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 순간이 있다면

산티아고 순례길, Day 11

by Nell Kid
고민과 결정
Grañón → Belorado → Tardajos

결정을 내렸다. 버스를 탔다. 버스는 허무하리만큼이나 빨리 순례길을 가로질러 갔다. 도로 주변에는 순례객들이 열심히 걷는 중이었다. 죄를 짓는 느낌이라, 버스 안에서는 조금 마음이 불편했다. 자괴감도 들었다. 친구들과의 만남이, 또 그들과 함께 걸을 앞으로의 날들이 기대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의 산티아고'에 큰 흠집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틀을 걸어야 할 거리를, 버스는 채 한 시간도 안 되어 도착했다. 순례길 위에서의 걸음은, '장'하고도 '징'한 발걸음이다. 그렇게 애를 쓰며 걸어, 상당한 뿌듯함에 스스로가 감화되어 구글 지도에서 거리를 확인해 보면, 자동차로는 고작 30분 이내의 거리인 게 대부분이다. 그럴 때면 다소 맥이 풀리는 느낌을 받는다. 버스 안에서, 차라리 다음 일정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다거나, 아니면 정말로 너무 힘이 들어서 이 버스를 탔다면 어땠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어차피 타게 될 버스였다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고생스러웠던 초반에 한 번 이용을 해볼 걸, 싶기도 했다. 흰색 티에 지워질 수 없는 검은 먹물을 휘익, 칠해버린 느낌이었다. 버스를 탄 이유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라니. 진심이었지만, 어쩐지 궁색해보이는 핑계 같았다. 나는 참 모자란 사람이다. 이런 순간에도, 기어코 나의 선택을 어떻게 변명할 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니.

20170410_084435.jpg 우선은 이렇게 걷기 시작했다. 벨로라도까지는.

벨로라도에서 출발한 버스가 도착한 부르고스는 상당한 대도시였다. 거기서부터, 13km를 다시 걷기 시작하여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버스를 탑승했던 벨로라도까지 이미 10km 이상을 걸었던 지라, 발걸음이 쉽지 만은 않았다. 오후 두 시였기에, 햇빛이 상당히 강하기도 했고. 사실 발걸음을 가장 무겁게 했던 건 심리적인 요인이었다. 이미 버스를 탔다가 내렸음에도, 나는 이게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는 끊임없는 회의감을 마주해야 했다. 어차피 저질러 버린 일,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야 되었는데 그럴 위인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무척 복잡한 마음이었고, 걸어야 하는 길도 내 마음 만큼이나 복잡하게 느껴졌다. 무더위를 이겨내고, 마침내 친구들이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근처의 바에 들어가 그 곳의 와이파이를 이용하여 연락을 했고, 그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를 확인했다. 마시고 있던 콜라를 비우고, 이게 뭐라고, 다소 긴장되면서도 떨리는 마음으로 그 곳에 향했다.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친구들이 보였고, 그들도 나와 눈이 마주쳤다. 두 친구가 바로 일어나 나를 뜨겁게 포옹해주었다. 아, 잘 왔구나, 싶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결과론적으로는, 그게 오늘의 끝없는 음주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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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0_141741(0).jpg 대도시 부르고스의 위엄

그 동안의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늦었지만, 그들로부터 생일 축하도 들었다. 정을 붙인 친구들에게 들은 생일 축하는, 비록 그 유효기간은 조금 바랬어도 참 특별했다. 친구들의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지들이 재미있게 놀았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정말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수영도 하고, 피크닉도 하고. 할 것을 다 하면서도 이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이동하곤 했다. 이게 바로, 고등학교 시절 놀 것을 다 놀면서도 공부는 공부대로 잘했던, 그런 얄미운 애들의 전형이지 않을까. 오늘의 저녁 식사도 참 특별했다. 무려, 바베큐였다. 세상에나. 그것도 숯불. 숯 향이 가득 느껴지는 스테이크를 먹었다. 흐음, 이 맛에 순례길을 하는구만. 얘들은, 숙소에는 돈을 그리 아끼면서, 마시고 먹는 것들에 돈을 쓰는 데에는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덕분에, '꽁 술'도 꽤나 마시게 되었다. 이미 아까부터 꾸준히 리필되는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식사가 시작되니 와인까지 리필이 됐다. 아, 즐거운 사람들과 아주 즐겁게 취할 수 있는 밤은, 더 없이 훌륭했다. 버스를 타기 전, 버스를 타면서,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서까지 나를 괴롭혔던 고민과 자괴감은, 다행히 사라졌다. 이 즐거운 재회의 자리에,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자리할 겨를은 없었다. 즐거우니 됐다. 순례길도 여행이고, 여행의 매 순간이 즐거울 순 없겠으나 궁극의 목표는 결국 일상을 벗어나서 즐거워 보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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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0_210723.jpg 어떤 맥주가 맛있을까.

밥을 다 먹고도, 계속 술을 마셨다. 해가 늦게 지는 요즘이라, 저녁 식사를 이미 마쳤는 데도 이제 겨우 노을이 보일 정도였다. 그 노을을 바라보며, 또 같이 와인을 마셨는데, 어쩐지 말로는 표현 못 할 애틋함까지도 느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자유자재로 영어를 구사하여 이들과 먹먹함과 따뜻함을 주고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위에 적었듯, '표현 못 할'이다. 그게 너무 벅차서도 있지만, 태생적인 언어의 한계로 그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친구들과 몇 번이나,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워'라는 인삿말을 나눴다.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 유럽에서의 눈부신 나날들이 내 인생의 <화양연화>에 가까웠다면, 어쩌면 이 순례길은 <보이후드>가 될 수도 있겠다는 느낌도 들었다. 벌써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건가. 하도 술을 많이 마셔서, 기분이 동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 그럼 그런가 보지. 이게 지나친 감상일지라도, 굳이 애써가며 훼손하고 싶지는 않다. 가끔은 이성의 영역을 아예 꺼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들보다 오늘 조금 더 걸어야 했던 나는, 피곤한 나머지 먼저 방으로 올라왔다. 아직 이 친구들은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다. 그저, 좋다. 어느 한적한 스페인 마을에서, 이렇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라니. 좋다는 이야기 한 마디를 하려고, 참 주저리주저리 길게도 적었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god의 '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