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더블린 (2016~2017 세계 여행)
스스로를 동기부여하는 방법을 내내 연습하는 중
혼자 다니는 여행인지라, 음식을 주문하거나 숙소를 방문할 때 빼고는 누구와 말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어제 밤에는 호스텔 같은 방의 투숙객들과 함께 '비정상 회담' 아닌 '비정상 회담'을 빙자한 수다를 벌였다. 무려 영어로. 여기까지만 보고 오 대단하다,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비정상 회담 프로그램에서도 자막이 없다면 전달이 불가능한 한국말을 하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대사는 별로 없고 고개만 끄덕거리거나 타이밍을 살펴 웃음을 짓는 사람들을, 우리는 '병풍'이라 부른다. 나는 다행히도 완전히 대사 없는 병풍은 아니었다. 다섯 명 밖에 안 되는지라 내가 말 할 때는 다들 귀를 집중해주곤 했다. 이건 확실히 배워야 할 대화 태도다. 조금은 지루하거나 제대로 이해가 안 될 지라도 끝까지 집중해주는 자세. 물론 내게는 이런 미덕이 별로 없다. 그래서 애들을 별로 안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고.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정확히 하자.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많은 이야기를 알아 들으려고 노력했으며,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어드밴티지로 단독 발언권을 가끔 얻기도 했다. 한 프랑스인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바로 <가장 따뜻한 색, 블루>라고 했더니 나에게 '귀엽다(You are so cute)'라며 웃었다. 더블린에 도착한 지 반 나절도 안 되어 벌써 그린라이트가 켜지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래도 그 영화를 보고 엄청난 감동을 받았고 끝부분에는 조금 울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들과의 정서적인 격차를 조금 줄여나갈 수 있었다. 이게 바로 문화의 힘일지도.
오늘은 11시가 넘어서야 호스텔을 나와 본격적으로 관광을 시작했다. 해가 지고, 날이 조금 어두워지기 시작하기 전까지, 더블린은 솔직히 말해 기대한 것에는 못 미쳤다. 나라를 옮겨왔다는 사실에 너무 큰 의미부여를 한 듯 했다. 정작 도시 자체는 영국의 어느 대도시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제의 수다 타임에, 어떤 프랑스인이 전 세계의 대도시들이 특색을 잃어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 수다라고 하기에는 조금 대단한 주제들이 오갔던 시간이기도 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오바마나 트럼프, 그리고 힐러리와 같은 미국의 정치인들부터 그 동안 미국이라는 국가가 자행했던, 혹은 자행하고 있는 이런저런 비인간적인 폭력들과 그것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 매스미디어의 문제점 등. 각 나라의 독재자들과, 무엇이 위대한 지도자와 독재자를 나누는가에 대한 기준까지. 이걸 한국어로 말했더라도 어려운 주제인데, 이 사람들은 각자의 논리로 어쨌든 끊임없이 주장하고, 또 반박하고 동의하면서 토론을 진행했다. 프랑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나 <다가오는 것들>을 보면 이 나라는 아주 어릴때부터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발언과 토론을 권장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걸 볼 수 있다. 비록 그것이 논리적으로는 조금 결함이 있는 의견일지라도, 어쨌든 문장을 시작하여 끝맺음까지 지을 수 있는 건 그동안의 경험과 교육이 없다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우선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게 그리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거기에 글이 아닌 말의 특성상, 주제 의식이 흐트러지거나 논점을 일탈하기 쉬운데 그걸 방지할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 있다는 소리일테니. 그런 점에서는 이들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더블린에서의 호스텔은 '칼리지 스트리트(College Street)'에 위치해 있다. 한국말로 하면 '대학로'일텐데, 대학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 젊음의 요람이니 어쩌면 굉장한 일이 이곳에서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품고 숙소를 나섰다. 그러니까 이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기타를 잡고 'Falling Slowly'의 한 구절, 'Take a sinking boat'를 부르고 있으면, 내가 그 사람의 옆에 가서 'And point it home'을 하면 되는건가 싶었다. 나는 리버풀에서 비틀즈가 공연했던 무대에도 서 본 사람이니까, 뭐 여기까진 음악가의 직업윤리고. 그렇게 우리가 듀엣을 부르면, 그게 바로 <원스> 아니겠는가 싶었고. 서울 최고의 유흥가 신촌에 있는 학교를 지금껏 다니면서도, 나는 아직 이런 헛된 기대를 한다. 신촌에서의 갑작스러운 만남은 신천지 사이비들 이 외에는 무엇도 없었다. 그래도 이런 소박한 기대감이라도 품고 다녀야 여행이 조금은 더 재밌다. 물론 여행이 좋기는 한데, 이게 매 순간마다 다 좋은 건 또 아니라서, 가끔은 외롭고, 회의감도 들고, 또 무기력할 때도 있다. 혼자 다니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방해받지 않는다는 건 참 좋으나, 그런 무력함을 상쇄해줄 서로가 없다는 것은 살짝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좋게 말하자면 스스로를 동기부여하는 방법을 내내 연습하는 거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헛될지도 모르는 상상들이다. 