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맥주를 아시나요

산티아고 순례길, Day 06

by Nell Kid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아서
Estella → Los Arcos

이 길을 걸으며 힘들지 않는 날이 어디있겠냐만은, 오늘은 유독 고된 하루였다. 그 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통증이 내 발에 찾아왔다. 발 전체를 아우르는 통증에 종종걸음을 걸어야 했다. 그냥 걷기만 해도 상당한 피로감을 느낄 게 분명한 이 길을, 육중한 배낭을 등에 업고 걸으니 발에 가해지는 압박과 압력이 훨씬 더 커졌다. 물집의 통증이 '따가움'에 가까웠다면, 오늘의 고통은 묵직한 아픔 그 자체였다. 이걸 이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참 멋있을 텐데. 어쨌든 20km 이상의 길을 어기적거리며 걸어왔다. 패잔병이 따로 없었다. 그 와중에 산 하나까지 오르내려야 했다. 아직은 산을 넘어야 한다는 게 그리 익숙한 경험은 아니다. 그저 좌절스러울 뿐이다. 온갖 불평과 투덜거림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등산을 이어갔다. 이쯤되면 순례길이 아니라 순례 산맥이다. 내가 무슨 빨치산도 아니고. 아마 빨치산들도 이런 배낭을 등에 업고 지리산을 오르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힘들어야, 내가 무엇하러 이 짓을 여기까지 와서 하고 앉아있나, 싶은 회의감이라도 들 텐데, 생각이고 뭐고 내 마음 속에는 빨리 이 길이 끝났으면 하는 희망 뿐이었다. 가끔씩 자전거를 타고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으나, 페달을 계속 밟아야 하는 그들의 허벅지 상태도 썩 멀쩡하지는 못 할 듯 했다. 나도 제 정신이 아닌 건 맞지만, 나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정말 많다. <라라랜드>의 대사처럼, 이 '미침'들이 세상을 조금씩 풍요롭게 하겠지. 왜 나의 미침이 제물이 되어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발의 통증을 겨우 참으며 산을 내려오니, 오늘의 목적지까지 10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푸우우욱, 꺼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걷고도 10km라니. 한 시간에 많아봤자 3km를 걸을 수 있으니, 세 시간 이상이 족히 소요되는 거리였다. 오, 맙소사. 거기에, 걸으면 걸을 수록 통증은 더 심해지고 속도는 더 느려지니, 그저 암담할 수밖에 없는 남은 거리였다. 하아, 방법이 있나, 그저 걸어야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어기적 어기적, 다시 걸음을 시작했다. 바람이 많이 불긴 했으나, 비 오는 날에 비하면 몇 배는 더 괜찮은 날씨였다. 역시, 사람은 징징거려야 한다. 뭐 이리 날씨가 개판이냐고 한 며칠 징징거렸더니 드디어 해결됐지 않은가. 원래 이런 걸 관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사안일주의와 보신주의를 최선의 가치로 긍정하며 사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니, 이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민원을 넣어야 한다. 긍정적인 마음이나 아량, 이해심 같은 건 필요없다. 투덜거려야 내 고충을 알릴 수 있다. 한낱 공무원도 그런데, 날씨를 관장하는 신은 얼마나 공사가 다망하겠는가. 그에게 나의 목소리를 전하는 건 온건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자기 목소리를 내라고, 인간에게는 저항권이라는 게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 저항권이 이럴 때 막 갖다 붙이라고 있는 말은 아니겠지만. 산길을 오를 땐 다소 쌀쌀한 고랭지 기후를 흠뻑 느낄 수 있었다. 날씨까지 모든 게 완벽했던 슬로베니아의 피란이 자꾸만 생각났다. 그냥 거기서 한 달을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는지.

20170405_084839.jpg 와인 분수가 근처에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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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5_090257.jpg 망할 표지판들.

