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리버풀 (2016~2017 세계 여행)
피날레
때때로, 분명 그곳에 있었으면서도 그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내 눈으로 정말 그걸 봤나 싶은 경우인데, 오늘이 그랬다. 게임 화면 속, 아니면 TV 중계가 눈 앞에 그대로 펼쳐진 듯한 광경에, 게임이나 TV는 절대 담을 수 없는 생생한 현장감과 응원 소리까지, 순간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숙소로 돌아와 한국 기사로 경기 결과를 보는데, 기사의 2대 0이라는 스코어는 오늘 느꼈던 총체적인 감흥을 담기에는 정말 역부족이었다. 리버풀 FC의 홈구장 안필드는, 기대만큼 대단했다.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었다. 영국에서의 가장 마지막 일정으로 축구장 관람을 선택하기를 정말 잘했다 싶었다. 물론 승패에 상관없이 그저 분위기를 즐기고 오려고 했고, 실제로 리버풀이 요즘 워낙 하락세였기에 토트넘을 상대로 이길 거란 기대도 별로 안 했지만, 어쩐 일인지 전반 초반에 두 골을 넣었고, 그 리드를 그대로 굳히며 승리를 거뒀다. 골이 터질 때 주위의 관객들과 아주 큰 소리를 질렀다. 당분간은 쉽게 잊을 수 없는 함성이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를 실제로 관람하는 건, 상당히 어렵다. 일반 관광객들에게 풀리는 표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순위 싸움에서의 중요한 경기를 비롯하여 평소와는 조금 더 특별한 매치업이라면, 일반표를 구하기는 더더욱 지난하다. 이는 '충성도'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제도에서 기인한 건데, 우선 예매 혜택은 이들 시즌권 구매자들에게 돌아간다. 여기까지는 무슨 스포츠든, 또 어디든 다 똑같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즌권 구매자 다음으로는, 전년도에 몇 경기를 홈에서 봤는지를 기준으로 구매자 순위가 결정된다. 이번 토트넘과의 경기 같은 경우는, 지난 시즌에 안필드 홈구장에서 최소 2번 이상 경기를 관람한 사람들만이 우선적으로 경기를 예매할 수 있었고, 일반 표는 아예 풀리지도 않았다. 안필드는 고사하고 해외에 나가는 것 조차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나 같은 경우에는 택도 없는 조건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경우의 수는 몇 가지 없다. 첫 번 째는, 조금은 관심도와 중요성이 떨어지는 경기를 선택하는 것. 이 때는 일반표가 비교적 많이 풀린다고 한다. 하지만 나름이나마 이름이 많이 알려진 두 팀의 경기를 보고 싶다면, 돈을 합법적으로 많이 내거나, 아니면 돈을 불법적으로 많이 내는 수밖에 없다.
