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어, 영국.

리버풀 - 홀리헤드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이렇게 여행의 한 챕터가 마무리 되고

이튿날 배를 타야 해서 항구도시 홀리헤드에 도착했다. 영국의 진짜 마지막 도시다. 항구 도시를 좋아하는 만큼 관광을 잠깐 하려고 했으나, 바람이 정말 어마어마하다. 숙소에 도착하니 주인장 아주머니의 귀여운 강아지가 먼저 반겨주었다. 이제 어뎗 달 된 아이라고 한다. 예전에 키우던 우리 개가 많이 생각났다. 마지막 숙소로는 아늑하고 좋다. 내게 내일 아일랜드로 가는 배를 타느냐고 아주머니가 물었다. 나 같은 여행객들이 이곳에 많이 묵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답했다. 배 시각을 이야기했더니, 그렇다면 조금 늦게 아침을 준비해도 좋겠다며 웃으신다. 그 많은 숙소를 돌아다녀도 못 먹었던 영국 가정밥을 마지막날 아침에야 먹는구나. 결국 해 볼 건 다 해보고 가네.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편하실 때 준비해주시면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도 덧붙였고. 홀리헤드는 구역상으로는 웨일즈 지방이다. 그래서인지 카디프에서 보았던 요상한 언어들이 다시 보인다. 어찌됐든 영국 본토에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웨일즈 지방 모두 각각 두 개 이상의 도시들을 방문한 셈이 되었다. 리버풀에서 홀리헤드로 오는 길은 다소 복잡했다. 중간중간 철도 레일을 공사하느라,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타기를 반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간만큼은 딱 맞추는 엄격함에 조금 놀라기도 했다. 덕분에 아무런 연착 없이 홀리헤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헤매거나, 환승 시스템에 문제가 있거나, 둘 중 하나에 예측 못한 오류가 생겨 분명 연착할 거라 예상하고 아침 일찍 나왔던 게 오히려 민망할 정도였다. 숙소 체크인까지 남은 시간 동안 오히려 홀리헤듸 역의 카페에 앉아 기다려야 했다.


이 여행기의 표지와도 같던 '방랑과 방황의 경계에서'는, 넬의 노래 '한계' 중 '방랑과 방황의 차이'라는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시작을 이렇게 했으니, 앞으로의 표지 제목들 역시 넬의 가사들을 따와 붙여도 괜찮을 듯하다. 일관성도 있고. 방랑과 방황의 경계는 느긋한 여유로움이었다. 이번 여행 대체로 그랬다. 카드프에서 런던으로 뮤지컬을 보러갈 때 빼고는, 특별히 짜증나거나 초조했던 적이 없었다. 때때로 촌각을 다투기도 하는 게 여행이라는 점에서, 장기 여행이 주는 여유는 상당히 포근했다. 기한을 마음대로 늘였다 펼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특히 에든버러 같은 경우는 '방황'하다 '방랑'하게 된 경우에 가까웠는데, 그렇게 갑자기 마음에 쏙 든 도시에서 부담없이 며칠을 더 체류할 수 있어 미련없이 즐길 수 있었다. 남은 여행동안 이 만한 여유는 아마도 다신 없을 테다. 어쨌든 당분간은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게 대부분이니까. 그건 또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을테니, 영국을 너무 많이 아쉬워 하진 않도록 해야겠다. 사실, 50일 가까이 있다 보니 더 이상 아쉬울 것도 마땅히 없긴 하고. 하지만 오늘 기차를 타고 웨일즈 지방의 북쪽을 지나는데, 상당히 예쁜 경관들을 많이 보았다. 버스와 기차를 바꿔 타느라 조금 수고스럽기도 했지만, 그 덕에 기차만 탔다면 하지 못했을 드라이브도 가능했다. 웨일즈 북쪽에는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보았던 것처럼 오래된 성들도 꽤 많았다. 50일 가까이를 영국에 있었음에도, 아직 보지 못한 게 있고, 그래서 다음에도 또 올 만 한 미련이 어쩔 수 없이 남는 게 여행일 지도 모르겠다. 영국이라는 국가에 다시 방문하는 날은 또 언제일까. 그 때도 나의 손에는 편도 티켓만이 들려 있을까. 이 곳에서 아무 문제 없이 50일을 보냈다는 지난 기록이 있다면 이번 입국은 조금 수월하려나. 확실히, 모든 여행은 다음 여행들의 산파다.


