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그렇게나 좋다는

산티아고 순례길 에필로그 - 1 (포르투)

by Nell Kid
와인에 흠뻑 취한 날

포르투가 그렇게 좋다길래, 포르투로 이동했다. 아직 순례길의 피로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아, 아침의 기차가 조금 힘들기는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는 한 시간의 시차가 존재했다. 포르투갈이 한 시간이 더 느렸고, 덕분에 한 시간의 추가 시간을 얻은 느낌이었다. 포르투에 가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와인.' 그 유명한 포트 와인을 직접 맛 보기 위해. 아는 척을 조금 해보자면, 왜냐하면 나의 교양 지식이 그리 폭 넓지는 않기 때문에, 포트 와인의 기원은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전쟁으로 인하여 프랑스로부터 영국으로의 와인 수출이 불가능하게 됐고, 영국은 궁여지책으로 포르투갈 주변에 와인 산지를 마련했다. 하지만, 운송 기간 때문에 와인은 변질되곤 했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다가 와인에 브랜디를 섞어 도수를 강화하는 방식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결과로, 포트 와인은 다른 와인들보다 도수가 더 높고, 그러면서도 독특한 풍미를 가지게 되었다. 포르투에는 이런저런 유명한 다른 관광지들도 많다. 대표적인 것은, 호그와트의 배경이 되었다는 한 서점이다. 해리포터를 좋아하는 나는, 우선 이 곳을 먼저 가려고 했다. 하지만, 세상에나. 이 도시를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죄다 이 서점 앞에 줄을 서 있는 듯했다. 가뿐히 포기했다. 그리고 곧장, 근처의 바를 찾아갔다. 유려한 포르투갈 발음, 인 척을 하며, 포트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시작은 화이트 와인이었다. 오늘의 음주 대서사시의 위대한 서막이었다.

20170429_115505.jpg 산티아고 기차역. 이젠 당당히 기차를 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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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9_220156.jpg 전 날 하루 머물렀던 도시, 스페인 서해안의 '비고'

