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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정빈 Oct 13. 2020

이제 우리 모두 주부가 되자

  나는 사회적으로 여러 호칭으로 불린다. 동네에 이웃들을 위한 공간을 운영하며 동네를 위한 사업들을 하고 있으니 사회 운동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 석사학위도 받았고, 이제 연구 동료가 된 교수님과 함께 학술지 논문을 써나가고 있으니 누군가는 이제 연구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오히려 동네 자주 보는 이웃들은 정치인, 정당인으로 많이 부르기도 한다. 몇 번 정도 공직선거에 나가기도 하고 꽤 오랫동안 정당활동을 하였다 보니 동네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그런 호칭이 익숙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나에게 생계를 유지할 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일들은 직업이라 부를 수 없다. 그래서 나에게 직업은 주부이다. 실제로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내 직업을 소개할 땐 주부라고 종종 얘기하곤 한다. 아내가 힘들게 번 돈을 내가 그냥 받아 살아가고 싶진 않다. 물론 아내는 내가 하는 활동이 좋아서 후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주부 일을 잘하지 못해도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용돈을 챙겨줄 것이라고. 그러나 나도 내 가정에 보탬이 되어 당당히 생계를 유지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직업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내가 하는 집안일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해 보고 싶다. 역시 직업 얘기를 하려면 그 직업에서 무엇이 가장 고생스러운지를 나누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수다거리다. 주부들이 모이면 무엇이 가장 고생스러울까. 나는 아직 한 번도 주부모임에 나가본 적은 없지만 내 예상엔 아마도 설거지가 아닐까. 주부의 삶을 평생 동안 살고 있는 우리 어머니도 가장 싫어하는 일이 설거지였다. 그리고 여전히 설거지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우리 어머니는 항상 '아유 지긋지긋한 설거지'라고 표현하셨다. 내가 주부가 돼보니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표현이 이렇게 잘 들어맞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집안일이라는 것 중에 하루도 빠짐없이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설거지다. 바닥청소, 빨래... 물론 성심껏 하려면 매일 할 수도 있는 것들이지만 미루려고 맘먹으면 미룰 수도 있는 그런 일들이다. 그러나 설거지는 정말 매일매일 해야 한다. 외식 찬스를 쓸 수 있다면 예외가 되는 날도 있겠지만 흔한 일도 아닌대다가 삼시 세끼 외식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루 두 끼를 먹는 집안이라고 해도 두 끼 중 한 끼는 집에서 먹어야 한다. 그러니 매일매일 설거지가 있을 수밖에. 그러니 주부습진 안 걸리는 것보다 걸리는 게 쉽다는 표현이 나올 수밖에. 그리고 설거지의 치명적인 점이 하나 더 있다. 밥 먹은 다음 일이라는 것이다. 몸이 쉬고 싶다고 얘기할 때 지금 안 하면 더 쌓인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추동시켜 육신과 이성의 갈등을 유발하는 이 설거지의 태생적 속성이 정말 못돼 먹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육신과 이성의 갈등은 스트레스를 낳는다. 스트레스는 독이다. 제 명대로 살고 싶다면 빠른 선택을 통해 갈등 시간을 최소화해야 한다. 사람은 계속 주방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쉬고 싶다는 육신을 누를 수 있게 한다.  역시 사람에게는 밥 해 먹는 것이 중요하다. 써놓고 보니 육신과 이성의 갈등이 아니라 육신과 육신의 갈등이다. 밥 먹고자 하는 육신이 쉬고자 하는 육신을 이긴 것이다. 하긴, 생존이 있어야 쉼도 있다. 오늘도 살기 위해 숨 한 번 몰아쉬고 싱크대 앞에 서는 모든 주부들의 모습이 훤하다. 주부들은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원래의 그곳으로 끙끙되며 손을 내딛는다. 절벽을 오르기 위해 돌을 잡는 것 마냥 힘겹게 그릇을 손에 잡는다. 그렇게 주방을 정리해 나간다. 다시 공간을 회복시킨다.

  생각해보면 주부라는 직업은 집안을 정리하는 일이 대부분인 것 같다. 구성원이 어지러 놓은 것을 다시 회복시킨다. 청소도, 빨래도 다 그런 일의 일종이다. 공간을 다시 쓸 수 있도록 하고 옷을 다시 입을 수 있게 한다. 그러니 주부의 일은 치료라는 표현으로 멋지게 비유할 수 있다. 우리 삶에 의사보다 더 가깝고, 필수적인 일상 치료사. 이 일을 보조해주기 위해 '정리 컨설턴트'로 활동하시는 <최고의 인테리어는 정리입니다>의 저자 정희숙 님도 주방을 주방답게, 서재를 서재답게 만드는 것을 정리라고 정의한다. 정희숙 님에 경험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정리가 안 돼서 식탁에서 밥 못 먹고 침실에서 잠을 못 잘 정도라고 한다. 만약 그런 집에 들어간다면 항상 우울할 것이다. 정희숙 님은 공간을 회복시키면 우울증에 걸린 공간지 기도 마음을 회복한다고 말한다. 정리는 정말 인간을 치료하기도 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정리는 생산성을 유지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마음에 활기를 일깨우고, 요리를 하고 싶게, 책을 읽고 싶게, 뭔가 생산적인 일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어지렵혀진 장애물들을 치우고 생산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를 만든다. 집안 정리는 한 가정의 생산성 극대화를 유지한다. 그리고 정리의 생산성 효과는 비단 한 집안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에도 다르지 않게 적용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어렵다, 우리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예전보다 못해지고 있다, 빈부격차가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은 분명 정리가 안 돼 오랫동안 쌓인 먼지와 필요 없는 물건들이 그대로 방치돼서 국민들의 집안 곳곳에 쌓여있다는 말일 것이다. 더러워진 침실에서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발 디딜 틈 없는 거실에선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지도 못한다. 창고가 된 서재에서는 공부를 하지 못하고, 쓰레기장이 된 주방에서는 요리를 만들지 못한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지속된다면 국민들은 활력을 잃고 생산 동기를 잃어버릴지 모른다. 정리가 필요하다. 물론 한 껏 쌓아놓고 나중에 대청소를 해버릴 수도 있다. 참다못한 엄마가 머리띠를 매고 무기력해진 집안사람들을 진두지휘하면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굉장히 오랫동안 고생스러운 일이다. 고생을 넘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대청소보다 현명한 방법을 택해야 한다. 대청소보다는 청소를 자주 하는 방법이 훨씬 평화롭다.   