여행기를 적으며, 항상 가장 마지막 즈음에는 그 날 그 날의 플레이리스트를 기록하고 있다. 내가 해외 여행을 많이 다녀 본 사람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들처럼 친절하게 하나하나 성심성의껏 정보를 알려주진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하나 추천하는 방법은 이렇게 하루하루의 음악 정도라도 모아보라는 점이다. 누구와 함께 먹었는 지에 따라, 야식 삼아 혼자 끓인 라면과, 함께 간 MT의 아침 날 좋아하는 후배의 숙취 해소를 위해 끓인 라면의 맛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음악 역시도 그런 구석이 있어, 하루하루의 음악만 기억해두어도, 그것만으로 그 날의 분위기와 기억을 상기해볼 수 있다. 플레이리스트에 처음 한 두 곡이 넣어질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게 사실이지만, 그것이 조금 쌓여 일주일 이상의 분량이 되면 플레이리스트를 통으로 듣는 것만으로 머릿속은 나름대로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있다. 아래는 그동안의 셋리스트와 도시들이다. 말하자면 컴필레이션 앨범이랄까. 막상 적고 나니, 상당히 라디오 감성이다. 아마 여행 내내 라디오와 팟캐스트도 징하게 들었기에 그런 모양이다. 어쨌든 이렇게, 조금은 섭섭하고 또 조금은 애틋하게 여행의 한 챕터가 마무리 된다. 아 참, 그 챕터를 정말 마무리 하는, 오늘 하루의 플레이리스트는, 아를의 '그리움이라는 돛을 달고 긴 새벽을 지나'이다. 그리고 안녕, 영국.


1.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순간' (인천-베이징-런던, 지하철에서 내려 눈 앞에 지나가는 빨간 2층 버스를 보고.)

2. Nothing But Thieves, 'If I Get HIigh' (런던, 토트넘 홈구장 근처 펍에서 축구 경기를 본 날.)

3. Coldplay, 'Up&Up' (런던, 그리니치까지 몇 시간을 걸어간 날.)

4. 김진호, '안개꽃' (런던 근교 옥스퍼드, 어디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예뻤던 작은 대학 도시.)

5. 넬, 'Let the Hope Shine' (런던, 램버스 다리에서 7시간 넘게 기다려 새해 불꽃을 본 날. 희망을 빌며.)

6. 로코베리, '나를 위로해' (런던, 전 날 불꽃놀이의 후유증을 견디고 여행하며.)

7. Herz Analog, '바다' (런던 근교 브라이튼,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바닷가의 해질녘, 그리고 굉장했던 필스너 맥주.)

8. 권순관, '우연일까요' (런던 근교 노리치, 우연은 이틀 연속 반복되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던 노리치. 개인적으로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비추천하는 곳.)

9. 넬, '그리고, 남겨진 것들' (런던, 한국에서 가져온 책들 중 하나의 저자인 존 버거를 추모하며.)

10. 가을방학, '곳에 따라 비' (카디프, 런던에서부터 카디프에까지 모든 곳에 비가 내린 날. 이동할 때마다 비가 내린 건 이 때가 시작이었다.)

11. 선우정아, 'City Sunset' (카디프, '카디프 만'에서의 갈대숲과 그 사이사이의 햇살로부터 따뜻함을 느낀 날.)

