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걷고, 아주 더 힘들고

산티아고 순례길, Day 10

by Nell Kid
고민의 순간
Nájera → Grañón

생일인 어제도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생일 다음 날인 오늘이라고 뭐 별 다를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랬었다. 욕심을 내어, 7km 정도를 더 걷기 전까지는. 도합 28에서 29km를 걸었고, 걷고 걷고 또 걷는 이 순례길에서도 상당한 거리였던 오늘이, 어쩌다 보니 꽤나 특별히 고생스러운 하루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특별함을 생산해내고 싶지는 않았었는데. 어쨌든 이렇게, 열흘이 지났다. 표를 보니, 내일은 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고, 그래서 차라리 오늘 조금 더 걷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순례길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과 타협의 길이기도 하다. 더 걷기 싫으니, 자꾸 서로가 서로에게 미루게 된다. 이미 지친 오늘의 나는 나머지는 내일 걷고 싶다고 계속 외쳐대고, 반대로 내일의 나는 네가 오늘 열심히 걸어야 자기가 조금 더 편하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두 자아의 다툼 속에서, 짜증스럽고 괴로운 건 오로지 '순간의 나'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그러니 이 자식들아, 몸까지 힘든데 머리까지 굴리게 하지 말고 미리미리 의견 타협을 좀 해 놓으면 안 되겠니.

20170409_083150(0) (1).jpg 어느덧 앞자리가 '5'로 바뀌었다.
20170409_091840.jpg 이 마을을 지나서.

열흘을 견뎠다는 게 우선은 조금 대견하다. 1차 목표는 달성했다. 자, 그럼 이제 하산, 이면 참 좋겠는데, 아직 3분의 2 정도의 거리가 더 남아있다. 군대에서와 비슷한 느낌이다. 군생활이 1년이 넘어가며, 내가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은 이 정도면 나라를 충분히 많이 지켜준 것 같은데 아직 더 지켜야 하나, 싶은 의문이었다. 마찬가지다. 이 정도면 꽤나 걸었는데, 아주 많이 더 걸어야 한다. 그래도 이 열흘을 두 번 정도 더 반복하면 산티아고 부근에 다다른다. 뭐, 말이 쉽지. 이걸 두 번 더 하라니. 할렐루야. 나는, 정말 내가 나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천국은 몰라도 지옥에 갈 일은 없을 듯하다. 기특하지 않은가. 이 길을 이렇게나 열심히 걷는다니. 더딘 걸음이지만, 그러면서도 그렇게 열흘이 흐르니, 조금씩은 순례길의 일상과 루틴에 적응되는 느낌도 든다. 내 걸음의 속도를 인지하게 된 게 가장 큰 수확이다. 남은 거리들을 보며, 대략적인 계산을 세우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그 계산의 산출값이 항상 옳은 건 아니다. 희망 회로가 붕괴될 때의 당혹감과 고단함은 차라리 참담함에 가깝다. 그래도 어찌어찌, 비슷하게라도 견적을 내어볼 수 있다는 건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그런다고 덜 힘든 건 아니나, 마음의 준비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첫 날 론씨발, 아니 론세발레스로 갈 땐, 마음의 준비조차 안 되어 있어서 더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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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_145544.jpg 이제 560km 대다.

열흘을 기념하는 점심으로는 햄버거를 먹었다. 여행 중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이 바로 햄버거인데,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아마 햄버거가 완전 식품이라서 그런 듯하다. 스페인의 햄버거는 일반적인 햄버거와는 조금 다르다. 우선 대부분의 빵이 호밀빵이다. 샌드위치에 가까운데, 호밀빵 특유의 바삭함이 은근히 괜찮다. 고소하기도 하고. 또 각 레스토랑에서 패티를 직접 만드는, 일종의 수제버거에 가까운 형태로 제작되며, 고기 맛도 상당히 맛있다. 무엇보다, 싸다. 완전 식품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소다. 어지간한 고급 식당의 메뉴에도 햄버거는 존재하며, 햄버거의 가격은 대체적으로 어디든 저렴한 편이다. 그 가격 안에, 단백질, 탄수화물, 섬유질 등등의 영양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영국에서의 Five Guys부터 시작하여, 이번 여행에서는 유난히 지칠 때마다 햄버거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 거기에 맥주나 콜라의 조합은, 하나의 작품 같은 기가 막힌 콜라보레이션이다. 오늘도, 사랑스러운 햄버거를 뚝딱 해치웠다. 열흘째의 식사로는 더할 나위 없는 메뉴였다. 이 사랑스러운 메뉴. 우린 정말 햄버거를 발명한 사람을 기릴 필요가 있다. 이 순례길이 그를 위한 길이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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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_105104(0) (1).jpg 끝 없는 길

숙소에 와서는, 지난 3일 차에 함께 애비로드 포즈를 따라잡고는 했던 외국인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많은 인연들이 이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갔지만, 이들만한 사람들이 또 없었다. 계속하여 나의 위치와 안부를 물어준다. 이들이 보고싶다. 하지만 그들과 나의 거리가 꽤 벌어졌고, 따라 잡기 위해서는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많은 고민을 했다. 열흘 동안 단 한 번의, 그것도 아주 짧았던 히치하이킹을 차치하면 온전히 내 두 발로만 이 길을 걸어왔다. 선택을 해야 하는데, 어느 쪽의 결정도 쉽지 않다. 버스를 50에서 70 킬로미터 정도를 타게 되어도, 내가 이 길의 대부분을 걸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90일 이상을 혼자서만 여행했고, 그렇게 혼자인 것이 전혀 외롭지 않았는데, 막상 얘네들과 이런저런 시덥잖은 장난들을 치며 걷는 시간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큰 도시까지는 아직 며칠의 여유가 있으니, 차분히 생각해보아야겠다. 이 순례길의 방점이 과연 무엇인지. 굳이 내가 금욕과 고행까지 자청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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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_154844.jpg 오늘의 목적지

솔직히 말하여 현재까지의 생각은, 버스를 타서 이들을 만나는 쪽에 더 가깝다. 지금은 정말, 그냥 걷고 있다. 목적도, 의미도 없다. 아니, 목적은 있구나. 걸어내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 의식. 걷겠다고 결심했으니, 그래서 앞에 길이 있으니 걸을 뿐이다. 지겨움은 둘 째 치고, 우선 이 행위에서 별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못 하고 있다.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성직자도 아니고 독실한 신자도 아닌 내가, 단 조금의 흠결도 없이 이 길을 끝까지 걸어내야 할 이유도 또 없다. 실제로 이틀 전에는, 정말 하나도 즐겁지 않아서, 슬로베니아의 피란으로 가는 교통편을 검색해 보았을 정도였다. 음, 이렇게 적고 보니, 또 어느 정도 생각의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그들과 함께라면, 물론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남들과 동행한다는 게 썩 편하지만도 않겠지만, 그래도 삶에 새로운 자극을 줄 수 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일단 나는 누구와도 같이 여행해 본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 누군가와 동행한다는 사실에 지레 겁을 먹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삶에 새로운 스파크가 필요하기도 하다. 지난 80일과 같은 여행이라면, 바뀌는 도시마다 적응하느라 이런 것의 중요성은 작게 느껴질 텐데, 오직 걷는 것 뿐인 길 위에서는 자극에 대한 욕구가 크다. 어쩌면, 나와의 약속에, 또 결심에, 이를 악착같이 지켜내겠다는 마음에 모든 감정들이 매몰되어 있던 건 아니었을까. 어쨌든. 더 고민해봐야지.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Lesley Barber의 'Manchester By The Sea Chorale'이다. 고민할 때 들으면 참 좋은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