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 04
꼭 함께 사진을 찍자
Cizur Menor → Puente la Reina
줄어든 배낭의 무게 덕에 조금은 수월해진 것 같으면서도, 고단함을 이기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 어깨의 무게는 다소 괜찮아졌지만, 문제는 발이다. 물집이 잡힌 쪽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지면과 닿는 면이라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각 숙소마다 족욕기 임대 프랜차이즈를 하면 상당한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도 있을 듯하다. 이런 순례길에서 저런 속물적인 생각이 그리 옳아 보이지는 않다만. 어제 저녁에는 꽤 괜찮은 식사를, 더 없이 훌륭한 가격에 즐겼다. 순례자 메뉴라고 하여, 순례길 위 식당들에서는 순례객들을 위한 저렴한 메뉴들을 제공하곤 한다. 디저트와 음료가 포함된 3코스 식단이었는데,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저 훌륭했다. 옆의 핀란드 사람과 함께 와인 한 병을 같이 나누어 마셨다. 90알애 가까웠던 지난 여행으로 나는 스스로를 여행 좀 했다, 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더 대단한 외국인들이 세상에는 참 많다. 어제의 그 핀란드 사람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오토바이 일주를 한 경험도 있었다. 세상에나. 경이로운 감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순례길에는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모인다.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각 국가마다 몇 명은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인 걸까. 그들과 함께 하루의 고단함을, 또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시간이 꽤 즐겁다. 더 적확하게는, 이 시간만 즐겁다.
눈을 뜨고, 마침내 그 날의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즐겁지 않은 시간의 향연들이 펼쳐진다. 오늘 아침에는, 이층 침대에서 내려오며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발도 아프고, 다리 근육도 도무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알베르게의 주인장은, 나는 젊은 사람이니 2층에서 자도 상관 없을 거라고 하며 2층 침대를 배정해주었다. 내 신체 나이는 액면가보다 훨씬 높다. 몇 번이나 아, 아, 아를 연발하며 마침내 침대에서 내려왔다.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배낭을 들었다. 배낭이 하나라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2리터짜리 물 두 통은 손에 들고, 침낭을 가방처럼 걸쳤다. 저렇게나 많은 물을 들고가도, 목적지에 거의 다 와서는 상당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 걸으며 내내 물을 마심에도, 땀으로의 수분 배출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배뇨 욕구는 여태껏 길 위에서는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조금 피곤했던 관계로, 자리에서 계속 밍기적거렸고, 그러다 보니 가장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역시 언제나처럼 고통스러운 한 걸음 씩을 내딛었다. 신발이나 양말의 쿠션감만 고려했었는데, 정작 중요한 건 지면과의 마찰이었다. 물집은 주로 이 때문에 만들어졌다. 오늘의 코스 중에는 꽤나 가파른 경사를 올라야 하는 일정이 있었다. 어제 히치하이킹을 해서라도 배낭 하나를 보내기를 정말 잘했다고 자평했다. 뭐, 정말 짧은 거리만 자동차의 도움을 빌린 거니. 괜히 고집스레 순수성을 온전히 지켜내려고 했다가는 오늘은 처음부터 버스를 탔거나 아예 때려 치웠을 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성장이라는 건, 굉장히 대단하게 느껴졌던 가치나 당위가 그 무게를 잃어가는 과정과 궤를 같이하는 듯하다, 라고 걸으며 혼자 잘난 척을 해 보았다.
날씨는 며칠째 계속 안 좋았다. 우기인가. 비가 오면 어쩔 수 없이 우비를 입어야 하는데, 이게 상당히 불편하다. 덥기도 하고. 계속 걸으면 어쩔 수 없이 땀이 나는데, 이게 전혀 방출이 안 되니 우비 안에는 사우나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산티아고로 출발하기 전, 꽤 긴 시간 여행을 하며, 비에 대한 역치의 기준을 나름대로 정립할 수 있었던 게 경험이 준 선물들 중 하나다. 어떤 수준까지는 그냥 맞아도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조금은 체득하게 되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리 쏟아 부어대는 비는 없었다. 오늘은 비가 내리기에는 너무 맑은 하늘이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가랑비가 조금씩, 하지만 계속 내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무지개도 보였다. 큰 감흥은 없었다. 갈 길이 너무 멀었다. 그런데 무지개라는 것이, 성경에 따르자면 비가 다 그친 후에 어떤 선물의 의미로써 보여지는 것 아닌가. 비가 계속 오는데 무지개라니. 조금은 괴랄한 조합이었다. 굳이 저런 무지개 같은 건 안 봐도 되니 이 비나 좀 그치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아주 천천히 한 걸음 씩 내딛었다. 아직은 나의 속도를 찾아가는 중이다. 이 때 음악이 상당한 도움을 준다. 어떤 음악이든 나름의 리듬감이 있기에, 무의식적으로라도 페이스 조절이 되기 때문이다. 내 걸음의 메트로늄 같은 느낌이랄까. 이런 걸 보면 내가 힙합을 별로 안 좋아해서 참 다행이다. 비트감이 엄청난 그 장르의 노래들이 연달아 나왔다면 상당히 곤란했을 듯하다.
