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더블린 (2016~2017 세계 여행)
쓸쓸함을 깊게 느껴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
어제 저녁에는 호스텔로부터 무료 와인과 치즈가 제공되었다. 무료 와인과 치즈였던 만큼 입만 축이는 정도의 소량이었다. 기분을 내려고 함께 올라간 호스텔 같은 방의 투숙객들과 나는 다소 아쉬운 기분만 간직한 채 다시 방으로 내려와야 했다. 그리 많은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우리 방 프랑스인 세 명에게는 굉장히 신나는 밤이었다. 와인은 부족했지만, 이들 국가의 축구 클럽 파리 셍제르망이 스페인 명문 구단 바르셀로나를 4대 0이라는 믿을 수 없는 점수 차이로 대파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때때로 도무지 믿기지 않은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곤 한다. 이런 결과를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잘 해봤자 신승일 정도로 힘든 경기가 될 거라 프랑스인 본인들도 예상했지만, 뜻 밖의 성과에 우리 방 무리 다섯 명 중 세 명은 아주 기분이 좋은 듯했다. 전 날 처음 만나, 겨우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묘한 애틋함이 피어났다. 그 애틋함은, 나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이 모두 다음 날 체크아웃해야 한다는 사실로 더욱 증폭되었다. 우린 우리로서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우린 호스텔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Temple Bar'였다. 구글에 더블린을 검색하면, 'Temple Bar'는 가급적 가지 말라는 조언이 나온다. 그 유명세에 비해 술 값만 더럽게 비싸고, 또 사람은 굉장히 붐비기에 별로라는 점에서였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 날에도 명동 거리에 나가는 사람들이 있 듯, 단 한 번도 가보지 않기에는 그만큼 유명한 펍이기도 했다. 그 곳을, 우리는 함께 향했다.
든든했고 즐거웠다. 짧은 시간동안 다소간의 정이 든 이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나서니 늦은 밤이었음에도 그렇게 긴장되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되도 않은 영어였지만 열심히 떠들었다. 전날의 수다처럼 거창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밤의 거리를 걸으며, 이번에는 조금 더 수다다운 수다를 떨었다. 술 이야기나, 시시껄렁한 농담들, 그리고 '이 후'를 기약하는 언어들. 나의 말이 정확히, 또 의구심 없이 모두 전달되었을 리는 없다. 역시 마찬가지로 나도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정확히, 또 어떤 의구심 없이 이해하지는 못했다. 말과 글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무기이자 장점이겠으나, '감정'은 언어라는 세계의 한계를 초월하곤 한다. 비슷한 정도의 유대감과 애틋함은 굳이 입을 떼고 표현하는 걸 불편하지 않게 도와주었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Temple Bar'가 있었다. 듣던대로, 사람도 정말 많았고 맥주값도 비싼 편이었다. 음악이 연주되는 라운지에서, 우린 각각 기네스 한 잔 씩을 들고 서있었다. 만 24시간이 겨우 넘은 이 인연도 나름 또 인연이라고, 좁은 면적에서 서로의 몸을 가까이 하며 기념사진도 찍었다. 한 명씩 각자의 스마트폰에 우리의 모습을 차례로 담았다. 서로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진들일테지만, 생전 모르던 사이인 우리가 더블린의 이곳에서 함께 공유한 이 시간이 각자 만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랐다. 'Temple Bar'에서는 그리 오랜 시간을 머무르지 않았다. 그럴 만한 곳도 아니기는 했다. 몹시 붐볐고, 그래서 답답했으며, 숨쉬기도 조금은 불쾌할 정도의 환경이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다음 날 오전 체크아웃을 해야 했기에, 마음껏 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벅저벅 같은 길을 걸어 호스텔 근처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역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려고 애썼다. 