몽상, 혹은 공상에 가깝기도 하지만, 영화 <라라랜드>에서 엠마 스톤이 노래까지 부르며 얘기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바보처럼 꿈꾸는 이들을 응원한다고. 꿈이라는 게 아주 거창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운명의 누군가를 만나 내 인생의 <원스>를 찍어보겠다는 것도 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꿈이라는 건 그리 쉽게 이루어질 수 없기에 꿈이다. 꿈이 꿈인 이유는, 쿨쿨 자며 꿈을 꿀 때가 아니면 도저히 현실감과 성취감을 맛 보기 힘든 데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런 측면에서도 <원스>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상상은 '꿈'에 적합했다.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소득은 있었다. 우선 오후 즈음 해질녘이 되어 걸어간 구시가 쪽은 꽤나 예쁜 편이었다. 오후가 되니 이 곳 더블린에 기대했던 풍경이 조금은 연출되기도 했고. 사람들이 하나 둘 씩 기타를 잡고 거리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돈을 받는 그들의 기타 케이스에는 '허가증' 비슷한 것들이 있었는데, '세미 프로' 정도는 되는 뮤지션들이라 그런지 노래들이 상당히 좋았고 거리와 잘 어울렸다. 그 사람들이 너무 촘촘한 간격으로 위치해 있어 왼쪽과 오른쪽 귀에 다른 소리가 들렸다는 게 문제긴 문제였지만. 오늘 가장 좋았던 순간은 사실 점심 식사였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중국 음식 뷔페를 발견했는데, 차마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거기서 정말로, 가장 마지막의 아이스크림을 제외하고는 모든 음식을 육류로 채웠다. 매콤한 요리들도 몇 개 있었는데,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 매운 것에 대한 갈증이 조금 있었다. 햄버거에 핫소스를 아무리 뿌려대도 뭔가 부족한 매운 맛이었는데, 오늘 그 갈증이 조금 해소됐다. 정말 어마어마한 고기들을 먹었다. 고기만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고기는 맛있는 놈이었다. 이 정도 먹었으면 아마 내일 아침까지는 배 고플 일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을 했다. 조금은 느끼한 중국 음식과 아이스크림이라니. 조합이 꽤 괜찮았다. 오직 육류만을 섭취하느라 딤섬이나 볶음밥 등 다른 메뉴들에는 손을 대지 못한 게 조금 아쉽다. 내일 모레쯤 다시 한 번 가야지. 그 때는 조금 더 균형잡힌 식사를 할 수 있기를.
교통 체계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더블린은 영국의 연장선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수 많은 세월 동안 영국의 지배 아래 있던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고. 생각해보니 어제 우린 이 이야기도 했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관계, 그리고 남북한의 분단 문제와 북한의 핵 위협 등. 참 많은 것에 관심이 있고, 또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더블린이라하면 <더블린 사람들>이란 소설이 유명한데, 물론 유명하다고 해서 내가 읽어봤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어쨌든 내게 있어 <더블린 사람들>이라 하면 어제 함께 수다 아닌 수다를 떨었던 이들이 먼저 떠오를 듯하다. 그 느낌을 기억하기 위해 저 책은 안 읽어야지. 절대로 책 읽기 싫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침 책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50일을 육박해가는 이 여행기간동안 나는 단 한 페이지의 책도 읽지 않았다. 장강명 작가의 조언에 따라 여행 중에 읽기 좋은 책들을 나름대로 엄선해서 가져온 건데, 그 전에 먼저 생각했어야 할 건 내가 정말로 이 책들을 가져가서 읽을 의지가 있는지 여부였다. 책을 가져왔다는 사실 조차도 계속 잊고 지내다가, 아일랜드로 넘어오기 전 짐정리를 할 때 책들이 가방 구석에 쳐박혀 쭈그러져 있는 안쓰러운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미안. 그래도 주인 덕에 해외 여행은 하잖니. 그리 많진 않지만 어쨌든 내 방 책상 위에 놓인 다른 책들에게 귀국 후 자랑할 수 있을 거야. '토이스토리'도 있는데, '북스토리'라고 없을 이유는 존재하지 않잖아? 내 뒷담화는 살살하기를 바라.
조금은 실망하기도, 또 조금은 기대감을 갖기도 한 하루였다. 그러면서도, 여행지 자체의 매력이 여행의 만족도와 아주 적확히 일치하는 건 아님을 새삼 느끼기도 했다. 어제의 사람들 덕분인지, 아니면 오늘 우연히 발견했던 중국 음식 덕분인지, 전반적인 기분은 좋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시규어 로스(Sigur Ros)의 'Von'이다. 음, 이들의 음악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시규어 로스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느낄 수 없는 매력이나 감정이 괜히 고픈 순간이 있다. 그래서 보통은, 음악들을 랜덤재생할 때 이들의 음악이 나오면 다음 곡으로 넘기다가도, 아주 어쩌다는 꼭 찾아들어야 하기 때문에 지우지는 않고 있다. 글자와 말로 쉽게 형용될 수 없는 이 밴드의 매력인데, 오늘 여행의 전반적인 감정과 기분이 '시규어 로스' 같았다. 따라서 걸어다니며 이들 음악을 많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한 국가 수도의 한복판에서 아이슬란드 대자연의 초연함이 찾아오는 이질감이 들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