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자 오르막길아

산티아고 순례길, Day 23

by Nell Kid
극한의 힘듦
Villafranca del Bierzo → O Cebreiro

물리적으로 이렇게나 힘든 일정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남은 순례길 동안, 이 정도로 가파른 경사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을 정도였다. 생장에서 론세발라스로 향했던 첫 날의 여정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때 느꼈던 구토감을, 오늘도 조금은 느꼈다. 도로를 따라 주욱 걷다가, 어느 순간 길이 가파라지기 시작했고, 점심을 아직 안 먹었던 나는 다소간의 현기증까지 겪어야 했다. 정말 아찔했다. 열 발자국을 걷다가, 쉬다가, 다시 열 발자국을 걷는 패턴을 반복했다. 산맥은, 혹은 산은, 주로 화산 활동으로 이루어진다고, 언젠가의 지구과학 시간에서 배웠던 것 같다. 따라서, 나는 과거 스페인 근처에서의 망할 화산 활동에까지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나의 걸음이 빠른 편이기는하다. 오직 평탄한 길을 걸을 때는 말이다. 언덕을 오르게 되면, 내 속도는 현저히 낮아진다. 낮은 속도는, 햇빛에 더 많은 시간 동안 노출돼야 한다는 걸 뜻하고, 그건 다시 내가 더위를 먹게 되는 악숙환으로 이어진다. 무슨 음악을 들어도 힘이 나진 않았다. 어떤 순간에는, 이어폰의 무게마저도 짜증스러웠다. 어떤 망할 인간이, 이 길을 '순례길'이라 명명할 생각을 했던 걸까. 그건 백프로 억하심정 때문이었을 거다. 자기만 고생할 수는 없다는, 뭐 그런. 그 덕분에, 전 세계의 수많은 후손들이 개 고생 중이다. 이게 어떻게 순례길이야. 사탄의 길이지.

알베르게 앞 당나귀

첫 날 보다 다행이었던 건, 그래도 휴식의 타이밍에 대해 비교적 많은 노하우가 쌓였다는 점이었다. 첫 날에는, 어디서 쉬어야 할 지도, 또 어떻게 휴식을 취해야 할 지도 몰랐다. 그러니 중간중간의 마을들을 그냥 지나치곤 했고, 그 결과로 가파른 산 중턱에서 몇 번이나 털썩 주저 앉곤 했다. 이제는 그래도 비교적 휴식이란 것에 대해 감이 생겼고, 고비 때마다 음식을 먹거나 콜라를 마시는 등의 행위로 피로감을 조금씩이라도 덜곤 했다. 지금도 철이 없지만, 언젠가 철과 생각 모두가 없던 때에는, '경험'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저 꼰대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남발해대는 용어라고 생각하곤 했다. 자신들의 쓸모있음을 주장할 유일하고도 손쉬운 단어가 '경험'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때 보다 아주 조금 더 자란 지금 생각해보면, '경험'의 무게는 무시할 게 못 된다. 그게 어떤 경험이었든 말이다. 경험으로부터의 조언이, 꼰대적 언사로 귀결되지만 않다면, 충분히 경청해 볼 만 한 것 같다. 그 경계가 꽤나 희미한 게 문제지만. 언덕의 중간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내 건강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햄버거. 여행을 하며 많은 음식들을 접하고 있지만, 이 정도의 완전 식품은 아직껏 없다. 햄버거와, 콜라와 맥주 한 잔 씩을 마셨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조합이라니. 쓰러져버릴 것 같았던 순간에, 이들 덕분에 힘을 얻었다. 사실상 호흡기와도 같았던 음식이었다.


힘을 얻었다고,남은 언덕이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남은 거리는 4.7 킬로미터였는데, 그게 다 가파른 언덕길이었다. 중간중간 몇 번 씩이나 비명을 질렀다. 어떤 순간에는, '와 존나 힘들어'라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아니, 무슨 길이 이딴 식인지. 평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께였나. 내리막길의 고됨도 오르막길의 그것만큼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멍청한 소리였다. 오르막길의 힘듦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내려오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올라가는 건 그저 어렵다. '쉽지 않음''그저 어려움' 사이에는 꽤나 유의미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저께의 가파른 내리막길이 아주 그리워졌다. 뭐, 내일 일정의 대부분이 내리막길인 건 조금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아니 근데 하루만에 다시 내려갈 길이라면, 왜 이런 식의 오르막길로 루트를 설계했는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원망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이성적이고도 합리적인 생각을 전개할 겨를 따위란 없었다. 헥헥 거리며 등산을 이어갔다. 어떤 순간에는, 탁 트인 사방의 광경이, 또 산맥들이 꼬리를 물고 있는 모습이 꽤나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건 한, 1초에서 2초 정도. 그리고는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가, 니 새끼들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고생이다, 라는 철없는 욕을 퍼부었다. 산맥의 입장에서는 다소 황당하고 억울했을 테다. 자긴 그냥 멀쩡히 있었는데, 동양에서 온 어떤 청년 하나가 산맥의 태생적 기원까지 언급해대며 고래고래 욕을 해대니.

높은 곳에 오르긴 올랐구나.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해발 1,300미터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마을 초입의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우선 콜라 한 잔을 주문했다. 헤헤. 콜라 한 잔에 피로가 풀렸다. 첫 모금이 정말 훌륭했다. 나도 모르게, '와우'라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덕에 주위의 일행들이 모두 웃기도 했다. 음, 좋네 이건. 영어를 아주 잘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들을 웃길 때면 어쩐지 모를 자신감을 얻는다. 마치, 내게 글로벌하고도 전 세계에 통용 가능한 '유우머' 감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콜라를 마시고는, 맥주 한 잔을 더 마셨다. 맥주 없는 세상은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다. 맥주 없는 순례길은 그저 끔찍하다. 솔직히 말 하여, 순례길에서의 최고의 즐거움은, 하루의 일과를 다 마친 후에 마시는 맥주 한 잔이다. 그 시원함, 그 쳥량감. 합법적인 도핑이다. 이 맛에 순례길을 걷는 것이고, 또 이 맛에 하루를 '그나마' 기분 좋게 마무리할수 있다. 오늘의 알베르게는, 여태까지 중 최악에 속하는 곳이었다. 훈련소가 떠오를 정도로의 열악한 시설이었다. 이 곳에 오래 머물기 싫어, 짐만 내버려두고 바로 근처 바로 향했다. 혼자 한 잔을 마시고 있던 와중에, 일행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니, 사랑스러운 오징어 튀김과 감자 프라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꽤 훌륭했던 저녁 식사까지 모두 그 곳에서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까 이들이 샤워를 할 때는 물이 무척이나 차가웠다는데, 다행히 내가 할 때는 충분히 따뜻했다. 암, 아무리 날이 덥든 말든, 샤워 물은 따뜻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테이의 '따뜻했던 그대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