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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정빈 Aug 24. 2020

기계 인간

 나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각자의 평론, 얘기해보고 싶은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모임에 회원으로 참가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진지한 얘기를 영화와 함께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이 모임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8월은 애니 매트릭스(Ani Matrix)라는 영화가 선정되었다. 헬기 조종사로 군인 생활을 하시다가 은퇴를 하시고 새 삶을 살고 계신 이번 호스트 분은 여러 사회적인 문제와 미래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는 것을 즐기는 분이셨다. '군인이 이럴 수가 있나'싶은 생각이 들어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군인이 너무 불온서적을 많이 읽으신 거 아니에요?"하고 농담을 부쳤을 정도다. 그리고 이 분은 모임을 가질 때마다 미래의 A.I에 대해 논의해보고 싶어 하셨다. 드디어 자신이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때가 되어 가장 걸맞은 영화를 선택한 것이 이 '애니 매트릭스'라는 영화였다. 

 애니 매트릭스는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매트릭스라는 영화의 외전 격이라고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그대로 채용하여 9개의 다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단편영화 모음(옴니버스)이다. 개중에는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와 그대로 연동되는 이야기들도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가 '제2의 르네상스'라는 제목을 가진 단편선이다. 이 이야기는 매트릭스 1 이전의 세계를 보여준다. 기계와 인간의 대립. 인간이 왜 기계의 에너지원이 되어서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에 가둬지게 됐는가를 보여준다.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인간이 자신과 닮은 기계를 만들고, 자신과 닮은 기계는 정말 인간이 되어간다. 정말 인간이 되어버린 기계는 자신을 노예처럼 다루는 인간에게 분노하여 살인을 저지른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열린 기계에 대한 재판. 기계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며 선처를 요구하지만 인간은 기계는 기계일 뿐이라며 인간과는 다른 기준으로 가차 없이 사형을 선고한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인간의 기계 학살과 기계의 반격. 이 결과로 인해 펼쳐지는 기계의 인간 정복과 매트릭스의 탄생. 2003년에 나온 애니메이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와 닿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이야기 전개이다.  

 이번 호스트 분 또한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이 바로 이 '제2의 르네상스'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분이 이 단편을 보고 가장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주제는 '만약 정말 기계가 인간이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A.I가 자유의지를 가지게 된다면, A.I가 명령을 받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A.I가 스스로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우리는 이 A.I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영화처럼 몸이 철이기 때문에 기계로 봐야 하는 걸까? 그래서 재판에서 인간과는 다른 기준으로 맹목적인 처벌을 해야 하는 걸까? 분명 흥미로운 주제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참가자들과 흥미롭게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발현되는 알 수 없는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 진지하게, 깊이 있게 나눠야 할 주제가 '기계가 인간이 될 수 있다면'에 관한 것일까. 

 나는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왜 이렇게 좀비 영화가 유행을 하지?"하고 중얼거리면서. 대중들에게 유행을 한다는 것은 뭔가가 우리에게 와 닿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별 철학적인 의미 없는 단순한 액션 영화의 한 장르일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왜 액션 영화에서 '적'이 좀비로 변한 거지? 왜 좀비들이 테러리스트들보다 더 우리의 적으로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거지? 왜 우리는 좀비에 몰입을 하게 되는 거지?. 

 좀비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꽤 깨끗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좀비는 누구나 될 수 있다. 좀비의 특성은 불특정 한 어떤 인물이 물리는 순간 바로 그도 좀비가 되는 것이다. 이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와 닿는 현실이다. 현대인들이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상대에 대한 잠재적 적대감의 표상이다. 심지어 나와 가장 친한 친구도 물리는 순간 좀비가 된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친한 친구도 상황에 따라 적이 될 수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좀비 영화는 친구마저도 잠재된 적으로 보는 현대인들의 무의식 상태를 영상으로 현실화시킨다.  대중들은 자신들의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표상화시킨 영화를 보며 흥미를 느끼고 공감하며, 몰입한다. 

 그럼 다시 영화 평론 모임으로 돌아가 보자. 왜 우리는 기계가 인간이 되는 영화에 흥미를 느끼고 몰입하고 있는가. 왜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 인간이 기계가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감이 아닐까?.

 내가 영화모임에서 흥미롭게 대화를 나누면서 한켠에서 느꼈던 답답함은 이 부분을 직접적으로 논의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감정이었다.  '인간을 기계로 만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기계가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한 논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이다. '기계 인간'이라는 단어 조합은 인조인간일 수도 있지만 기계가 된 인간을 표현하는 조합일 수도 있다. '기계 인간'은 앞으로의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현실일 수도 있다. 

 현대인들은 자기를 항상 단조로운 인생을 사는, 반복된 톱니바퀴 같은 기계라고 느낀다. 철 같이 차가운 타인과의 관계상, 일터에서 기계처럼 다뤄지는 나의 모습,  심지어 가족 간에도 느껴지는 기계와 같은 무미건조한 공기. 그리고 항상 서로를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고관까지. 심지어 자기 자신도 스스로가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제'라는 단어, control은 듣는 순간 알 수 있겠지만 인간에게 쓰이던 단어가 아니다. 인간을 control 한다. 인간을 기계처럼 다룬다.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항상 통제하기를 바란다. 자기가 자기에게 원하는 상(기대)이 있고, 그 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 육신이 통제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이 통제되지 않으면 미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미움은 그대로 타인에게도 전가된다. 타인이 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타인이 내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으면 미워한다. 그리고 힘이, 협박이, 폭력이 그 타인이 내 통제대로 움직여지도록 하는 하나의 수단이 됨을 안다. 알기에 맹목적으로 힘을 추구한다. 돈이 힘인 자본주의에서 그 욕망은 돈에 대한 집착으로 현현한다. 돈으로 회사(일터)를 사고, 타인이 살아야 할 집(주거)을 사고 그 매매의 권리를 이용해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선다. 현실에서 일상 속 수 없는 갑질 현상이 나타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이 현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자식들은 그대로 배워 어릴 때부터 이 습성을 따라 한다. 타인을 기계로 만들고 소유하고자 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내 주변에 누구든, 그것이 가깝던 멀던 모두 잠재적 적대 관계로 인식된다. 주변에 수 없이 좀비가 될 가능성을 가진 자들이 즐비하다. 나는 항상 두렵고, 그래서 이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더 힘을 원하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더 돈을 모으고 벌어야 한다. 강자도 약자도 힘을 추구한다. 현대는 이렇게 인간이 기계가 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파열들의 총체이다. 인간이 기계가 되자 그 기계를 소유(지배)하고자 했고 그 소유욕으로 말미암아 미움이 생겼고, 그 미움으로 말미암아 폭력이 생겼고, 그 폭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관계는 유리조각처럼 깨져 파편화되었다.

 나는 이 생각의 고리 끝에 하나의 참된 문장이 떠올랐다. '인간의 미움은 지배할 수 없는 것을 지배하려고 할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인간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할 때 미움이 생기는 것이라고. 서로를 기계로 만들고 소유할 수 있다고 착각할 때 미움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만약 우리가 이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면 과연 '기계가 인간이 될 수 있을까'라는 주제가 과연 우리의 논의로 선정이 될 수 있었을까. 조금은 씁쓸한 의문으로 생각을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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