리도 패전을 해서야만 우리가 후진국이라고 무시했던 사람들의 경고를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나치의 민족 우월주의를 보면서 '오만한 놈들'이라고 욕을 했듯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오만하다고 자각할 수 있다면 그 결과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지만. 아무리 질이 나쁜 범죄자일지라도 자기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자각할 수만 있다면 분명 그 남은 인생의 결과는 달라진다. 그리고 지금이 우리가 우리의 남은 인생의 결과를 바꾸기 위해 자각할 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 너는 존재만으로 소중하다는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