'불법'의 경우부터 먼저 설명하자면, 한국에서도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한 '암표'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는, 다른 이의 시즌 티켓을 경기 직전에 받아서 관람한 다음, 다시 끝나고 그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단속이나 경기장 내에서의 개인 신상 대조에서 들킬 위험이 있어 그렇게 안전하지는 못한 방식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가격도 아주 싼 편도 아니고. 게다가 당일날 되어서야 암표를 구하겠다는 작전이니, 실컷 이 날 축구를 보겠다고 계획해놓고서도 정작 허탕만 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런저런 위험사항들을 고려하여, 나는 불법은 진작 포기하고 오직 '합법'적인 지불 방식에만 집중했다. '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구매대행 사이트를 이용하는 것이고, 두 번 째는 구단 티켓팅 홈페이지에서의 '접대(Hospitality)'를 이용하는 옵션이다. 나는 '접대'를 선택했다. 이게 조금 더 확실해보였고, 구매대행 사이트와 가격 차이도 그리 많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접대'라는 단어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홈팀과 제휴를 맺은 홈구장 내의 라운지나 바, 아니면 근처의 호텔에서 식사와 음료를 제공하고, 이 후에 경기를 보는 일종의 '투어'다. 장점은 확실하다는 거고, 단점은 비싸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값 보다 오늘의 축구 티켓값이 더 나갔다. 시즌권 멤버십도 없고, 지난 해에 두 번 관람하지도 않았으니, 웃돈이라도 주고 보겠으면 보라는 의미다. 이마저도 빅게임이면 대부분이 매진되어 구하기 힘들다. 따라서 나는 몇 주 전에 이 티켓을 손을 떨어가며 구매했고, 그후 오늘까지 내내 패스트푸드를 영혼의 동반자로 삼고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안필드는 내 숙소에서 걸어서 1분인데, 축구를 보기 위해서는 여기서 버스를 20분 타고 시내에 있는 힐튼 호텔로 간 뒤, 거기서의 전용 버스를 이용하여 다시 안필드로 돌아와야 했다. 집 앞의 잠실 야구장에서 경기 한 번 보려고 2호선을 쭉 타서 시청 앞 플라자 호텔로 간 다음, 거기서 다시 버스로 잠실로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돈은 돈대로, 시간도 시간대로 비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50일 가까이 있어놓고 축구를 한 번 안 보는게 말이나 되나 하는 마음에, 그리고 이왕이면 이름이 좀 많이 알려진 팀의 경기를 보고 싶은 심정에, 정말 눈물을 머금고 오늘 경기를 골랐다. 힐튼 호텔 리셉션 옆에, 빨간 옷을 입은 두 직원이 보였다. 아마 오늘의 '접대' 투어를 여기서 접수하는 모양이었다. 자꾸 '접대' 접대' 하니까 조금 이상한데, 이건 식사라는 의미의 접대다. 영어 단어 'hospitality'를 번역하면 '접대, 환대, 후대'라고 나온다. 어떠한 왜곡도 없이 그 의미 그대로다. 어쨌든. 그들로부터 티켓을 수령했다. 마치 찰리윙카의 초콜릿 공장으로 가는 황금 티켓을 받은 듯했다. 실은 내 돈내고 가는 건데. 식사장으로 향했고, 음료 바우처를 내밀자 몇 가지 음료를 선택할 수 있었다. 맥주, 오렌지주스, 탄산음료 등이 있었으나, 어쩐지 비밀스런 파티에 초대받은 느낌을 내기 위해 스파클링 와인을 골랐다. 마치 주말마다 이런 파티에 가는 양, 손가락 두 개로 잔을 잡고 새끼손가락은 재수없게 삐쭉 세웠다. 어쩐지 그게 도도해 보일 것 만 같았다.
