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있어줘서 고마워, 정말

산티아고 순례길 에필로그 - 4 (톨레도)

by Nell Kid
생의 최고의 도시에 다시 방문할 때

한 달 짜리 순례길에 뭔 놈의 에필로그가 이렇게나 많나 싶긴 하다만, 새로운 여행기를 시작하기에는 또 어중간한 관계로, 계속해서 순례길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발은 아직도 아프다. 걷는 건 아직도 조금 무서우면서 귀찮고. 거기에, 또 굳이 되도 않은 핑계를 대자면, 최근 여행하고 있는 포르투나 마드리드, 그리고 오늘 방문한 톨레도 모두에도 순례길 루트가 있다. 그러니, 순례길로부터 완전히 괴리되지는 않은 여행이라 주장하는 것도 아예 틀린 거짓말은 아니다. 어쨌든. 지난 세 번의 에필로그들 중, 두 번은 술에 관한 것이었다. 한 번은 포르투에서의 와인,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드리드의 클럽. 그래서 조금 정신적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오늘은 마드리드 근교의 고대 도시 톨레도를 방문했다, 라고 한다면 이 사랑스러운 도시에 대한 나의 애틋함을 애써 숨기는 말이다. 톨레도를 말하며, 3년 전의 내 여행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슬로베니아의 피란을 방문하기 전까지, 마드리드는 내 인생 최고의 도시였으며, 그 근교에 톨레도가 있다는 게 가장 주된 이유들 중 하나였다. 3년 전에도, 물론 지금보다야 조금 더 두렵고 걱정되는 마음에 계획적으로 여행하려 애쓰긴 했으나, 여전히 그때도 게으른 천성은 어쩔 수 없었고, 마드리드가 첫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다른 사전 준비 없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이 곳의 유명한 근교 관광지로 톨레도라는 게 있따는 걸 처음 들었고, 어느 날 아침에 그냥 오늘은 여길 한 번 가봐야겠다, 싶은 마음에 기차를 타고 톨레도로 향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기차 여행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고, 따라서 꽤나 신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톨레도 역을 나와서는, 그냥 걸었었다. 이런저런 투어 상품들이 역 안에서 설명되고 있었지만, 젊은 여행객이라면 저런 패키지에 돈을 낼 수 없다는, 쓸데없고도 알량한 자기충족적 나르시즘 때문에, 그들을 가뿐히 무시하고 그냥 걸었다. 헌데, 아무런 정보도 없이 왔으니, 뭘 알 리가 있나. 더구나, 그땐 해외 여행을 다닌지 고작 3일 밖에 안 된 풋내기 여행자 시절이었다. 어쩔 수 없이, 네이버 검색창에, '톨레도 여행'을 검색했다. 이게 조금 아이러니한 것인데, 톨레도든 마드리드든 베네치아든, 네이버에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 게 없다. 심지어, 베네치아 맛집이라 검색하면, 정말 상당히 맛있는 그 곳의 피자집도 누군가의 블로그에 포스팅 되어 있다. 몇몇 블로그들을 주욱 읽다보니, '파라도르'라는 곳에 가면 톨레도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음, 이왕 전경을 보는 것이라면, 일몰 시간대가 좋겠지, 라고 생각하며, 주간 시간대에는 톨레도 성당을 비롯하여 시내 중심부를 여행했다. 톨레도 성당은, 아마 그 여행에서 최초로 돈을 내고 입장한 성당이었다. 상당히 웅장했는데, 그것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오디오 가이드의 본전을 뽑기 위해 되도 않은 영어 실력으로 열심히 설명을 들어대던 경험이다. 아무튼 톨레도 성당의 탑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기까지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일몰 시간이 가까워졌다. 헌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성당 앞에서 우산을 하나 구매했지만, 바람도 상당히 불어 그 싸구려 우산마저 망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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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6_154947(0).jpg 오늘에서야 확인 한, 톨레도의 새로운 얼굴

당시에도, 파라도르까지 운행되던 꼬마 열차 같은 게 있긴 있었다. 하지만, 가진 거라고는 시간과 체력 밖에 없던 나였고,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돈을 쓰는 건 나의 여행이 아니다, 라는, 역시 나르시즘에 가까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 비를 맞으며 계속 걸었다. 11월의 마드리드는, 11월이라는 달이 무색할 만큼이나 별로 춥지는 않은 곳이었다. 헌데, 비가 내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도대체 내가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비를 맞으며 파라도르까지 걸어가고 있나, 라고 내내 투덜거렸다. 지금 보면, 이건 이번에 내가 순례길을 걸을 때 가장 많이 내뱉은 불만과 궤를 같이한다. 아무튼. 그칠 줄 모르는 비를 뚫고, 구글 맵에 의존한 채 파라도르까지의 벅찬 걸음을 이어나갔다. 파라도르가 언덕에 위치해있었고, 그 날씨에 언덕까지 오르려니, 이게 어떻게 여행이야 개고생이지, 라는 마음도 들었었다. 그땐 전혀 몰랐겠지. 3년 후에, 더 미친 거리를 걷는, 아주 무척이나 정신 나간 행위를 할 것이라는 걸. 언덕을 오르는 내가 너무 가엾어 보였는지, 한 아주머니는 오토바이를 멈추고 나를 뒤에 태워주기도 했다. 내 인생 첫 '차 얻어타기'였다. 빗길의 오토바이라니, 지금 보면 상당히 위험한 조합이지만, 그 분의 드라이빙은 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경지에 올라있는 듯했다. 마치, 비가 아주 많이 내렸던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에서, 현대 유니콘즈의 마무리 조용준의 슬라이더 같았달까. 그 고마웠던 경험으로, 나는 그래도 세상에는 선의를 베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고, 이건 이번 순례길에서 비교적 자신감있게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던 이유였기도 했다. 이렇게, 한 여행의 경험은 다른 여행에서의 자신감을 잉태한다.