12. Musical The 'Les Miserables' 中 'Epilogue' (런던, '레미제라블' 뮤지컬 관람 후. 원작 뮤지컬의 아우라와 감동.)

13. 넬, 'Moonlight Punch Romance' (본머스, 달이 비추는 밤바다를 걷다 문득. 여행의 감동은 의외의 순간에서)

14. 정새난슬,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 (런던, 클랩함 정션은 노래가 더 아름답고 좋다.)

15. 찬열, 펀치 'Stay With Me' (런던-맨체스터, 날이 흐려서, 비가 내려서.)

16. 어떤날, '오후만 있던 일요일' (맨체스터, 오전에는 그저 자고, 오후에서야 그나마 움직였던 하루. 이 날 올드트래포드에 방문했다. 마침 경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리버풀. 주변의 펍이 다 닫아서 조금 당황했던 날.)

17. 루시드폴, '사람이었네' (맨체스터, 도시를 이리저리 걷다가 여행에서의 '존중의 가치'를 처음 깊이 고민해본 시간)

18. 전람회, '취중진담' (맨체스터-글래스고, '주님' 위스키를 영접하고)

19. 브로콜리너마저,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글래스고, 등뒤에서 쪽쪽하던 커플들을 저주하며)

20. 좋아서 하는 밴드, '길을 잃기 위해서' (글래스고, 여행이란 굳이 애써가며 길을 잃어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날.)

21. 검정치마, '젊은 우리 사랑' (글래스고, 생각보다 정말 좋았던 이곳을 다음 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퍽 슬펐던 날.)

22, 9와 숫자들, '창세기' (에든버러, 시간이 빚어낸 마법같은 풍경에 넋을 잃었던 하루.)

23. 넬, '그리워하려고 해' (에든버러와 하일랜드 지방, 하룻 동안의 패키지 투어로 마음 편하게 위스키 공장과 하일랜드 지방을 다녀온 날.)

24. 이소라,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에든버러, 펍에서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 유독 따뜻했던 날.)

25. 메이트, '늦은 아침' (에든버러, 조금은 또 유난히 쓸쓸하고, 고독하기도 했던 이 날의 아침.)

26. Birdy, 'People Help The People' (에든버러, '꿈'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깊이 생각해 본 하루.)

27. 캐스커, '세상의 끝' (뉴캐슬,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울컥했던 '영국의 동해안'에서.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곳)

28. Adele, 'When We Were Young' (뉴캐슬-리버풀, 전 날 뉴캐슬의 클럽에서 뜨겁게 놀던 그곳의 내 또래의 남녀들을 잠깐 부러워하고, 생각하며.)

29. Carter Burwell, 'Lovers' (리버풀, 부둣가에 수놓아진 자물쇠들을 보며 어쩐지 모를 쓸쓸함이 들었을 때.)

30. 존 레논, 'Imagine' (리버풀, 'The Beatles Story'라는 박물관을 방문하고, 그들의 음악을 기억하며.)

31. Snow Patrol, 'Run' (리버풀, 비틀즈로부터 문화 컨텐츠 문제까지 다방면으로 고민할 수 있던 날.)

32. 강아솔, '매일의 고백' (리버풀, 여행 중 처음으로 세제를 사서 빨래를 한 날. 어쩐지 현지인이 된 것 같은 묘한 느낌의 하루.)

33. 아가씨 OST,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리버풀, 좋은 어른은 못 돼도 괜찮은 사람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냐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날.)

34. Another Earth OST, 'Forgive' (리버풀, 노예제 박물관을 방문하고, 용서의 주체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며. 남일로만 치부할 수 없던 하루.)

35. 드라마 'W' OST, '해피엔딩이기를' (리버풀, 영국 여행의 피날레로서의 축구 경기를 보고.)

36. 아를, '그리움이라는 돛을 달고 긴 새벽을 지나' (리버풀-홀리헤드, 영국의 끝, 새로운 시작.)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