식사는 코스 요리로 진행됐다. 전채, 메인, 그리고 디저트였는데, 생각해보니 이런 수준의 코스 요리라도 먹은 마지막 기억이, 아마 런던으로 올 때의 비행기 기내식이었던 것 같다. 아, 거기도 그냥 도시락처럼 한 통을 주고 음료만 몇 번 따라주니 코스는 아니겠구나. 그렇다면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의 코스 요리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흐음. 맛있었다. 맛있어야 했다. 맛있지 않으면 울어버릴 수도 있었다. 다행히 맛이 좋았다. 전채는 상큼했고, 함께 나온 야채와 살사소는 의외로 잘 어울렸다. 메인 요리는 치킨 요리였다. 스테이크를 기대하고 가서 조금 실망하기도 했지만, 오늘의 상대팀 토트넘이 '닭'과 연관된 팀이어서 그런지 치킨 요리가 나왔다. 토트넘과 닭이라. 축구 경기의 에이스는 등번호 7번이나 10번을 받고, 손흥민은 토트넘에서 7번 선수고,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그래서 요즘 시국을 반영하여 닭, 은 물론 아닐 것이고, 그냥 이 팀의 상징이 그렇단다. 크림소스와 함께 나온 닭가슴살 튀김 요리였는데, 그게 의외로 잘 어울렸다. 당연히 잘 어울렸겠지. 한국에도 까르보나라 치킨이라고 있으니, 그것의 조금 고급스러운 버전일 뿐 아주 새로운 조합은 아닐테니까. 전혀 새로운 요리는 아니었음에도 어쩐지 아주 맛있는 느낌을 받았다. 맛있어서 맛있었던 건지, 맛있어야 했기에 맛있었던 건지는 정확히 잘 분간은 안 되지만, 그래도 돈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맥주 한 잔을 더 마시고 말끔하게 디저트를 비운 뒤, 안필드로 향했다. 경기장 근처에서 버스가 멈췄고, 차량까지 통제된 도로를 오늘의 전우들과 함께 걸었다. 아, 아직 경기 시작은 아주 멀었지만 어쩐지 우리가 승리할 것만 같은 근거없는 자신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건 역시 내가 그 비싼 돈을 내고 몇 날 며칠을 KFC와 맥도날드로 돌려막기 했던 한이 서려서, 는 물론 아닐테고, 그냥 리버풀이 이기기를 우주의 기운을 모아 간절히 응원했을 뿐이었다. 찬찬히 경기장을 둘러본 뒤, 내 좌석이 있는 쪽의 게이트로 향했다. 안필드의 경기장 외관 자체가 그렇게 특별할 건 없었으나, 그래도 벽면에 적힌 리버풀의 로고와 'You'll never walk alone'이라는 그들의 문구로 바로 이곳이 안필드임을 잘 알 수 있었다. 경기장 한 편에는 힐스버러 참사로 희생된 선수들을 추모하는 비석도 있었다. 축구계 최악의 비극들 중 하나로 불리는 참사다. 잠시 숙연한 마음을 갖고, 경기장 내부로 향했다. 친애하고 사랑하는 잠실 야구장에서 어떤 부분이 제일 좋냐고 묻는다면, 나는 경기장에 입장하여 작은 게이트들 사이로 조금조금씩 그라운드가 보일때라고 대답할 것이다. 오늘도 그런 느낌이었다. 내 좌석은 226블록이었고, 228, 그리고 227 블록을 지나며 얼핏 내부가 보였는데, 심장이 미칠듯 두근대었다. 그제야 리버풀의 홈경기를 보러 온 게 조금씩 실감났다.
자리는 골대 뒷 편이었다. 좌석 배치표 상으로만 보면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나, 축구 전용 구장인만큼 경기장과 관객석의 거리가 짧고, 또 시야에 방해되는 것도 없어서 더없이 괜찮았다. 게다가 전반전에는 리버풀이 내가 앉아있는 쪽으로 공격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만 보면 그때 두 골이 모두 터지고, 또 이런저런 골찬스들도 많이 생기며 더욱 흥미진진하게 경기 분위기를 느꼈다. 경기 전에는 토트넘 선수들이 이 쪽에서 몸을 풀었는데, 그 중에는 손흥민의 모습도 보였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우리는 왜 이런 인연으로 이곳에' 비슷한 영조의 대사가 떠올랐다. 아, 흥민이형, 나는 오늘 형네 팀을 응원할 수 없어. 미안해. 대신 후반전에 이쪽으로 골을 넣으면 마음속으로는 크게 좋아할게. 하지만 여기를 봐봐. 죄다 리버풀 팬이야. 소리를 내면 내 신상이 괜히 위험해질 것 같지 않아? 나는 오늘 만큼은 리버풀 팬을 하기로 했어, 따위의 닿지도 않을 내적 대사를 마구 읊었다. 그래도 영국까지 와서, 이곳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는 우리나라 축구의 에이스를 직접 볼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그가 선발 출장한 것도 내심 뿌듯했고.