그렇게, 고생 고생을 해서 올라간 파라도르였다. 11월이었던 만큼, 일몰 시각은 지금보다 훨씬 빨라, 도착했더니 해가 서서히 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 내가 보았던 건, 정말로, 숨이 막힐 만큼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방금 전까지 걸어다녔던 톨레도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졌고, 그 곳의 불들이 하나 둘 켜질 때는, 굉장한 조명쇼에 와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그땐 고작 여행 3일차였는데, 혹시 이것이 내 남은 여행들 중에서 최고이면 어떡하지, 와 같은 무서운 불안함까지도 느낄 정도였다. 그 야경은, 아주 오래도록, 정말 선명하고도 또렷하게 내 마음에 '박히게' 되었다. 그 이 후의 3년 동안, 어떤 종류의 희망사항이나 소원을 이야기 할 때마다, 나는 톨레도 파라도르에서의 야경을 한 번 만 더 보고 싶다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순례를 마치고 마드리드로 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야경을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3년 동안 오직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던 이 야경을, 어쩌면 내 삶의 이데아 같았던 이 곳을, 이렇게 재방문하게 되니 무척이나 두근거렸고 흥분되었다. 눈부시기만 했던 어린 날을 함께한 옛 연인을 3년 만에 만나게 된다면, 이런 감정과 비슷하려나 싶었다. 하지만, 연애라는 것 자체가 눈부시기만 할 수는 없기에, 결국 이 느낌은 여행의 한 순간에서만 받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오늘의 기차 안에서 했다. 마드리드에서 톨레도까지는 기차로 채 40분이 안 걸린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당일치기로 많이 들르는 곳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곳에서 2박이나 예약했다. 조금 더 깊이, 또 오래, 내가 가장 사랑했던 톨레도를 음미해보고 싶었다.


기차역에서 내려서는, 호텔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사치를 부렸다. 싼 곳을 예약하다 보니, 호텔은 대중 교통 따위로는 닿을 수 없는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거리 자체는 그리 먼 곳이 아니었지만, 예전에 이 도시에 언덕이 상당히 많았던 기억이 있어서 무작정 걷기에는 조금 겁이 났다. 순례길을 걷기 전이었다면, 이 정도 거리야 금방 아니겠어, 라고 호기롭게 도전했겠지만, 이제 나는 걷는 행위에 있어서 만큼은 꽤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거기에, 그 동안은 '택시'라고 하면 어마어마한 요금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스페인의 택시 요금이 또 아주 비싼 편이 아니다. 편리함과 신속성까지 고려하면 오히려 '싼' 편이기도 하고. 기본요금에 가까운 금액으로, 호텔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워, 모처럼 만에 승리를 챙긴 삼성 라이온즈의 오늘 경기 야구 하이라이트를 감상했다. 응원하는 야구 팀이 자주 지니, 여행 중에 와이파이가 잘 안 터져도 별다른 답답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어 좋다, 는 무슨. 순례를 함께 했던 미국인 친구 앤디는, 시카고 컵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컵스는 작년에 108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내 친구는 앤디는, 그의 나이 불혹이 다 되어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생전'에 컵스의 우승을 본 행운아였기도 했다. 우승을 말하던 순간에 그의 눈가에 맺힌 울컥함에는, 끝내 응원 팀의 우승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던 이들의 숱한 한이 함께 서려있는 듯했다. 그래, 팬이라면, 이런 암흑기도 함께 견디고 버텨내는 이들인 거지. 그래도 좀, 어지간히는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건 너무 독보적인 꼴찌아닌가.


