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 25
드디어, 100km 미만
Samos → Portomarín
마침내, 그리고 드디어, 100km 이하로 들어섰다. 일행들과 함께 100km 지점에서 사진을 찍었다. 찰칵. 어쩐지 인생에서의 매우 중요한 과제가 끝난 느낌이었다. 물론, 아직 100km나 더 남았지만. 유난히도 오랜만이었던 어제의 숙면 덕에, 오늘의 컨디션 역시 유난히도 좋았다. 오늘의 컨디션 덕분에, 지난 며칠간의 컨디션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음을 역시 깨달을 수 있었다. 잠이 보약이다. 내가 열렬히 응원하는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가, 어제 저녁 아주 중요한 라이벌 매치에서 패배하고 말았고, 그 덕에 남은 와인을 몽땅 다 마셨으며, 아주 깊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본 엘클라시코는, 무척이나 치열했다. 전 국민의 관심이 이 경기에 쏠려 있는 듯했다. 그런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패배했다. 내가 그렇게나 응원했 건만. 경기 종료 직전에 골을 허용했고, 허탈감은 상당했다. 뭐, 그나마 긍정적인 구석을 하나 찾자면, 경기 결과의 스트레스로 인해 마신 술이, 내 숙면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는 거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토록이나 정신이 말짱한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게 심지어 새벽 5시 반이었는 데도 말이다. 그래도 피곤함은 어쩔 수 없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시간만 더 자면 바랄 게 없다는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이제 순례길이 단 4일 남았다. 4일 후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이 될 것이다.
오늘 순례길에는, 기대치 않았던 선물이 있었다. 바로 라면이었다. 라면. 이름부터 영롱하다. '라면'이라니. 한 작은 마을에서, 온갖 라면들을 판매하고 있던 작은 마켓을 하나 발견했다. 사막의 오아시스도 이 보다 기쁠 수는 없을 것이다. 4개월 째 여행 중인 내 입장에서는, 김치나 라면이야말로 가장 이국적인 음식이다. 주체할 수 없는 행복한 마음에 라면을 구매했다. 신라면이었다. 역시, 라면은 신라면이지. 숙소까지의 남은 거리가 그리 짧지는 않았지만, 그저 행복했다. 여기서 라면이라니. 세상에나. 이토록 강한 조미료의 자극. 내 건강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신라면, 나의 스프. 숙소에 도착하여 이 라면을 끓여 먹을 상상을하니 굉장히 일찍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여행을 하며, 무엇을 먹는 행위란 사실 내 주안점이 아니었다. 여행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식비를 깎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먹는 군것질로도 배가 불렀고, 거기에 맥주나 와인을 사 마시면 더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라면은 음식 이상의 음식이다. 흐음. 라면 스프를 처음 개발했던 사람이 누군지는모르겠으나, 그의 가문을 조사해 보면, 아마 조상 중에 대장금이 있을 테다.
오늘 우리가 걸었던 거리는 거의 32km 였다. 나의 한계는, 잘 해 봤자 25km다. 이를 넘어가면, 발이 슬슬 아파오기 시작한다. 물집의 문제가 아니다. 물집의 통증은, 차라리 따가움에 가깝다. 하지만, 25km 이상이 되면 등장하는 고통은, 굉장히 묵직한 고통이다. 발 전체가 아리는, 그런 종류의 것. 걸으면 걸을 수록, 발이 붓는다. 그녀와 비교하는 게 전혀 옳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피겨 스케이터 김연아의 발처럼 말이다. 부운 발은, 발 전체에 묵직한 통증을 전달한다. 하루 중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절뚝, 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다. 나의 해결책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다음에, 알코올을 쏟아 붇는 것이다. 그럼 알코올이 증발 되며, 발의 붓기가 조금 가라 앉는다. 발의 통증을 가라 앉히기 위한 각자만의 노하우가 있다. 그 노하우들을 서로 공유하며, 우린 조금씩 '덜 고통스러운'사람이 된다. 어딘가에서, 직장인들은 직장을 다닐 때, 가슴 한 구석에 언제나 사표를 넣고 출근한다는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순례길을 걸을 때, 나는 언제나 가슴 한 구석에 마드리드로의 기차표와, 당일 저녁의 호텔 숙박권을 가지고 다닌다. 전자는 여의치 않으면 마드리드로 튈 생각 때문이다. 후자는, 매일 아침마다, 오늘 같이 겁나게 피곤한 날에는 무조건 호텔을 써야지, 라고 다짐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오후가 되면 컨디션이 정상화되고, 자연스레 알베르게에서 머무는, 나름의 '악숙환'을 반복하게 된다. 알베르게와 호텔이 제공하는 삶의 질은 확연히 다르다. 이 순례길이 끝나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 그땐 정말, 겁나게 쉴 거야.
라면을 끓였고,생각보다 외국인 친구들이 라면을 잘 먹어 기분이 좋았다. 나 역시도 충분한 라면을 즐길 수 있었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국물을 마셨다. 하아, 난 이제 더 이상 이 순례길에 아쉬움이 없다. 오직 강렬한 조미료의 기억만 있을 뿐. 남은 4일을 걷기 위한 행복한 동력을 얻었다. 라면, 라면, 라면. 이 강렬한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1,000원도 안 되는 가겨에 접할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이지만, 여기서는 더 없이 귀한 요리다. 그게, 내가 평소의 소소하고도 사소한 날들에 감사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됐다는 걸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어쨌든, 이 순간 만큼은 더 없이 훌륭하고 맛있는 저녁이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아이유의 '이런 엔딩'이다. 100km도 안 남았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섭섭은 무슨, 오직 시원시원하기만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가 끝난다는 사실은 어쩐지 모를 씁쓸함을 자아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