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가 아니라 여행이라고

산티아고 순례길, Day 24

by Nell Kid
언제 또 이런 도보 여행을 해보겠어
O Cebreiro → Samos

누군가가 내게, 순례길이 언제 가장 힘들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마치 죽기 직전의 스네이프 교수처럼 눈물을 한 방울 또르르 흘리며 'Always'라고 대답할 것이다. 정말이다. 힘들지 않은 길은 없다. 적응이 되어 조금은 '덜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온 몸은 상당한 고통을 늘 견뎌내는 중이다. 나는 이 고통을 어떤 수준의 즐거움으로까지 승화시킬 만한 위인이 못 된다. 아주 부정적이고도 염세적인 내 성격 탓에, 고통은 언제나 고통일 뿐이다. 그러니, 불평불만은 입에서 끊이지를 않는다. 온갖 투정에 투정을 다 부리며 걷다보니, 그래도 어느새 100km 이하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이 길의 끝이 다가온 게 조금씩 느껴진다. 정말 100km 이하로 진입하게 되면, 시간의 체감 속도는 더 빨라지겠지. 오늘도 역시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어제 조금 더 무리하여 산 정상까지 올랐던 덕에, 오늘은 그나마 내리막길이 주로 있는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가파른 내리막길이긴 했지만, 오르막길의 힘듦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내리막길은 조심해야 할 게 많지만, 오르막길은 한 걸음을 떼는 것 자체가 무지하게 고되다. 해발 1,300미터라니. 한 때 히말라야 트래킹을 꿈꿨던 적도 있지만, 이젠 그런 미련 같은 건 없다.

날이 많이 좋다

순례길을 걸으며, 나는 스페인의 또 다른 얼굴을 알게 됐다. 남부 스페인만을 이전에 여행했을 때는, 이 나라에 이렇게나 많은 산맥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발품을 판 덕분에, 물론 이 발품을 덤핑에 가까울 정도로 너무 많이 팔아댄 것 같긴 하다만, 어쨌든 나는 스페인이란 나라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나라의 이름을 들었을 때, 이렇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다각적일수록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영국이 특히 대표적인 사례였는데, 이 전에는 오직 런던만을 알고 있다가, 이번 여행에서 다양한 영국 도시들을 돌아다녀 보았고, 그 덕에 굉장히 다양한 영국의 이미지들이 기억 속에 남아있게 되었다. 순례길, 이라고 하면, 여전히 버겁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내가 신부님도 아니고 무슨 얼어죽을 순례야, 따위의 회의감과 불평불만이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길을 걷는, 다른 형태의 스페인 여행이라 생각했더니, 조금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때가 있었다. 뭐, 아마 레온으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였던 것 같은데. 교통 수단이라는 치트키를 사용하느라 큰 흠결이 생겨버린 내 순례길의 순수성에, '합리화'란 반창고를 붙여야 했다. 불순한 의도로 시작한 작위적인 긍정이지만, 이 사고 방식이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다.


걷는 와중에는, 지난 번 걱정 무덤에 던질 돌에 내 이름을 적어주었던 앤디라는 친구와 앞으로의 일정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구체적인 날짜도 잡았다. 세상에. 내가 정말 외국인 친구가 생기기는 했구나. 나처럼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 여행은 상당히 좋은 치료제 중 하나다. 아주 작은 성취로도, 이를테면 공항에서 숙소까지 찾아오는 정도의 일 만으로도, 굉장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그저께처럼 선글라스를 잠시 잃어버린다는지, 아니면 다른 작은 실수를 저지르면, 또 한없는 자기 혐오와 회의의 굴레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리 거창하지 않은 것들에도, 소소함의 정도를 훨씬 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건 큰 즐거움이다. 그런 와중에, 내게 외국인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은 분명 새로운 자극이다. 작게는, 아 그래도 내 영어 실력이 아주 개판은 아니구나라는 실용적인 위안부터 하여, 크게는, 음, 그냥 기분이 좋다. 바다 건너 어딘가에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는 게, 그리고 그 친구들은 나와 함께 이 '순례길'이라는 정신 나간 여정을 공유한 사람들이라는 게. 항상 힘들기만했던 이 망할 순례길이 조금이라도 그리울 이유는, 아마도 순전히 이들 때문이다.

오직 평화로운 마을, 사모아

목적지인 사모아에 도착하여, 알베르게에 체크인하기 전, 함께 오늘의 걸음을 자축하는 의미의 맥주를 마셨다. 내일 100km 이하로 진입하게 되면, 이제 본격적인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카운트다운치고는 너무 많은 거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막상 걷기 시작하여 아무 생각없이 길을 따라가다보면, 또 어느새 하루의 할당량이 끝나 있을 때가 많다. 아마 앞으로의 며칠도 그러겠지.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순간도 기대되지만, 산티아고까지 딱 하루만 남겨둔 전 날의 기분은 어떨까 무척이나 궁금하다. 울려나. 아니면 허탈하려나. 뭐, 뺑이 치는 것의 최고봉인 군대의 전역 전 날에도, 별다른 기분이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담담했다. 그래, 시간이 됐구나, 이 정도. 순례길의 끝자락에서도 그 때와 비슷한 감정이라면, 그건 조금 아쉬울 듯하다. 어쨌든 여긴, '굳이' 내가 선택하여, 또 '굳이' 고생을 하려고 찾아온 곳이니까, 군대보다는 조금 더 많은 감회가 들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까지는, 음, 정말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좋은 사람들을 만난 건 더 없는 행운이나, 길 자체에서는 큰 의미나 매력을 느끼지 못 하고 있다.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은, 이 멋진 봄 날의 유럽에서 나는 지금 뭘 하고 앉아있나, 라는 회의였다. 막상 걸어보니 별로 큰 의미가 없더라, 라는 걸 발견하는 것도 하나의 의미이긴 하겠으나, 그건 조금 허무할 것 같긴 하다. 이렇게나 오래, 많이 걸었는데.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김동률의 '동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