경기는 아주 빠르고 치열하게 흘렀다. TV에서 볼 때 보다 리버풀 선수들의 전방 압박이 더 거셌고, 그 결과로 두 골이 만들어졌다. 방금 한 번 축구 전문가 흉내를 내봤다. 그래도 그 돈 주고 거기까지 가서 경기를 보고 왔는데 무슨 코멘트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경기 코멘터리는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안필드의 좌석은 오늘 역시 매진이었고, 이들의 함성과 노랫소리가 정말 컸고 감동적이었다. 특히 경기 시작 전 머플러를 들고 'You'll never walk alone'을 함께 부를 때는, 이곳이 거대한 찬양 집회장이 된 줄만 알았다. 선수들의 작은 플레이 하나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격한 몸짓으로 반응했고, 그 때마다 이런저런 구호들로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골이 터졌을 때는 말 할 것도 없고. 특히 연속골에 가까울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추가 골이 터졌는데, 경기 전체의 승기를 확 뺏어오는 골이라 응원하는 함성 소리도 상당히 컸다.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스타디움 전체를 울렸는데, 그 순간에 함께 있다는 사실자체로 조금은 전율이 돋았다. 역시 이것이 홈구장의 장점이구나 싶었고. 서울에 살면서도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는 나는, 원정팀을 소외시키고 박해하는 홈 팀만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매 번 그걸 당하기만 하다가, 오늘처럼 내가 홈팀이 되는 날에는 그렇게 신이날 수가 없다. 아무래도, 선천적인 S성향인 것은 맞는 듯하다.
영국 여행의 피날레로서는 더없이 좋았던 선택지였다. 한국으로 돌아가도, 어쩌다 우연히 술집에서 틀어놓은 프리미어리그를 볼 때 마다, 아니면 잠이 안 오는 새벽 이리저리 TV 채널을 돌리다가 리버풀의 경기를 발견할 때 마다, 나는 오늘의 안필드를, 리버풀을, 그리고 영국을 자연스레 떠올릴 것이다. 응원하는 구단의 스포츠 경기장에 직접 방문한 기억은 상당히 오래 남는다. 나는 말했다 시피 삼성 라이온즈의 골수팬인데, 대구구장에 간 건 딱 한 번, 그것도 무려 14년 전임에도 아직 소중한 추억으로 잘 간직하고 있다. 오늘의 축구 경기는 경기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었지만, 내게는 오직 편도 티켓만 가지고 생각 없이 떠난 이 무모한 여행의 시발점이었던 영국의 화려한 피날레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영국에서의 크고 작은 고된 일들과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축구'라는 매개채로 평생을 떠올릴 수 있게 되어 유난히 애틋하기도 하다.
내게 영국이란, 아주 많은 맥주를 마셨고, 그 맥주가 질릴 때 즈음에는 한 병씩 와인을 마시기도 했으며, 몇 모금의 위스키도 마셨고, 한 번의 축구를 봤으며, 그 한 번의 축구를 보기까지 역시 아주 많은 햄버거들을 먹었고, 꽤 많은 거리들을 걸어다녔으며 그 들 중 한 곳에서는 아주 잠깐이지만 노래까지 불렀던 곳이다. 여행의 시작지여서 많이 서투르고 헤매기도 했으며, 때로는 더 이상 헤매지 않는 나를 보며 미약한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새해를 맞은 첫 국가도 생각해보니 영국이다. 내일은 아침부터 조금 서둘러야 해서, 대부분의 짐들을 미리 다 싸놓았다. 그 모든 짐 위에 오늘 구매한 리버풀의 목도리를 올려놓았는데, 주책맞게도 이게 괜히 시큰하다. 이전에 도시에서 도시로 넘어갈 때는 여행의 한 페이지가 끝나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한 챕터가 마무리되는 듯하다. 오늘 이후로는 또 다른 챕터 아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쓰여지겠지만, 그건 다 '영국'이란 첫 챕터가 있기에 여행 안에서의 맥락이 있는 걸테니.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드라마 W의 OST였던, 정세린의 '해피엔딩이기를'이다. 리버풀도, 리버풀 축구팀도, 그리고 부디, 남은 내 여행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