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ay 26
40km, 신기록
Portomarín → Melide
비가 내렸다. 그래서 걸음을 서둘렀다. 걸음을 서두르다보니 예상보다 일찍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 그 때, 날이 맑아졌다. 크게 힘들지도 않고, 마침 날이 좋아졌던 관계로, 우린 조금 더 걷기로 결심했다. 여기서의 핵심은, '조금'이 아니라'더'였다. 17km를 더 걸었다. 뭐, 여기까지는, 그냥 그런대로 괜찮았다. 발의 상태가 아주 멀쩡치는 않았지만, 오늘 이렇게 무리를 하면 앞으로 이틀 안에 산티아고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하루의 여유 시간을 위해서는, 몇 킬로미터를 더 걷는 수고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날이 다시 안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비가 또 내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추가적인 걸음을 가능하게 했던 건, 좋아지고 있던 날씨였다. 젖고있는 가방을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될 듯 했고, 우비를 입었다. 내리는 비의 무게만큼이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17km를 더 걷게 되어, 오늘의 할당량은 40km에 육박했다. 내 발의 한계는 25에서 26km 정도다. 그 근처의 거리를 걷게 되면, 슬슬 발에서부터의 경고 신호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무리해서라도 걸으면 많아봤자 32km에서 멈추곤 했는데, 확실히 40km는 그 자체로도 또 다른 도전이었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씨라니. 어머나 세상에.
아침으로 샌드위치 하나만 먹었던 탓에, 최종 목적지에 다다르기 5km 전부터는 약간의 어지러움까지 느꼈다. 아, 아까 초콜릿 하나를 더 샀어야 했는데. 당이 떨어지니, 걷는 게 더욱 지난해졌다. 첫 날 론세발레스로 향할 때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지랄스러운 순례길 전체에서도 손꼽힐만한 고됨이었다. 40km보다 더 지랄스러웠던 론세발레스로의 첫 날은, 어떤 면에서 보면 '지랄스러움'의 끝판왕이긴 했다. 개인적으로, 난 이 곳을 론세발레스라고 부르지 않는다. 내겐 그저 '론씨발레스' 였다. 어쨌든. 다운로드한 팟캐스트를 들으며, 비 때문에 무거워져 떼어지지 않는 걸음들을 부단히도 옮겼다. 이런 와중에도 그래도 걸음을 걸을 수 있는 내 신체가 신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충분히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적당히 힘든 선에서 마무리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항상 이 놈의 비가 문제다. 순례길의 3일이었나 4일차 이후로 비가 내리지 않아, 아 그래도 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날씨운은 괜찮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오늘 같은 날 이렇게 비가 내릴 게 또 뭐람. 요즘 내가 너무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았던 모양이다. 하늘에, 적당히 보채고 투정도 부려야지 날씨가 괜찮은 것인데.
홀딱 젖은채로, 숙소에 도착했다. 굳이 고생스럽고도 지랄스러운 길을 걷고 있는, 한 초라한 남자의 모습이 창가에 보였다. 그게 나란 게 문제였다. 야 그래도, 도착은 했네, 라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오늘은 충분히 뿌듯해 할 자격이 있었다. 방을 배정받자마자 옷을 홀딱 벗고 샤워와 빨래 준비를 했다. 원래 오늘은 세탁기를 돌릴 생각이 없었으나, 그 보다 더 예상에 없던 비 때문에 도리가 없게 되었다. 남은 이틀에는, 비가 없기를 바란다. 그래도,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직전에 이렇게 비를 맞은 것이, 지금 돌아보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경험이다. 우선은 무용담이 하나 늘었고, 동시에 추억거리가 하나 더 생겼으며, 뭐 어찌됐든 강렬히 기억될 하루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고작 50km 밖에 안 남았다. 중간에 탔던 기차와 버스, 그리고 두 번의 히치하이킹은, 전체거리에서는 옥의 티에 불과할 정도로 짧은 구간이었다. 역시 지금 보니 말이다. 그 때 당시에는 굉장한 죄를 짓는 기분이었는데, 막상 전체와 비교하니 전혀 부끄럽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아주 조금은 더 넉넉한 사람이 된 것도 하나의 이유겠다. 얘네들은 나보다 훨씬 '덜' 목적지향적이다. 같이 순례길을 걸음에도, 이걸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고 말겠다는 강박이 없다. 이런 사람들과 꽤 오랜 시간 어울리며, 물론 이들이 뭐라 말 하는지 알아들을수 없던 때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그런 여유를 배울 수 있었다.
결국은, 사람이 남았다. 이들 만으로도, 순례길의 의미는 무척 크다. 가장 중요하고도 깊은 의미를 나눌 수 있던 사람들을 만나 함께 걷고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 의미 찾기에 대한 강박적 상태에 있었는지 다소 민망할 정도다. 아주 어릴 때의 가족 여행 이후로, 누군가와 함께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 여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놀라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그렇게 불편하거나 어려웠던 순간은 없었다는 점이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에 대한 가능성을 열게 했던 이들과의 날들이었다. 거기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보다 더욱 많은 술 잔을 공유하며, 어쨌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 하고 또 추억을 교환할 수 있었다. '즐거웠다'라는 게 우선 가장 중요하다. 또 많은 걸 배웠고, 그 만큼의 많은 영감을 얻었다. 부디 나 역시도 이들에게 작은 영감이라도 되었기를 바라는 바다. 잊지 못 할 추억이 될 이들과의 날들이,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의 국적이 다르기에, 이 멤버들로의 재회의 가능성은 아주 미약하다. 고마웠다고, 덕분에 꽤 자주 즐겁고도 행복했다고, 작별하기 전에 말 해주어야 할텐데. 이렇게 말하는 게 조금은 또 쑥스럽고 민망하다. 아마 내일은 30km 정도를 걸을 것 같다. 그럼, 20km도 안 되는 거리가 남는다. 이제 정말로, 끝이 보인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영화 <어느 날>의 OST인 '달빛바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