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 20
찬란하게 빛나는 젊은 날
난 오직 내 앞의 길을 걸을 뿐이고
Astroga → Foncebadón
길은 끝이 없지만, 하루에는 시작과 끝이 존재하고, 하루의 끝이 있다는 사실은 상당한 위안이 된다.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가는 오늘 머물게 될 마을이 반드시 나오리라는 믿음 역시나 무척이나 든든하다. 순례길의 처음에서 가장 막막했던 건, 아무리 봐도 이 길이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압도감이었다. 다행히도, 그래도 며칠 걷긴 걸었다고, 조금씩 감이 생겼다. 그때는, 언제 어떻게 휴식을 취해야 하는지 조차 제대로 몰랐다. 걸어본 길이라고는 한강 근처의 아주 잘 가꿔진 산책로가 끝이었으니까. 그러다보니, 순례길의 초반에는 너무 힘들어 그냥 길에 주저 앉아 버린 적도 꽤 되었다. 지속적인 걸음을 위해서는, 충분하고도 제대로 된 휴식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걸 늦게서야 깨달았다. 오늘의 깨달음도 하나 있었는데, 무조건 아침을 먹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20일이 만에, 참 빨리도 깨달은 교훈이었다. 어이구 기특해라. 아침마다 다소간의 현기증까지 느끼곤 했는데, 그 동안은 충분치 않은 잠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실은 아침을 먹지 않아서였다. 따라서 오늘 도착한 숙소에서는 내일 아침 식사까지 함께 예약했다. 처음에는 이 길의 매 순간이 지나칠 정도로 힘들었고, 자연스레 그 힘듦의 종류와 기원을 분석할 여유 따위란 없었다. 이제야 조금 그 고됨을 분석해볼 수 있는 상황이 됐고, 아침 식사의 부재는 나의 육체를 꽤나 힘든 상황으로 이끈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도 나는 이렇게 하나씩 배우고 있다. 남들은 이미 예습까지 하고 오는 이 길을, 나는 걸어다니며 '체득'하는 중이다. 이건 낭만이 아니다. 미련함이고, 어리석음이다. 어지간한 순례객들의 배낭에는 가이드 북이 한 권 씩 있다. 준비 과정에서 혹시 내게 조금이라도 더 성의와 간절함이 있었다면, 초반에 그렇게 좌절하거나 힘들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이런 미련과 후회가, 어쩌면 다시 이 곳에 온다면, 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참 무서운 상상을 자꾸 하게끔 만들고 있다. 다시 오기는 무슨. 절대 안 올 거야. 앞으로는 버스 정류장 하나 정도의 거리도 걸어다닐 거다. 지금 심정으로는, 결혼식 날 신랑 입장 때도 킥보드를 타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부터 미리미리 이렇게 자기 세뇌를 철저히 해 놓아야, 혹시라도 나중에 이 길을 다시 오고 싶은 욕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다만, 바다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북쪽길이 조금 궁금하긴 하다. 만약에라도 나중에 스페인 여행을 다시 오게 된다면, 한 하루에서 이틀 정도만 걸어 봐야지. 그 정도면 충분하기도 하고. 딱 일주일 정도를 남겨두고 있으니, 또 괜히 감수성이 풍부해진다. 이 길이 끝난다는 건, 유럽에서의 날들이 끝난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고, 언제 또 유럽을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저 아득하다. 순례길이 끝난다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고, 또 때로는 조금 서글프기도 한 건,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젊은 날이 저물고 있다는 느낌에서다.
상당히도 가파른 언덕을 걸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꽤 이른 시각에 숙소에 도착했다. 오늘 유난히 부지런히, 또 바쁘게 걸었던 효과가 있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으니, 시원한 공기가 발을 감쌌다. 갑갑한 신발 안에 갇혀 있던 발에 마침내 다시 통풍이 되는 이 순간이 바로, 순례길에서의 참 소소하고도, 또 조금은 변태적인 즐거움이다. 생각해보면 이 길을 걷는 행위 자체가 꽤나 변태적이기는 하다. 성적 지향이나 성향을 조사해 보면, 어쩐지 마조히스트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을 듯하다. 나는 내가 S성향인 줄만 알았었는데. 여기서 자아를 마주하게 되다니. 뭐 그래도, 넬 노래의 가사처럼, '우린 달랐을 뿐 잘못되진 않았'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부분은 노래 <Dream catcher>의 정말로 멋진 구절이다. 다름과 틀림은 분명 '다른' 것이니까. 물론, 가끔씩은 나 조차도, 순례길을 걷는 행위가 '틀린'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불편하고, 힘들고, 짜증도 나고, 그러면서도 아직껏 의미의 꼬락서니조차 안 보이니까. 그래도 또 그런 감정으로 어찌어찌 다니다 보니,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나저나, 얼마 전 내한했던 콜드플레이가 넬의 'Grey Zone'을 추천했던데, 어쩐지 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던 듯 하여 기분이 좋았다. 이번 연말 넬의 크리스마스 콘서트 티켓을 구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울 듯하다. 스스로에게 주는 연말 선물로, 매 년 크리스마스 공연을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설마 그 큰 공연장에 내 자리 하나 없진 않겠지.
그런데, 지금, 음, 답이 없게 배가 고프다. 샌드위치 하나와 커피 한 잔만을 마셨더니, 견디기가 너무 힘든 지경이다. 저녁 식사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는데, 이 작은 마을에 뭐라도 있긴 하는지, 나가서 찾아 봐야겠다. 며칠 전부터 라면이 계속 끌린다. 어떤 종류의 라면이든 아주 맛있게 잘 먹을 수 있을 듯하다. 불닭볶음면이라도 있다면, 하아. 참 행복하고도 감사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길을 걷는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왜 라면을 파는 곳이 아직껏 없는지 모르겠다. 내가 못 찾은 건가. 양념 치킨을 먹고 싶다. 매운탕도 먹고 싶다. 모든 음식을, 그 어느 때나 주문할 수 있었던 고국의 편리함이 무척이나 그립다. 아, 꽃이 지고서야 봄인 줄 알았고, 해외에 나와서야 그 곳이 천국임을 깨달았습니다. 배달의 민족인데, 제가 민족성을 까먹고 지냈나 봅니다. 순례길 뿐만 아니라 여행 전체를 통틀어도 이 정도로 강한 식욕이 든 적이 없었는데, 지금 무지하게 배가 고프기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빨리 가서 뭐라도 사 먹어야지. 원래도 나의 모든 글들이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사소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이 길 위에서의 기행문은 정말 더욱 일기장에 가까운 듯하다. 그래도 이 길을 걸으며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는 게 어디야. 이건 좀 뿌듯한 사실이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이예준의 '넌 나의 20대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