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희망이

산티아고 순례길, Day 14 ~ 16

by Nell Kid
내일은 더 괜찮기를
Frómista

몹시 추웠던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적확히는, 수능날이었다. 수능날의 유일한 진실은, 수능 한파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몹시도 추운 하루였다. 그 추운 날에, 나는 당시 사귀던 애인과 헤어졌다. 더 엄밀히 이야기하면, 헤어지자는 통보를 들었다. 수능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겪어야 하는 잔인하고도 서글픈 통과의례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3학년 때 다녔던 언어 학원의 한 강사는,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야'라는 응원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날씨보다 더 차가웠던 이별의 인사는, 수능의 무게보다도 더 잔인하고도 서글프게 나를 찾아왔다. 이별을 통해 사람이 성장할 수는 있는 걸까. 이 이별을 통해 나는 조금 더 어른이 되는 걸까. 어른이 된들 그건 또 무슨 소용일까. 살아있었던, 살아있음이 좋았던, 그 날들이 이제 다 끝나 버렸는데, 어른이 된 이후의 삶에 미약한 의미라도 있긴 한 걸까.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마음이 앞섰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밖에 없었던 시기였다. 그 헤어짐은, 내게 있어서는 정신적인 수능에 가깝기도 했다. 어쨌든 뭘 배우긴 배웠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라는 서글픈 무력함이었다. 헤어짐을 고하던 그 사람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노력을 해도, 줄어드는 마음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고.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다는 말만을 유일한 복음서로 '모시고' 살았었다. 나의 동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전이라고 하여 특별히 긍정적이거나 희망에 가득찬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 후에 나는 훨씬 더 염세적이고도 회의적인 사람이 되었다. 믿지 않는 가치들이 늘어났고, 새로이 믿게 된 것들은 우울, 부정, 회의 등에 불과했다. 발에 염증 증세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 또 4, 5일은 걸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들었을 때, 나는 내 순례길은 여기서 끝났구나, 라는 슬픈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차도가 있다고 한들, 이 발을 가지고 남은 거리를 걷는다는 게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아 보였다. 비용은 조금 들었지만, 어쨌든 호텔방을 쓴 건 잘 한 선택이었다. 사실 먹는 것이든 자는 곳이든 다 비싼 게 최고다. '비쌈'에도 낭만은 충분히 있다. 배를 주려야 피어나는 게 낭만이 아니다. 훌륭한 식당에서의 아주 훌륭한 스테이크,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 선홍빛 육즙과 향긋한 와인까지. 하지만 매일같이 그런 호사스러움을 누릴 수는 없는 거고, 또 순례길의 특성상 이 길의 목적은 '관광'이 아닌 '걸어감'이기 때문에 숙소의 중요성이 그리 크지는 않다.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떠나야 하니, 비싼 곳에 머물러봤자 제대로 누리지도 못 한다. 요양을 핑계로, 한 2박 3일 정도를 프로미스타(Frómista)란 지역의 호텔방에서 룰루랄라 푹 쉬었고, 그러면서 항생제를 꾸준히 바르니 눈에 띠게 발이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다시 걸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순전히 자의적이지만 그런대로의 희망적인 판단이 들었다.

20170415_191149.jpg 마시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물론 여기서 어느 정도 일정이 지체됐기 때문에, 대중 교통의 도움을 조금 받긴 해야 한다. 아마 내일 레온(Leon)이라는 도시까지는 기차를 타야 될 것 같다. 이제는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데 아무런 거부감이나 죄책감이 없다. 어차피 걸음의 순수성은 무너진지 오래다. 레온까지 기차를 타도, 결과적으로는 600km 이상을 걷는 셈이 된다. 인생에 다신 없을 장거리 도보 여행이다. 정말로, '다신 없을'이라, 장담할 수 있다. 그 어떤 재래식 교통 수단들도, 걸음보다는 훨씬 낫다는 걸 매 걸음마다 깨닫는 중이다. 역시 나는, 남한테는 엄격하고 스스로에게는 참 관대한 사람이다. 이렇게나 열심히 '정신승리' 중이다. 이 길 위에서, 좋은 사람들도 만났고, 또 히치하이킹이라는 생전 처음 해보는 경험도 누려보면서, 참 다채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길을 오직 '걷기'만 하는 것보다 더 풍요로운 날들일 수도 있지 않겠냐고. 이러니 인간이 발전이 없는 것이다. 뭐 그럼 좀 어때. 나는 굳이 발전하고 싶지 않은 걸. 발전이니 성장이니, 여행까지 와서 그런 걸 찾아 헤매야 하는가. 그럴 거였으면 템플 스테이를 했지. 3일을 쉬었더니, 어쩐지 이제는 되게 잘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피어났다. 다시 걷기 시작하면, 아마 3일도 안 되어 이렇게 쉬고 있었던 날들을 그리워할 게 뻔하지만. 발전과 성장은 둘 째 치고, 이렇게 일관성까지 없으면 이건 좀 문제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욕조까지 달린 방이다 보니, 내가 내는 온탕비가 아니라고 펑펑 뜨거운 물을 틀고 목욕을 즐겼다. 호텔 주인도 아마 다음 달 고지서를 받으면 상당히 놀랄 것이다. 여름날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이 날씨에, 전혀 가당치도 않은 온탕비가 나올 테니. 아저씨, 걱정하지 말아요, 계량기가 고장난 게 아니라 그저 제가 물을 많이 쓴 겁니다. 약사의 충고처럼, 뜨거운 물에 발을 불려 상처를 조금씩 벗겨냈더니, 훨씬 더 발이 깨끗해 보인다. 그와 동시에, 이전에 내가 얼마나 무식하게 그 발로 순례길을 걸었는지, 그러니 왜 사람들이 내 발을 보면 당혹스러워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때는 정말로 답이 없는 걸음이었다. 이제라도 명확한 답이 생긴 건 아니지만, 어떻게 조심을 기울이고 해야하는 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이제라도 그렇게나마 알아야지, 그럼. 아주 미약한 성장이자 발전이기도 하다. 오늘보다 더 괜찮을 내일의 내 두 발을 소원해 본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이석훈의 '오늘은 어제보다 괜찮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