모처럼만의 승리에, 아주 오랜만에 방문하게 된 톨레도에서의 공기는 더욱 산뜻하게 느껴졌다. '후미진' 곳에 위치한 숙소 덕분에, 나는 톨레도의 다른 얼굴도 함께 알게 되었다. 무척이나 산 골짜기가 많은 동네였다. 숙소 바로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거기서 몇몇은 낚시를 즐기는 중이었기도 했다. 관광 지구만을 여행할 때는 톨레도에 이런 면에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못했는데, 상당히 낯설고도 이국적인 장면이었다. 누구와 함께 있었다면, 저 강에서 같이 물놀이를 즐겼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했다. 강을 따라 주욱 걷다 보니, 3년 전의 내가 파라도르로 가는 길에 건넜던 다리가 나왔고, 반가운 마음에 다리에 손을 흔들었다. 정말 반가웠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너를 내내 잊지 못 하다가 드디어 다시 왔단다. 어차피 톨레도에 온 주 된 목적은 야경을 보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가 질 때 까지 내내 침대에만 있을 수는 없으니, 관광 지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3년 전, 그 때 그 때의 모습들이 생각나 조금 웃음이 났다. 새로운 지역을 방문하는 일도 정말 새롭고 기쁜 여행이지만, 아주 좋았던 곳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방문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행복한 경험이다. 그 기간 동안의 삶을 돌이켜보며 미소지어 볼 수도 있고. 문제는, 겨우 시간과 금전의 여유가 생기면, 보통 새로운 곳을 먼저 찾기 때문에, 이런 애틋함은 상당히 드물게 경험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대성당 안을 방문하지는 않았다. 그냥 톨레도의 거리 여기저기를 걸어다닐 뿐이었다. 관광객들이 아주 많았다. 그 관광객들 중에, 며칠 전 Pub Crawl 행사에서 마주한 캐나다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조금은 민망한 사실이었다. 눈이 마주치고, 서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리셉션에서 맥주 두 캔을 사서 파라도르로 가는 길에 나섰다. 한 달 간 650km 정도를 걸어 본, 나름대로의 걷기 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이 길도 그리 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3년 전의 내가 헉헉댔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순례길이 끝난지 일주일이 넘었지만, 아직은 걷기의 관성이 남아있는지 오늘은 별 어려움 없이 파라도르까지 걸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순례길의 장면 장면들을 떠올려 보았다. 첫 날의 헛구역질이 생각나, 민망한 마음에 나도 몰래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 정말 아무 것도 몰랐던 그 날.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사랑이든, 길이든, 삶이든, 처음은 왜 다 그렇게 미숙하고 어설픈 것일까. 그 강렬한 '미숙함'과 '어설픔' 때문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별별 기억들만 다 생기게 된다. 떠올리기조차 민망한 그 기억들이, '추억'이나 '웃음거리'가 되거나, 혹은 조금씩 망각되는 걸 보며,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내 삶에도 나름의 '성장'이라는 게 있었구나 깨달을 수도 있는 거겠고. 시덥잖은 생각들을 다 하며 걷다 보니, 파라도르 근처에 도착했다. 마음이 떨렸다. 그래, 여기였어. 여기서 그 아주머니의 오토바이를 얻어 탔고, 저 지붕 아래서 비를 피했으며, 또 비가 조금 그쳤을 때에는 저 도로를 따라 내려 걸어왔지. 그러다 한 아저씨를 만나, 그 아저씨는 아주 비싸 보이는 사진기를 들고 있던 사진가였는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고 그 때 찍은 사진을 몇 년 동안 틈 날 때마다 들여다보곤 했었지. 쉽게 감당할 수 없던 먹먹함 때문에, 살짝 울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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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6_214004_012.jpg 톨레도의 야경. 사진이 너무 별로인 걸.

파라도르는, 스페인어로는 '전망대' 비슷한 단어다. 그래서 '파라도르'는 톨레도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존재한다. 톨레도의 파라도르는, '파라도르' 호텔을 지칭하는 말이다. 언덕의 꼭대기에, 이 전망을 볼 수 있는 호텔이 위치해 있다. 이 호텔로부터 조금 내려오면, 역시 꽤나 높은 바위 언덕이 하나 있다. 나는 오늘 이 곳에 올라 야경을 감상했다. 이미 그 바위 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일몰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맥주는 아까 다 마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네 캔을 사올 걸, 하고 후회했다. 10kg도 매일같이 들고 다녔으면서, 맥주 네 캔 정도야 무거운 축에도 못 낄 텐데. 저녁 9시 반이 되어서야, 해가 지는 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가로등의 불빛이 하나 둘 켜졌고, 이윽고, 내가 그렇게나 간절히 꿈꾸고 바라왔던 마법 같은 순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사랑스러운 야경. 아주 오랜 시간을 보고파 했고, 또 많이 그리워했던 이 야경. 듣고 있던 음악도 끄고, 모든 감각을 이 야경에만 집중했다.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 야경의 아름다움 만큼은 그대로라는 사실이 괜히 고마웠고 뭉클했다. 해가 완전히 질 때 까지, 바위 위에 걸터 앉아, 아주 멍하게, 톨레도를 내려다보았다. 영화 <보이후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걔들이 봤던 게 일출이었나 일몰이었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10년 이상의 성장담의 피날레였던 그 장면처럼, 오늘의 야경은 내 젊음과 여행의 피날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완연한 어둠 안에서 숙소로 돌아오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때 동시에 이런저런 노래들을 들었는데, 그 모든 생각과 감정을 한 마디로 묶을 수 있는 음악이 하나 있었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그 음악이다. 정준일의 '보고싶었어요'다. 정말 보고 싶었고, 정말 보고 싶었던 것을 다시 볼 수 있어서 더 없이 벅찰 뿐이었다. 아주 짙어진 어둠 안에서도, 그 보다 더 짙은 여운으로 따스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