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기적이 있긴 있네

산티아고 순례길, Day 22

by Nell Kid
최악의 하루가 될 뻔 했던
Ponferrada → Villafranca del Bierzo

순례길에서 뿐만이 아니라, 여행 전체를 통틀어 '최악의 하루'가 될 뻔했다. 오전에, 선글라스를 분실했'었'다. 8시에 길을 나섰고, 한 40분 쯤 걸었을 때, 내리쬐는 햇살이 너무 강하여 선글라스를 착용하려고 안경 케이스를 열었는데,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황량함만을 발견했다. 우선은, 끔찍히도 당황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주, 안일하게. 어제 머물렀던 알베르게에 당연히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50분 정도를 되돌아 알베르게로 향했다. 이ㅍ때는 그저, 나의 아둔함과 주의 깊지 않음을 탓하며, 50분의 거리를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만 짜증을 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도, 간달프로부터 부탁을 받았을 때 자신이 그렇게나 고된 여정을 이어가야 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여, 직원에게 내 선글라스가 여기 있는 것 같으니, 좀 찾아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아, 내가 무례하거나 버릇이 없어서 직원에게 무리한 요청을 했던 건 아니었다. 알베르게가 청소중이었고, 나의 신발은 더러운 상태였으니, 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그냥 여유있게, 알베르게의 와이파이를 즐기며, 그가 가져올 나의 선글라스를 기다렸다. 헌데, 그는 청천벽력같은 소식만을 하나 들고 왔다. 선글라스가, 없다는.


뭐? 나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은 똑같았다. 오전에 나의 방을 청소할 때도 없었고, 또 지금 찾아도 없다고. 아, 세상이 새하얘졌다. 어디 안 보이는 곳에 가서 펑펑 울고 싶었다. 자기 혐오가 극에 달했다. 이걸 어떻게 잃어버릴 수 있는지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되어, 한참을 나를 자책했다. 이성적인 해결책을 찾기에는 아직 제 정신이 아니었다. 우선 알베르게를 나와,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거기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며, 어떻게 이 '좆 된' 상황을 타개해야 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을 시작해도 별 도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걸 어디서 찾나, 싶은 막막함이 몰려왔다. 찾을 수라도 있다면 뭐든 하겠지만, 그럴 것 같지도 않았다. 성시경의 노래 '그 자리에 그 시간에'에는, '잃어버린 반지처럼 꼭 찾을 것 같아 한참을 헤매겠지만'이란 구절이 나온다. 그런 심정으로, 나의 짐을 하나하나 다 뒤졌다. 모든 옷들의 모든 주머니를 전수조사했다. 없었다. 배낭의 주머니들에도 없었다. 망했다, 싶었다. 선글라스야 하나 새로 사면 된다. 하지만, 비싸다. 그리고 쓸 데 없이 그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 여행을, 선글라스 없이 지속할 수는 없다. 우선 당장의 순례길 위에서도, 내리쬐는 햇살이 너무 강하다. 거기에, 만약 이 순례길을 마치고 곧장 귀국을 하는 일정이라면 일주일 정도를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겠지만, 나는 더 햇빛이 짱짱한 아프리카로 떠나야 한다. 온갖 욕이 다 튀어나왔다.

20170421_142925.jpg 드디어 앞 자리가 '2'다!

모든 짐을 다 뒤져도, 또 어제 방문했던 모든 장소들에서 내 선글라스를 찾아도, 나는 내 안경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안경 가게로 들어갔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이 기회에 확 세련되고 겁나 멋진 선글라스를 하나 새로 장만하는 거야. 가격은 죄다 10만원이 넘는 것들이었다. 오, 세상에. 그래도 뭐, 안경 가게 하나 없는 아주 작은 도시에서 잃어버린 것 보다는, 그래도 나름대로의 큰 도시에서 잃어버린 게 그나마 다행이지 않겠냐는 '정신승리'를 시도했다. 워낙에 빈약한 논리여서 나를 위로하기에는 불충분했다. 마음에 드는 안경테는 없었다. 잃어버린 선글라스가 너무 그리웠다. 차선을 골랐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 안경에 도수를 넣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틀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내 눈의 체질상, 나는 콘택트 렌즈를 착용할 수 없다. 그러니 오로지 안경에 도수를 입히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게 이틀이 걸린다니. 나는 당장 이동해야 되는데. 아, 답이 없었다. 답이 없다는 사실은,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앉아있냐라는 분노로까지 이어졌다. 요즘 들어 잠잠해졌던 순례길 전체에 대한 '회의감'과 '무력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냥 다 때려치고 마드리드로 간 뒤에, 거기서 며칠 머물면서 안경을 맞출까, 하는 고민까지도 했다. 산티아고까지, 이 정도 규모의 도시는 더 이상 없다. 여기서도 선글라스를 구할 수 없다면, 산티아고까지 가는 나머지 길 내내 나는 선글라스 없이 걸어야 한다.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20170421_195504.jpg 식사를 준비중인 모습들

정말 세상 모든 게 싫어졌다. 그런데 하필 또 오늘의 날씨가 무척이나 짱짱하여,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게 아니인가. 나만 빼고 다들 안녕한 것 같아, 강한 외로움과 소외감까지도 느꼈다. 터덜터덜, 그래 그냥 걸어야지, 하고 걸었다. 왜 오늘따라 햇빛은 또 이렇게 밝은 건지, 짜증이 뻗쳤다. 안 될 것을 알면서도, 한 번 더 알베르게로 향했다. 아까와는 다른 직원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정말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좀 찾아봐 줄 수 있겠냐고. 초조했다. 헤어짐을 고한 여자친구에게, 재고를 요청할 때도 이런 마음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5시간 같은 5분이 지났을 때, 직원이 나왔다. 한 손에, 나의 선글라스를 든 채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라시아스'와 '땡큐'를 번갈아가며 몇 번이나 거듭 감사를 표했다. 이 놈의 선글라스 때문에, 12시가 넘어서야 다음 목적지로 출발할 수 있었다. 가장 한낮의 더위를 겪어야 했지만, 아무렴 어때, 기분이 좋았다. 선글라스야, 난 절대 너를 홀대했거나 가볍게, 혹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여 너를 두고 온 게 아니야. 사람이 실수라는 걸 할 수도 있는 거란다. 부디 나를 용서해주기를 바라. 5시간 정도의 거리를, 아주 강한 햇살 아래서 걸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부활절은 지난 주였지만, 내 감정의 부활절은 오늘이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했더니, 친구들이 내 맥주와 함께 나를 반겨주었다. 지금 쟤네는 요리를 하는 중이다. 최고의 설거지 기술을 또 보여줄 때가 되었구만.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김이지의 '흩어져'다. 다시는 이산가족이 되지 말자 선글라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