맛있었다. 그 동안 전혀 맛 보지 못 한 풍미였다. 흐음, 이 그윽한 향. 도수가 높았지만, 당도 역시도 높게 느껴져 크게 부담스럽거나 쓰지는 않았다. 강렬한 맛 때문에, 포트 와인은 음식보다는 초콜릿 등의 가벼운 안주와 더 잘 어울린다고 한다. 다른 바로 이동하여, 거기서 치즈와 초콜릿을 주문했고, 본격적인 시음에 나섰다. 포트 와인은 세 종류가 있었다. 루비, 화이트, 그리고 타우니. 타우니는 루비와 화이트가 섞인 것이라는데, 굉장히 색다른 맛이었다. 가장 맛이 좋았던 건 루비였다. 루비. 이름부터 어쩐지 고양이 이름만큼이나 도도하고 강렬하면서도, 또 부드럽고 달콤해보이지 않은가. 네 잔 정도를 거기서 연거푸 마셨다. 그러다보니 다소간의 피로가 몰려왔다. 음, 전반전은 이렇게 끝나는 구나. 호스텔로 돌아가, 체크인을 하고 침대에 누워 잠깐 낮잠을 잤다. 좋은 와인이어서 그런가, 숙취도 없이 숙면을 취했다. 덕분에 굉장히 상쾌한 상태로 기상할 수 있었다. 호스텔에는 무료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렌지와 사과 하나씩을 챙겨, 다시금 관광을 나섰다. 포르투에는 유명한 강이 하나 있었고, 강변에서 와인을 마시기 위해 그 곳으로 향했다. 오늘을 벼르며 순례를 견뎠다. 일주일 전 순례길을 걸을 때부터, 반드시 포르투에 가서 미치도록 와인을 마시겠다고 결심했었다. 이런 맹세는 또 참 잘 지키지. 이런 맹세만 잘 지켜서 문제겠지만. 이런 정성과 의지로 공부를 했다면, 가사 경제에 조금의 보탬이 됐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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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이 생각보다 무척 아름다웠다. 전차와 사람이 함께 다니는 다리를 건넜고, 그 다리에서 내려다본 강의 전경이 상당했다. 기뻤다. 이런 풍경이라면, 술맛이 훨씬 더 좋을 것 같았다. 다리 위에서 강을 한참동안 구경하다, 다리 밑의 강변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에, 포르투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 화살표를 발견하기도 했다. 무심코, 따라갈 뻔했다. 습관이 이렇게나 무섭다.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포르투갈 길도 그 중 하나다. 순례를 마쳤다는 것에 담담했었는데, 또 이렇게 낯선 곳에서 노란 화살표를 보니 새삼 스스로가 뿌듯해지는 느낌이었다. 즉, 술을 마시기에 아주 좋은 물리적, 또 정신적 환경이 마련되었다. 우선은 식사를 해야 했으므로, 노천 카페들 중 한 곳에 들어가 치즈버거와 콜라를 하나 주문했다. 치즈버거가 숙취 방지와 해소에 좋다는 걸 어디서 주워 들은 적 있었다. 치즈버거만 보면, 한국의 걸그룹 러블리즈의 멤버 케이가, 한 프로그램에서 '띠듀버거 따듀떼요'라는 애교를 보여줬던 게 생각나 조금 웃음이 난다. 러블리즈가 이 글을 읽을 리는 절대 없겠으나, 어쨌든 참 고마운 아이돌이다. 순례길이 힘들 때마다, 이들의 음악을 들으며 에너지를 얻곤 했다. 좋은 노래를 더욱 멋지게 불러준 러블리즈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너무 주책스러운가. 아무튼.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종류별로 두 잔 씩은 마신 듯하다. 행복했다. 조금씩 변하는 하늘의 색을, 또 강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 좋은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는 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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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의 일몰 시각은 지나칠 정도로 늦었다. 일몰을 보기 위해 노천 카페에서 와인을 계속 주문하며 기다리다가, 갑작스럽게 몰려온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숙소로 발걸음을 향했다. 가는 길에, 못내 아쉬운 나머지 루비 와인 한 병을 샀다. 호스텔에 다다라서야, 해가 조금씩 지기 시작했다. 이 호스텔에 테라스가 있다고 해서 상당히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테라스는 닫겨 있었다. 아쉬운대로, 식당에서 와인을 마셨다. 와인잔이 없어 그냥 평범한 유리컵에 와인을 담아 마셨지만, 어쩐지 이게 더 운치있게 느껴졌다. 아직 보진 못했지만, 올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문라이트>에서도, 두 주인공이 재회하여 평범한 플라스틱 컵에 와인을 담아 마시는 장면이 있었다고 한다. 마실 잔이 스테레오타입처럼 정해져 있는 술을, 다른 컵이나 잔에 담아 마실 때면 묘한 아이러니가 피어나는 듯한 감정이다. 조금은 소박하고, 또 소소한 기분이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순례길을 마치고 나 스스로에게 축배의 잔을 건넨 적이 아직 없었다. 이렇게 소박한 자축도 나쁘지는 않았다. 와인은 여전히 맛있었다. 내일은 다시 마드리드로 이동해야 한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유럽에서의 마지막 도시다. 그 중간을 포르투로 정하고 이 곳에 오길 참 잘했다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멋진 와인을 마시며, 내 지난 한 달을 축복할 수 있으니. 와인을 끝까지 비웠다. 어질, 한 피로가 조금은 밀려왔다. 내일 아침이 조금 걱정되기는 한다. 숙취를 감당할 수는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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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30_201309.jpg 정말 예쁜 도시

이 게으른 날이 무척이나 좋았다. 기상 시간도, 걸어야 할 거리도, 또 내일에 대한 부담도 없이, 오로지 순간을 즐길 수 있었고, 마음껏 취함에 거리낌이 없던 하루였다. 순레길의 한 달이 내 인생에 우선 단기적으로 남긴 선물은, 바로 이렇게 게으른 날의 소중함과 매력을 더 절절히 느끼게 한 것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원래 게으른 내 천성에, 다소간의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일 수도. 취해서 그런가, 별 게 다 애틋하게 느껴진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넬의 'Grey Zon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