  그러면 대체 우리가 경제에서 지금 청소해야 할 그 대상 무엇일까?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활력을 뺏고, 생산하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는 집안에 장애물들 말이다. 그것은 생산하고자 하는 마음과 반 대대 되는 마음. 바로 불로소득의 문제가 아닐까. 생산하지 않고 부유한 삶을 살고 싶다는 안빈낙도의 마음. 그리고 법적으로 그런 삶이 허용된 세상.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자가 내 가까이에 닿을 듯이 존재하는 세상. 그런 시대가 되면 누구나 열심히 일하는 것을 손해라고 느낄 것이다. 생산하고자 하는 마음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요새 어린아이들의 꿈에 상위권에는 건물주가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생산이 우리를 부유하게 한다는 생각이 없어지고 생산 없이 나만 부유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우리들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자기가 생산을 하지 않는 대신 그 땅을 이용하는 다른 이들이 생산한다는 사실은 잊힌다. 생산은 고생을 수반한다. 다른 이들의 고생도 같이 잊힌다. 자본주의적 소유권이라는 법적 권리에 사람의 땀은 가려지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성실한 자는 행복할 수가 없다. 성실은 더 이상 잘 살고 있다는 보람이 아니다. 성실은 벗고 싶지만 벗겨지지 않는 죄수복일 뿐이다. 재판관은 우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가끔 사면을 받는 자들만 그 죄수복을 벗을 수 있다. 마치 먼 옛날 노예에서 신분을 상승시킨 전설적인 인물들처럼, 몇몇만이 성실 한자에서 불로소득자로 신분이 상승된다. 

  부동산과 금융, 주식 등의 불로소득이 노동 소득보다 커져가는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얼마 전에 출판된 '21세기 자본'은 통계를 통해 불로소득(책에서는 '자본소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이 노동소득보다 더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 세계적인 현상이란 사실을 증명한 책이다. 그 책 하나로 저자인 피케티는 단 번에 세계적인 석학에 반열에 올랐다. 이 세계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구조로 그 뼈대가 통일되어 있다. 그러니 불로소득과 자본주의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피케티는 자본주의를 '소유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유'한 것만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나도  '자본주의'를 불로소득을 용인하고 또 사회적으로 전염되도록 추동하는 세상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내 5년간의 정치경제학 공부의 도달점은 이 점을 발견하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무르익은 세상에서는 고생은 회피의 대상이 되며 불성실한 삶이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된다. 한국 자본주의 체제도 어느덧 100년이 되어간다. 여물대로 여물어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거에 성실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현재 성실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분명 달라졌다. 

  무르익은 '자본주의'는 고생하고 온 자들에게 집에 쌓인 어질러진 물건과 같다. 자꾸 발에 차여서 힘 빠지고 짜증 나게 하는 물건들이다. 많이 쌓이게 되면 집은 온전히 쉴 틈도 없게 된다. 아무리 일해도 올라가는 임대료, 이자가 침대 곳곳에 날카로운 모서리를 세우고 어질러져 있다. 나는 하루 14시간, 혹은 꼬박 밤을 새 가며 막노동을 하는 한 50대 여인을 본 적이 있다. 그녀의 침대에도 집세와 이자,  그리고 심장병에 걸린 남편이 있었다. 제대로 쉬지 못한 인간은 인생을 포기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나도 아직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녀를 위해 집세를 보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연결해 주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도 아직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그녀를 위해, 그녀와 같은 수많은 그를 위해, 또 그와 그녀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수많은 존재들을 위해 청소를 해야 한다. 이승만 정부가 농지개혁을 했듯이, 개혁을 통해 집 안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치워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물건을 꺼내면 꺼낸 사람이 바로바로 제자리에 물건을 돌려놓도록 약속하자. 그러면 집은 항상 깔끔하게 유지될 것이고 성실한 자가 활력을 잃어버리는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자살은 줄어들고 생산은 항상 부유하게 유지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는 어지럽히고 누구는 치우는 세상을 과거에 남기고 서로가 공평히 쉴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개인이 책임을 지고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정한 자유시장으로 말이다. 그런 세상에서 청소는 어쩔 수 없이 쌓인 먼지를 가끔 돌아가면서 하는 가벼운 행위로만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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