약간의 취기를 통해 조금 더 거리낌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밤이 마무리되는 게 못내 아쉬웠던 우린, 결국 호스텔 바로 옆의 펍에서 딱 한 잔 씩을 더 하기로 했다. 한국에 오면, 프랑스에 가면, 뭐 이런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나누며 술자리는 끝났다. 다시 들어온 방은 다른 이들이 취침하고 있던 관계로 어두컴컴했고, 아주 조용히 '굿나잇'을 서로에게 속삭이며 하루를 마쳤다. 그리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기분으로 꽤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50일 가까이 혼자 다니고 있는 여행에 다소 무기력함과 허무함, 혹은 회의감이 조금씩 들곤 했는데, 이날 밤의 '너무 짧았던' 술자리로 모든 게 해소되었다. 실질적으로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사실상 처음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투어를 신청한 적은 있었지만, 그건 다 투어라는 수단에 함께한 일행들이었지 '같이'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하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각자의 고향과는 아무 상관없는 더블린의 한 호스텔 방에서 만나 그 순간을 만끽한 건 굉장히 색다르면서도 따뜻한 경험이었다. 똑같이 어쿠스틱한 음악을 연주하는 펍이더라도, 아는 사람들과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또 웃으며 노래를 따라부르는 건 혼자 있을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랬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게 몹시 아쉬워, 오늘 아침 차례로 작별을 고하면서도 괜히 시큰해졌다. 남은 여행이 많고, 다른 곳에서 이와 비슷한 '함께'의 경험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남은 '함께'들은 어제의 첫 '함께'에 언제나 비교될 테다. 원래 처음은 그런 거니까. 그 처음을 같이 보낸 사람들이 어제의 그들이란 게 무척 기뻤고, 그래서 그들과의 작별은 슬프기까지 했다.
공허함에 가까운 마음으로 아침을 보냈다. 김동영 작가의 <당신이라는 안정제>라는 책 제목이 문득 생각났다. 어제의 그들은, 또 그 사람들과의 순간은, 어쩌면 슬럼프나 권태에 빠질지도 모를 여행을 구원해준 '각성제' 같았다. 반가움, 고마움, 아쉬움 등이 모두 함께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아침을 통째로 다 보낸 후에야 겨우 오늘의 여행을 준비했다. 이런 허전함에는 술이지 하는 마음에, 는 아니고, 아마 더블린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들 중 하나가 '기네스 스토어하우스'라서 별 생각없이 그 곳까지 걸어갔다. 아일랜드의 대표 흑맥주, 기네스 공장 근처에 있는 '기네스 박물관' 같은 곳이다. 조금 흐렸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의 더블린은 아주 청명했다. 길을 아주 잘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라서, 나는 강을 따라 관광지들이 들어서고 발달한 도시들을 조금 더 선호하는 편이다. 쉽게 말해서 강을 따라 왼쪽으로 가냐 오른쪽으로 가냐만 판단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강의 왼쪽으로 주욱 걸으면 되었다. 거리가 조금 있긴 했으나 더블린이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기 때문에 천천히 걷다 보니 근처에 다다랐다. 다른 나라들을 다닐 때마다 서울이 얼마나 큰 도시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도시의 규모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넓이 자체도 정말 넓은 도시다. 그걸 감안하면 서울의 대중교통 체계는 정말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다. 지하철과 버스의 연계도 잘 갖추어져 있고. 생활하기에는 참 편리하다. 여행지로서의 매력도가 조금 떨어지는 게 아쉬운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프라는 참 괜찮은데. 인프라 인프라거리니까, 야구 해설하는 어떤 누군가가 갑자기 떠오르기도 한다. 두 달 정도 있으면 야구가 개막하는데, 올 해는 작년보다 조금 나아질 수 있을지.
