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1

산티아고 순례길, Day 27

by Nell Kid
수고했고, 하루만 더 수고하자
Melide → O Pedrouzo

별 일이 없다면, 내일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아마도,산티아고에 도착하지 못 할 정도의 별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날이 오긴 왔다. 이제 곧 고지가 눈 앞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는지, 오늘의 걸음은 조금 벅찼다. 걸었던 거리가 상당하기도 했다. 33km. 어제 40km를 걸었으니, 이틀 동안 도합 70km 이상을 걸었던 셈이다. 이렇게 무리를 한 덕분에, 이제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는 단 20km다. 늦어도 내일 오후 시 즈음이면, 그 근처에 다다를 것이다. 엄청나게 벅찬 기분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하다. 걸음의 당연한 속성 때문일 수도 있겠다. 꾸준히 계속 걷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 곳에 다다를 테니. 물론, '꾸준히'라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 이 순례길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결국 정신적인 영역에서 발생했다. 그걸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회의감이었다. 이 짓을 왜 하고 앉아 있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발걸음을 더욱 더디게 만들었고, 또 즐거움을 느끼지 못 하게 방해했다.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에 했던 90일 정도의 여행이, 오히려 독이됐던 순간들도 있었다. 좋은 걸 그 때 미리 다 경험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 때문인지, 많이들 칭송하는 이국적임과 경이로움을 자주, 혹은 많이 받지는 못했다. 이 보다 더 이국적이고도, 또 경이로웠던 순간들이 90일 동안의 여행에서는 아주 빈번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걸었던 건, 부끄럽지만, 아주 얄팍하고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너무 많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순례길을 알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절대 포기할수 없었다. 참 이런 걸 보면, 나란 사람이 얼마나 담대하지 못하고, 또 남의 시선을 지독히도 신경쓰며, 한 마디로 말 하자면 참 별 볼 일 없을 정도로 그릇이 작은 인간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 길을 끝까지 완주하여, 나에 대한 이야기거리를 하나 더 만들어내고 말겠다는 허영과 과시욕도, 순례길을 추동했던 이유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 덕분에 나의 젊은 날에 하나의 강렬한 표식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한 편으로 보면 표식이기 보다는 생채기에 가깝지만. 작년 12월에 시작한 나의 이 여행은, 그 본질을 '굳이'에 두고 있다. 오직 휴식 만을 취할 것이었다면, 그냥 집에서 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굳이'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여행을 다니고 있다. 순례길은, 그 여정의 상징일 지도 모른다. 비행기로는 반나절도 안 걸리는 이 거리를, 한 달 동안이나 걸었다. 발의 상태가 '개판'에 가깝게 변하는 데도 말이다. 사람이 우주로도 갈 수 있는 21세기에, 가장 재래적인 교통 수단조차 이용하지 않은 건, 정말로 오직 '굳이'였다. 순례길이 내 인생 전체에 어떤 의미로 남을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남에 따라, '굳이'의 나날들이 내게 건네는 의미가 조금씩 구체화되리라 생각한다. 당장의 현실이 순례길이고, 당장의 현실에서는 어떤 중요한 의미를 찾아내는 게 종종 힘들다.

익숙하지만, 마지막이니 어쩐지 모를 애틋한 풍경

일행들과 같이 걷다가, 오늘은 내 순례길의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것이 분명한, 소풍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말이 좋아 소풍이었지, 바람이 너무 강하여 차라리 추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빵과 치즈, 거기에 약간의 햄과 채소를 앞에 두고, 와인을 한 잔 씩 마실 때의 기분은 정말 훌륭했다. 내 젊은 날에 '무엇'이 있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슬로베니아의 '피란'으로 대표되는 지난 90일 간의 여행이라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내 젊은 날에 '누가' 있었냐는 질문을 재차 받는다면, 제일 먼저는 한국에 있는 정말 가까운 친구들의 이름을 댈 것이지만, 순례길을 함께 걸었던 이 친구들의 이름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여행을 하며, 가끔씩 외국인들과 친해지고 이야기하게 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혹시 한국에 온다면 멋지고 맛있는 술을 사주겠다는 공수표를 남발하곤 했다. 물론 그 중에서는 진심도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맨날 허풍만 치고 살겠나. 하지만 순례길에서 만난 이들에게만큼은, 매 순간 진심으로 그 말을 건넸다. 물론 이들 중 누가 한국에 올 수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게 어느 때든, 항상 기쁜 마음으로 술을 사 줄 수 있을 것 같다. 음, 술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이들에게 얻어 마신 술의 양도 상당하다. 덕분에 매일같이 한껏 취할 수 있었다.

지혜의 벽

산티아고를 하루 앞 둔 저녁의 기분이 어떨지 많이 궁금했었는데, 굉장히 아무렇지도 않다. 이틀 동안 무려 70km 이상을 걸어서 그런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피곤할 뿐이다. 내일과 모레 머무를 호텔을 예약했다. 욕조까지 달린 싱글룸이다. 지금 가장 기대되는 건, 그 호텔이다. 좀, 쉬고 싶다. 피로가 이미 상당히 많이 누적됐다. 알베르게의 특성상, 아침에는 일찍 숙소를 벗어나야 하고, 그 때문에 매일처럼 오전 6시 이전에 기상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물론, 가끔은 게으름을 부릴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게으름을 오전 11시나 정오까지 부릴 수 있는 것도 또 아니었다. 늦잠을 자고싶다. 아침 해가 뜨든 말든, 아무런 상관도 안 한 채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싶다. 내게 가장 절실한 건, 그런 게으른 아침이다. 순례길을 진작 포기했다면, 이미 그런 인생을 누리고 있었을 지 모른다.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엄청난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나, 단 하루 전인 오늘에와서는, 굳이 그럴 정도의 당위성을 스스로에게 주입할 필요는 없었다는 후회도 조금은 든다. 하지만,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고, 걸어온 길은 걸어온 길이며, 어쩌면 그 덕분에, 훨씬 더 뿌듯하고도 자랑스러운 늦잠을 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다른 일행들은 많이 아쉽고 슬프다는데, 솔직히 말하여 나는 시원함이 더 크다. 어쨌든,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새삼, '끝'이라는 이 짧은 한 글자가 가진 강력한 단정적임을 느끼게 된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넬의 'Dream Catcher'다. 달랐을 뿐, 잘못되지 않았던 우리의 2017년 한 달을 기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