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해 먹어요

산티아고 순례길, Day 19

by Nell Kid
비록 나는 설거지만 할 수 있었지만
Villar de Mazarife → Astorga

어제는 일행 중 한 명의 생일이었다. 마침 알베르게에 조리 시설이 있었고, 같이 요리를 해서 와인과 곁들인 저녁을 먹었다. 거기서 나는 뭘 했냐면, 바게트를 잘랐다. 정말 최선을 다 하여 잘랐다. 내가 단순 노동을 하는 사이, 다른 두 친구는 각각 샐러드와 파스타를 만들었다. 둘 모두 훌륭했다. 특히 미국인 친구가 만든, '곽카몰리'라는 요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보카도, 양파, 마늘, 거기에 이런저런 것들을 더 섞은 음식인데, 그냥 먹어도 맛있고 바게트 빵 위에 올려 먹어도 훌륭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맛이었는데, 자꾸 중독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건강하기도 했고. 풍요로운 식사를 마치고는, 계속 와인을 마셨다. 나도 한 병을 사서 보태었다. 유럽 국가들의 와인이 무척 싼 편에 속하기는 하지만, 특히 스페인의 와인 가격은 더욱 저렴하다. 한 병이 5천원 정도의 가격도 채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에서 와인이 그렇게 비쌀 이유란 없는데. 주류를 제조하거나 유통하는 업체들을 전수조사하면, 모르긴 몰라도 그들이 상당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쉬이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즐거운 술자리는 12시 가까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 조금 취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당시에는 취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끝까지 즐겼다. 원래 취한 애들이 자꾸 안 취했다고 우기는 법이다.

20170417_172210.jpg 어제의 알베르게 있던 정겨운 모국어

아침의 속이 멀쩡치 않은 걸 보고, 어제 약간 과음을 했구나, 라고 느낄 수 있었다. 딱 한 시간만 더 자면 해결될 것 같았는데,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있으니 얄짤 없이 일어나야 했다. 잠도 덜 깨고, 거기에 약간의 숙취까지 느끼며 걷다 보니 조금은 벅찬 걸음이었다. 몸을 움직이다 보니, 술의 잔여물들이 조금씩 해장되기 시작했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속에 알싸한 무언가가 스르르 괴롭게 퍼지는 듯했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30km에 육박했다. 30km. 세상에. 하필 오늘 같은 날에, 이런 망할 숙취라니. 정말 아무것도 안 한 채 그저 푹 자고 싶었다. 다음 숙소까지 무려 30km나 남았다는 사실에 조금 좌절스럽기도 했다. 하필, 그 와중에, 발에 새로운 물집이 잡혔다. 참, 부지런도 해라. 겨우 다 나아가는 발을 다시 망치기 위해 이렇게 또 물집이 잡히다니.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알콜과 바늘, 그리고 실을 꺼내어 가벼운 처치를 했다. 순례길 초반에는, 이런 물집들을 그냥 우악스럽게 집어 뜯었다. 그 결과, 염증 직전의 단계까지 발의 상태가 악화됐고,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정신을 뒤늦게서야 차렸다. 따라서 제대로된 장비들을 갖추고, 스스로의 수술을 집도했다. 내가 언제 또 이렇게 오랜 걸음으로 인한 물집에 외과 수술 비슷한 걸 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살면서 이런 경험 같은 건 없어도 아무런 상관은 없을 듯했다.

20170418_071338.jpg 일출 즈음의 오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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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8_164559.jpg 끝이 없는 길과 끝이 없는 기찻길

