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이 최선일까

산티아고 순례길, Day 08

by Nell Kid
끊임없는 회의감에 대항하여
Logroño → Navarrete

다음 날 일정을 어제 미리 반이나 더 걸었으니, 더 부지런하게 다녀 속도를 내어보겠다, 라는 결심은 역시 헛된 허세에 가까웠다. 알베르게들의 체크아웃 시간이 이른 데에는 참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다. 순례객들이 게을러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도와주려는 듯했다. 터덜터덜, 숙소를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 하나가 보였고, 거기서 타파스 한 접시와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오늘은 유독 이 길을 걷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컸다. 언제는 작았던 것도 아니니, 오늘은 거대했다고 말하는 게 적확할 것이다. 내가 도대체 왜 이 길을 걷고 앉아 있는거지,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불과 얼마전까지 있었던 슬로베니아 피란에서의 행복한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카페에 앉아, 피란으로 가는 길과 그 곳의 숙소를 검색해보기도 했다. 아예 한 달 가량을 거기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행복은 둘 째 치고, 지금 이 길에서는 행복 비슷한 걸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접할 수 있는 행복은 레드벨벳의 데뷔곡 '행복'을 듣는 것 뿐이다. 슬로베니아 피란으로의 도피고, 포기면 또 어떠랴. 내 기분이 좋은 게 먼저지. 하지만 슬로베니아는 생각보다 멀었다. 별 수 없네. 3년 전에 마드리드가 참 좋았는데, 이 참에 마드리드에서 오래 머물러 볼까. 모르겠다. 그냥 걷기가 무척 싫었다.

20170407_145043 (1).jpg 나는요 걷는 게 싫은 걸~ 어떡해~

싫어도 걷는 수 밖에. 뭐 도리가 있나. 어제 많이 걸었던 여유 덕분에, 다행히 오늘은 오래 걷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럼에도 귀찮고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출발할 때 즈음 마신 맥주 덕분에 기분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막상 걸으면 또 걷게 된다. 그렇게 '막상'이라는 궤도까지 진입하는 데 다소 힘이 부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막상의 또 다른 이름은 '관성' 혹은 '중력'인 듯 하다. 나는 가지에 달려있는 사과 열매고. 거기서 떨어지기만 하면 내려오는 건 금방인데,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첫 발걸음이다. 생장에서 접수를 할 때 나눠 준 일정표가 있는데, 요즘은 딱 거기에 맞춰서 이동하는 중이다. 물론 어제처럼 조금 무리해서 한 두 마을 정도를 더 가는 경우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표준안대로 걸어가고 있다. 그렇게 해야 계산된 날에 이 순례를 마칠 수 있다. 산티아고에서 조금 더 걷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내 순례는 딱 산티아고에서 멈추려고 한다. 우선은 힘들다. 거기에,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그 만큼을 더 걷는다고 무언가 중요한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얼마 전 한 친구와 통화를 하며, 순례길에서 유일하게 얻고 있는 건, 여기서 얻을 만한 게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인 것 같다고 이야기 한 적 있었다. 봄 날의 유럽은 참 좋다. 햇살도 무척이나 화창하고. 이 좋은 날에 굳이 걸었던 이 순례길이, 훗날 내 삶에 어떤 의미로 남게 될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독한 회의를 어느정도 이겨내고 나니, 이제 이틀만 더 걸으면 열흘이라는 게 실감났다. 열흘이면, 이 순례길의 3분의 1에 가까운 지점이다. 열흘을 그렇게 걷고, 다시 닷새에서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어느새 절반이 된다. 당연한 소리인데, 이 당연함에 기대지 않으면 조금은 견뎌내기 힘들다. 열흘만 버티자고 처음부터 다짐했던 건, 반환점까지만 우선 버티자, 와 같은 의미였다. 절반이 넘어가면, 이 길을 포기할 수는 없게 된다. 지나온 걸음들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나는 경제학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먼 사람이다. 매몰 비용을 자꾸만 생각하게 되니. 이런 내가 경영학을 선택했으니, 어후. 모르긴 몰라도 뭘 경영하는 사람은 못 될 게 뻔하다. 어쨌든. 열흘을 견뎠으니, 그래도 앞으로의 닷새나 일주일은 비교적 그 보다는 덜 힘들게 다가오지는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감이 있다. 우선 닷새라는 기간 자체가 열흘보다는 짧기도 하고. 앞으로의 일주일에는 그래도 초반만큼의 정신 나간 오르막길이 보이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는 발의 상태가 조금 걱정이기는 하다. 단순한 통증이면 괜찮을 텐데, 혹시라도 염증이라면, 흐음, 무척이나 막막하다. 심해지면 봉와직염이라던데, 부디 멀쩡하기를. 출국하기 전에 파상풍 주사를 맞았었던가. 장티푸스는 기억이 나는데. 괜히 좀 찜찜한 게 사실이다.

20170407_145631.jpg 저 멀리 보이는 게 오늘 도착했던 마을.

목적지 근방에 들러, 우선 맥주를 한 잔 마셨다. 캬. 옛날 우리 조상들도, 새참과 함께 막걸리를 즐겼다고 한다. 약간의 알코올이, 의외로 큰 힘을 준다. 맥주의 청량감이 유독 더 맛있게 느껴지기도 하고. 간만에 전용 욕실이 달린 호텔로 들어왔다. 따뜻한 물을 잔뜩 틀어놓고 뜨겁게 샤워를 했다. 푸욱, 꺼지는 느낌이 좋았다. 무척이나 나른하기도 했다. 오전에 가득했던 회의감도 조금은 같이 씻겨나갔다. 순례길의 하루에서 가장 힘들 땐, 기상 이 후의 한 시간이다. 그리 깊은 잠을 자지 못 한 상태에서, 모든 귀찮음을 이겨내고 걸어야 하니까. 나처럼 게으르면서 부지런하지도 못 한 사람에게는 참 적합하지 않은 여행이 또 이 순례길이다. 학교에 다닐 때, 1교시 수업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듣겠다 했던 사람이 있다면, 굳이 추천하고 싶지 않은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순례길의 일과들 중에서도 제일 귀찮은 건, 이렇게 매일마다 남기는 글이다. 그냥 걷고 걷고 또 걸었다는 게 전부인데 뭘 계속 써야 하는지. 어쩐지 아직까지는 아침의 회의감이 조금 남아있는 느낌이다. 맥주나 한 잔 더 마시러 가야지.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바닐라유니티의 'Sorry'다. 이렇게 적은 것들이, 헛되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