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을 공부하다 보면 결국 다시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그리고 그 해답은 스스로의 해석을 통해 찾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예를 들어, 우주의 시작을 찾기 위해 빅뱅까지 우리가 거슬러 올라갔을 때 '대체 빅뱅은 왜 일어난 걸까?'하고 질문이 떠오른다면 말이다. 즉 세계는 왜 시작하게 된 걸까, 왜 모든 만물이 생겨난 걸까 묻게 된다면 말이다. 이럴 때 우리는 그 답을 결국 우리 해석으로 밖에는 찾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 중에도 신을 믿는 자가 있다. 아직까지 이 세계의 창조는, 빅뱅은 신이 일으켰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그리고 과학이라는 탐구 방법으로는 이 이상을 밝힌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전제된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가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래서 과학은 신을 부시는 속성과 신을 증명하는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어쨌든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고자 하는 그 근원에는 우리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 걸까?'라는 물음은 과학 기술의 발달 이후 우리를 결국 끊임없는 과거로 이끌었다. 무려 138억 년 전(빅뱅의 순간)까지 우리를 데려간 이 물음은 결국 그 여행의 끝에서 과학 기술의 발달 이전에 해왔던 설명 방식으로의 회귀를 명령했다.
'그래, 더 이상 가시적(유물론적)으로 증명을 해낼 수 없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가장 적합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총체로서 가장 우리의 존재를 잘 설명하는 해석은 무엇인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탄생하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물학적으로 우리의 탄생은 조상의 존재로 인한 것이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우리의 조상은 원래 바다 생물이었다. 아마 그 이전의 단계를 파고들면 미생물이었을 것이다. 진화론적으로 우리의 태초를 따라가려고 하면 호기성(산소를 마시고 사는) 미생물들의 탄생을 한 극적인 순간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산소를 통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산소를 만들어내는 무엇인가를 우리의 근원적 존재로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근원으로서 전 지구에 퍼져있는 녹색 생명체들, 즉 식물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식물은 약 30억 년 전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면 식물들이 이 지구에 생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식물들이 탄생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태양이라는 것에 존재다. 태양이 있기에 식물들이 광합성을 하고 탄소를 끌어들여 산소를 내뿜는다. 인류의 조상들도 대부분 이 사실들을 알았던 것 같다. 태양신 숭배는 세계 곳곳, 인종을 초월하여 나오는 현상이다. 우리나라도 고대에는 태양신을 숭배했고 그 때문에 태양의 찬란한 빛, 백색을 좋아하여 백의민족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조상들보다 조금 더 파고들어보자. 그럼 태양과 함께 산소를 만들어주는 탄소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탄소는 우리의 신체, 사물들을 대부분 구성해주는 물질적 기본단위이기도 하다. 태양은 수소가 뭉쳐 헬륨이 되는 과정의 상태이다. 수소가 핵융합을 통해 헬륨이 되어가면서 빛과 열을 발하는 것을 우리는 이름 붙여 태양이라고 한다. 이는 태양이라는 별이 만들어내는 물질 수준이 헬륨에 그친다는 것을 말한다. 탄소는 헬륨보다 더 무거운 다음 단계의 원소이다. 우리가 흙에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로 생각하는 질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탄소와 질소는 태양보다 더 큰 별이 만들어낸다. 태양보다 더 큰 중력을 가진 별들이 엄청난 힘으로 수소들을 끌어들여 헬륨으로, 헬륨에서 탄소로 그리고 질소로 거듭거듭 바꿔나간다. 그리고 이런 별이라는 현상(핵융합을 통해 빛과 열을 내는)을 통해 우주의 수많은 별들이 우리가 현대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인 철까지 만들어낸다. 그리고 폭발한다. 이를 초신성 현상이라고 한다. 이 초신성이라는 폭발 현상에서 또 엄청난 에너지가 생겨나고 철 이상의 물질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더불어서 그 물질들을 우주 곳곳으로 뿌린다. 우주가 이런 과정을 100억 년 정도 펼쳐내면 생명이 탄생할 여건이 만들어진다. 빅뱅이 138억 년 전이라고 추정되고, 지구의 생명체가 대략 40억 년 전에 출연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시간적 연계성이다. 쉽게 말해 놀라운 타이밍이다. 지구의 그 이후는 식물 이후에 펼쳐지는 진화론의 과정이다. 인간이라는 고등 동물의 탄생하는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길게 잡아도 500만 년 전 정도이다. 우주의 시작부터 생명의 진화까지 마치 인류의 탄생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는 듯이 시간적 연계가 끊김 없이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가 138억 년 정도를 공들여 탄생시킨 고귀한 생명체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적인 것만 아니라도 현재라는 공간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진실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도 온 우주가 있기 때문이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물, 대지, 식물, 동물, 주변 모든 것이 우리의 생명에 필요하다. 이를 생태적으로 공생관계에 있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인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온 우주가 떠받치고 있는 고귀한 어떤 존재이다. 이것이 '왜 우리는 탄생하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현 지식체계에서 가장 적합한 설명이다.