산티아고 순례길을 처음 들었던 건,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 였다. 읽고 싶어서 읽은 책은 아니었고 필독서였던 것 같은데, 이래서 각 학교들은 필독서 선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어쨌든. 당연히 칠레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 길이 실은 스페인에 있다는 걸 알고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정도 놀람에서 그쳤어야 됐는데, 나의 호기심은 실제로 이 길을 걷고 싶다는 욕구로까지 이어졌다. 이게 다 잘못 골라진 필독서 때문이다. 책 내용도 내게는 그저 그랬고, 거기에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어줍잖은 단어까지 알게 되었으니, 뭐 하등 인생에 도움이 된 게 없는 책이다. 그 이후로도 종종 순례길에 대한 정보들을 블로그 등에 검색해보았는데, 어쩐지 젊음과 청춘의 본질은 저 길 위에 있는 듯했다. 미디어라는 게 이렇게나 무섭다. 무겁고 거대한 배낭을 등에 멘 채, 묵묵히 길을 걸어가는 여행자의 비장함과 숭고함이란. 그게 그렇게도 낭만적으로 보였던 게, 내가 무척이나 어렸다는 증거일 지도 모르겠다. 낭만은 무슨. 오직 통증과 고통만이 존재할 뿐이다. 길을 걷다 보면 중간중간에 말 등의 가축들을 마주하게 된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 중 한 마리를 빌려, 광야에서 백마타고 폭주하는 초인이 되고픈 마음이다. 어쩐지 그게 더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마치 간달프처럼.

20170405_094949.jpg 안 예뻐. 안 예쁘다고.
20170405_103721.jpg 중간의 마을. 길에는 끝이 없다.
20170405_104020(0).jpg 네가 부러워.

목적지를 대략 6km 정도 남겨 둔 곳에서는, 푸드 트럭 한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곳에서 오렌지주스를 한 잔 마시며 다리의 피로를 풀었다.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에는 와인 분수대를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숙소를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무척이나 피곤할 때였고, 출발부터 아팠던 발 때문에 기분도 그렇게 좋지 않다보니, 별로 술을 마시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 술이 안 끌릴 때가 나도 있긴 하다. 그래도 호기심은 있어서 한 번 수도꼭지를 돌려나 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한국 분이 '와인 한 잔 하고 가세요'라고 내게 말하는 바람에 그냥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 내 갈 길을 갔다. 누구하고도 얘기를 섞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는데, 괜히 와인 분수대로 갔다가는 원치 않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예민할 수 밖에 없는 이 길 위에서, 동행을 구하여 함께 순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는 느낌 뿐이다. 나와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다. 먼저 한국분이세요, 라고 물어보고,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주려고도 하고. 사실 비단 한국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 길에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 착하고 친절하기는 하다. 내가 휘청거리기라도 하면 먼저 다가와 도와줄까, 이렇게 물어보기도 하고. 그런 친절을 베풀 여유가 도저히 없는 내 입장에서는 그들이 무척 신기하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어쩌면 그들 역시도 없는 여유 속에서 작은 친절을 베푸기 위해 애쓰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괜히 겸연쩍기도 하다.

20170405_121606.jpg 푸드트럭 비슷했던 곳과
20170405_115800.jpg 여기서 마신 생명수, 아니, 오렌지 주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고, 숙소에 들어가기 전 근처의 카페에 들러 레몬향 맥주를 한 잔 마셨다. 어제 처음으로 맛 본 맥주인데, 레몬 특유의 상큼함이 생맥주와 무척 잘 어우러져 꽤 괜찮은 기분을 선물해준다. 어떤 생물학적 매커니즘인지는 모르겠는데, 오래 걷다 보면 다소 신 맛이 당긴다. 어쩐지 예전에 삼국지를 읽다가, 조조인가 누가 조금만 더 가면 매실이 있다고 선동아닌 선동을 하여, 병사들이 그 신 맛을 떠올리느라 침 분비가 활발해져서 갈등을 완화시켰다는 이야기를 본 것 같기도 하고. 80일 넘게 여행을 하며 단 한 번도 찾아본 적 없는 레몬에이드를, 순례길에서는 매일같이 그리워하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이 레몬향 산미구엘의 풍미가 유독 좋다. 지옥 같은 걸음을 마치고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라서, 와인이나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여독을 푸는 시간이 이 순례길에서의 가장 훌륭한 순간이다. 어쩌면 이 맛을 위해서 그렇게 걸었구나 싶기도 하고.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느껴야 될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왜 세상 모든 행복은 거저 얻을 수 없는 걸까. 왜 꼭 어떤 것을 지불해야 되는 걸까. 부조리한 세상이다. 부조리한 세상을, 나는 걸음으로써 저항한다, 는 무슨. 맥주나 한 잔 더 마셔야지.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플라이투더스카이의 '그대는 모르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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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5_140746.jpg 나의 구원자, 나의 레몬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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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5_181105 (1).jpg 생장에서 나눠 준 일정표. 대략 이렇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