조금 걷다 보니, 어제 식사를 함께했던 친구들이 보였다. 그들은 어떤 카페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길래, 나는 더 반갑게 양 손을 흔들었다. 내 체력으로는 상당한 무리였기도 했다. 손만 흔들었는데 지치고 말았다. 얘네들은 두 명의 미국인, 그리고 한 명의 북아일랜드인이었다. 북아일랜드도 영국의 일부인데, 그녀는 꼭 자신이 '북아일랜드' 출신이라고 밝혔다. 존중해줘야지, 아무렴. 이 전에 더블린의 호스텔에서 만났던 스페인령 카나리 제도 출신의 한 사람도, 절대 자신을 스페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국가 정체성은 참 복잡하고도 민감한 영역이긴 하나, 길 위에서 그런 것까지 고민할 겨를은 없었다. 이 힘든 길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또 사색에 잠긴다는 건지. 어쨌든 비슷한 또래의 우리 넷은 남은 일정을 함께 걷기로 했다. 이 소속감이 나쁘지 않았다. 이들은 좋은 페이스메이커들이었다. 걸음이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고, 중간중간 잘 쉬기도 했으며, 또 즐길 타이밍에서는 확실히 즐겼다. 가파른 언덕도 함께 올랐는데, 덜 힘들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꽤 짧은 시간 안에 주파할 수 있었다. 되도 않은 농담을 서로 주고 받기도 했다. 물론 나는, 그들이 되도 않은 농담을 주고 받는 걸 주로 관찰하는 편이었다.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 상황에서, 원어민들의 영어 대화를 해석할 여유란 없었다. 그래도 가끔씩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귀에 들릴 땐, 나름대로의, 하지만 온갖 최선을 다한 '영어 유우머'를 내뱉기도 했다. 그 중 대략 80%는 내가 얼마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길을 무모히도 걷고 있는 지에 대한 자기성찰적인 이야기였다. 미국인들 중 한명이, 내게 '재밌다(Fun)'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살면서 들어본 칭찬들 중 가장 뿌듯한 축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하니 확실히 재밌기는 재밌었다. 아이처럼 안고 다녀야 했던 배낭도 사라지니, 그래도 이전보다는 한결 여유가 생겼기도 했다. 그래서였는지, 순례길 위에서의 내 사진을 오늘에서야 처음 찍었다. 마침 또 우리 그룹이 네 명이었던 관계로, 언덕 위에서는 비틀즈의 애비로드 표지를 따라한 포즈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그 때도 같이 사진을 찍기로 약속했다. 그럴 수 있겠지. 아 참, 나는 폴 맥카트니였다. 리버풀에서 비틀즈와 관련된 이런저런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위대한 뮤지션'이라는 틀에 박힌, 혹은 어쩌면 상투적인 표현 안에서만 상상할 수 있던 비틀즈를, 한 도시에서의 개인적인 추억과 연결하여 떠올려볼 수 있다는 게 여행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이다. 아마, 먼 나중에는, 이 산티아고 순례길도 생생히 떠오르겠지. 길이 나빠서, 길이 더러워서, 길이 엉망이라서, 모든 길이 겁나게 힘들었다고. 발이 위험 신호를 보낼 때 즈음에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인 'Puente la Reina'에 도착했다. 저 세 명은 조금 더 걸어갈 것이라고 했다. 미친 사람들. 그렇게 제 정신이 아닌 이들과, 시내의 한 식당에서 이별의 식사를 했다. 샌드위치에 가까운 햄버거를 먹었는데, 맛은 있었다. 가격도 저렴했고. 함께 맥주를 마시며 훗날을 기약했다. 분명 같이 사진을 찍을 수는 있겠지. 연락처는 서로 교환했으니, 설사 산티아고에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안부는 가끔 물어볼 수 있는 사이는 될 수도 있겠고.
길 위에서는 참 많은 인연들을 만나고 있다. 누구라도 힘들고,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 곳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은 오히려 상당히 친절하고도 상냥하며, 또 붙임성도 좋아, 그러지 못 한 나를 종종 부끄럽게 한다. 함께여서 즐거웠던, 은 아니고, 덜 힘들었던 것도 아니지만, 모든 순간이 오직 즐겁지 않거나 힘들게만 느껴질 뻔 했던 날이 이들 덕분에 그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다시 생각해보면 꽤 감동적이다. 물론 이런 감상에 빠지기에는, 남은 날들이 너무 많은 게 함정이지만.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정진운의 '준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