혹자는 이렇게 비난할지도 모른다. 너무나 다분히 인간 관점이 아니냐고 말이다. 온 우주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그런 해석을 통해 위안받고 싶은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 존재론적 관점은 인간만에게 적용되는 관점이 아니다. 사실 모든 생명체, 모든 물질들도 그 존재를 위해 인간을 필요로 한다. 식물들의 관점에서 동물은 꼭 필요하다(식물과 인간의 사이가 너무나 공간적으로 멀게, 그리고 촘촘하게 여러 존재들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단순히 식물과 동물의 관계로만 이 설명을 대체하려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극적인 예가 있다면 자신의 생명을 먹어주는 동물이 없이는 결국 식물들이 크나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장과 번식을 지속적으로 조절해 줄 동물계가 없다면 식물들의 지나친 번식은 지구의 이산화탄소를 급감시킬 것이다. 식물의 생명 유지 원인 이산화탄소의 급감은 결국 어느 한계점에서 식물 대다수의 무작위적 사멸을 초래할 것이다(마치 탄소배출을 너무 과다하게 해서 어느 순간에 갑작스러운 인류의 멸종을 예견하고 있는 기후위기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더 나아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식물(현재 밝혀진 바에 따라 식물은 고통을 느끼는 신경계가 없다는 것이 정설)과 고통을 느끼는 동물계가 이런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정말 우주의 묘한 이치라고 밖에는 설명하기 어렵다. 어쨌든, 식물의 존재 또한 모든 우주의 협력이 필요하다. 인간이 온 우주의 정성으로 지금의 존재가 유지 되 듯, 식물도 온 우주의 정성으로 탄생했으며 그 존재가 유지된다. 모든 생명체들은 서로의 존재로 자신의 존재가 증명된다. 서로의 존재로 현재를 산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이 없는 사물의 존재도 생명의 존재로 그 존재가 증명된다. 물질계가 없다면 생명이 존재하지 못하듯, 생명이 이용하지 못하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물질계의 존재도 의미가 없게 된다. 100 억 년의 별의 탄생과 폭발이 생명을 위한 작용이었듯, 생멸의 활동은 사물의 필요성을, 즉 존재의 이유를 부여한다. 이는 마치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다. 부모가 있어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 부모가 존재한다. 자식이 없었다면 철수와 영희, 정빈과 진주일 뿐이다. 이처럼 사물과 생명도 서로의 존재로 서로를 현재 하게 한다. 우리는 이렇게 물질계에서 생명계에까지 모든 존재가 서로를 위해 필요한, 그래서 너무나도 소중한 서로들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우리'라는 단어는 인간들을 한정되게 묶는 단어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계,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이를 이해한다면 "너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라는 말을 영혼과 온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단순히 이 문장을 멋지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이 문장이 멋진 것이다. 당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소중하다. 그리고 나도 당신에게 그만큼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의 순간순간마다 그 선택에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담는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서 나는 '선택에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야 한다'라고 명령조로 이 글을 마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나의 명령조의 문장이 읽는 사람의 마음에 어떤 파장을 주었다면 이 명령조의 글은 자유로운 그대들이 용서해줄 것이라 믿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디에 있건 당신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소중한 존재이다. 그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