휴식을 취하며, 늦은 아침을 먹었다. 오렌지 주스가 상당히 상쾌했고, 덕분에 숙취감이 조금은 사라졌다. 휴식을 취했던 바에는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올라(Hola)'를 외쳐대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조금은 짜증이 나고 불쾌한 상태였는데, 저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상당히 거슬릴 지경에 이르렀다. 목청도 참 좋은 놈이었다. 아침을 다 먹고,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다운로드 받은 라디오 팟캐스트를 들었다. 이동진 평론가가 푸른밤의 새 DJ로 발탁된 모양이었다. 초대 게스트 배우 천우희와의 인터뷰가 상당히 좋았다. 질문들이 우선 신선했다.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 인터뷰를 하니, 단순히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나 뻔한 문답만 오가지 않고, 확실히 깊이가 있었다. 거기에, 천우희 배우도 성실하면서도 알차게, 또 진솔하게 답변하여, 듣기에 재미가 있었다. 남은 순례길, 또 남은 여행 기간 동안에, 테이의 꿈꾸는 라디오 이외에도 찾아 들을 라디오가 하나 더 생겼다. 오직 걷기만 해야 하는 이 길 위에서는, 음악보다는 라디오나 팟캐스트가 훨씬 덜 지루하다. 내가 생산적이고도 건설적인 사람이었다면, 이 남아도는 시간 동안 어학용 청취 파일을 다운 받아 들었을 텐데, 그런 위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될 수 없는 모양이었다.

20170418_071345.jpg 어두움을 이겨내고 걷다가
20170418_090153.jpg 얘 땜에 잠이 달아나고
20170418_100213.jpg 기차를 꿈꿨다

대략 절반 이상을 걸었을 때, 한 번 더 긴 휴식을 취하였다. 이 친구들의 패턴이기도 하다. 걸을 때는 계속 걷고, 이 후의 휴식은 정말 충분하게 취하고. 정말 긴 시간 동안 푹 쉬는데, 체력을 비축하고 회복하는 데는 이게 더 효과적이라, 걸음의 막판이 되어도 쉽게 지치지 않는다. 진작 이런식으로 걸었다면, 초반 며칠도 덜 힘들었을 텐데. 살면서 다시는 이 순례길을 쳐다도 보지 않으리라 결심했었는데, 막상 조금씩 끝이 보이기 시작하니, 다음에 오면 조금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따위의 공포스러운 생각이 가끔씩 머릿속에 들기도 한다. 분명한 내 생각임에도, 정작 내가 소스라치게 놀랄 따름이다. 그냥 그 정도의 미련에서 남겨 두어야지. 만약에, 언젠가 이 곳을 다시 오게 된다면, 그건 무조건 타의에 의한 것일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언젠가 만약에 다시 순례길을 걷게 된다면, 그 때는 다른 루트를 고르고 싶다. 바닷가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북쪽길이라든지. 여긴 너무 산길이다. 옆에 꽃이 잔뜩 피어있으면 뭘 하나. 그 꽃님들을 위해 나는 빙 돌아가야 되는 걸. 이건 꽃길이 아니다. 꽃밭 옆의 흙길이지. 가끔은 그 모든 꽃들을 즈려밟고 지나가며 정말 문자 그대로의 '꽃 길'을 걷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도 있다. 다행히 잘 절제하는 중이다. 자연은 우리의 친구니까. 역시 언제나 그랬듯 혼자 중얼중얼 이런저런 불평과 투정을 토로하며 걸었고, 그러는 사이에 저 멀리서 오늘의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저 멀리서'다. 다 왔다, 고 생각했으나, 실은 아주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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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7_200535.jpg 어제의 아름다운 요리 사진
20170417_202934.jpg 그리고 언제나 즐거운 음주, 가무, 흡연

심지어 숙소까지 오는 길에는 꽤나 벅찬 오르막길도 존재했다. 그리고 마침내, 숙소의 문 앞에 섰다. 매일의 이 순간이 가장 좋다. 오늘의 할당량을 다 마쳤다는 기분 좋은 뿌듯함이 온 몸을 감싼다. 씻고, 상쾌함을 만끽했다. 결국 내일은 또 다시 먼 거리를 걸어야 하지만, 오늘의 뿌듯함은 그저 오늘의 뿌듯함 대로 느끼는 게 좋으니까. 들어보니 오늘도 요리를 해 먹는단다. 참 좋은 사람들. 도와줄 건 없나 물어봐야겠다. 바게트는 좀 잘 자르는데, 혹시 이런 단순 노동이 오늘도 필요는 한지. 이런 걸 보면, 잘 할 수 있는 요리 한 두 개가 있다면 참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멋지기도 하고. 뭐, 나는 그럴 능력이 지금은 안 되니, 묵묵히 설거지나 하지 뭐.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9와 숫자들의 '유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