기네스 스토어하우스의 입장료에는 기네스 한 잔을 시음할 수 있는 바우처 값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게 이 곳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고. 사실 그 파인트 한 잔을 시음하기 직전까지, 내 눈을 가리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이동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나는 산지 직송에 가까운 기네스를 시음하려고 온 것이니. 일부 맥주 애호가들에 따르면, 맥주가 현지에서 한국까지 운반되는 과정에서 정말 미약하게나마 맛이 변하기 때문에 최고의 풍미는 오직 산지에서만 느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혀가 그 정도로 예민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 아일랜드에서 직접 기네스 마셔봤다' 정도의 뿌듯함은 앞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다. 사실 박물관이 뭐 별 거 있겠어 하는 마음이었는데, 어머나, 별 게 있었다. 기네스의 재료를 소개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큐레이팅에 감탄할 정도였다.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언제나 참 흥미롭다. 언제나 재료는 참 단순하다. 보리, 홉, 물 등 정말 몇 가지 안 되는 이 몇 가지 재료들이 아주 엄격한 과정과 절차를 거쳐 그 깊은 맛을 내는 맥주로 탄생한다고 생각하니 새삼 경이롭기도 했다. 물론 단순하다고 하기에는 그 재료들도 굉장히 까다롭게 엄선된 것들이기는 하지만. 기네스 스토어하우스 곳곳에서는 자신들의 맥주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기네스라는 맥주가 세상에 탄생한 지도 어언 200년이 훌쩍 넘었다. 그토록 긴 역사동안 기네스는 한결같이 깐깐한 판단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밀었고, 그 결과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흑맥주들 중 하나가 되었다. 흑맥주를 처음 먹을 때는 굉장히 낯설고, 또 조금은 쓴 맛도 느껴지지만, 그 특유의 향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이것을 주로 찾게 된다. 기네스는 더블린을 목적지로 선택했던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였다. 물론 기네스가 없더라도 더블린에는 왔을 테지만, 그 기대감은 많이 달랐을 테다.
아일랜드는 기네스의 나라고, 또 수많은 문학가들의 요람이기도 하다. 그 위대한 문학가들과, 또 거리의 예술가들이 이 기네스를 마셨을 거라 생각하니 어쩐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나도 여행 내내 글을 쓰고 있고, 또 리버풀에서는 무대에까지 오른 경험이 있는 예술가 아닌 예술가니, 이것 참 안 마실래도 기네스를 마실 수밖에 없겠구만.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듯한 말도 안 되는 느낌이라도 조금 느낄 수도 있고. 물론 헛소리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다시피 혼자 여행을 하며 헛소리와 공상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극히 드물 테다. 그런 게 없다면 무척이나 지겨울 테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영화 <킹스맨>에서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던 콜린 퍼스가 동네 양아치들을 응징하기 직전에 마신 술도 기네스였다. 관우가 차 한 잔 식기 전에 적장 목을 벤 것과 비슷한 무용담이었다. 그런 잡생각들을 하며 화살표를 따라가니 시음 장소가 나왔다. 그래, 여기는 이 순간을 위해 방문한 것이지. 하얀색 방에 들어가자, 직원이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다. 위스키 잔 사이즈에 샘플을 담아주며, 기네스를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그걸 요약하자면 혀 끝에서 끝까지 천천히 음미하면서 즐겨라였는데,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성시경은 맥주는 목으로 마시는 거다라고 말 한 게 생각나기도 했다. 물론 청량감과 시원함은 맥주와 절대 괴리될 수 없는 미덕들일테지만, 기네스처럼 풍미가 깊은 맥주는 입, 아니 혀로 마시는 게 더 나을 듯했다. 사실 이미 스코틀랜드에서 이번 여행동안 마신 술들의 '최고존엄'이라 부를 만한 싱글몰트 스카치 위스키를 몇 잔 마시고 지금도 그 고결한 향을 잊지 못하고 있지만, 기네스의 향도 참 깊고 그윽하다. 그렇게 작은 잔의 샘플로 연습을 마친 뒤, 본격적인 시음을 위해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여기서는 생전 처음으로 생맥주 기계로 맥주를 내려먹는 경험을 했다. 어떻게 하면 완벽한 기네스를 뽑을 수 있는지 잠깐 강의를 들었고, 실제로 생맥주 기계에서 기네스를 내려보았다. 맥주를 만드는 절차만큼, 잔에 기내스를 내리는 것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깨끗한 잔을 준비하여, 잔의 기네스 마크가 앞을 향한 상태에서 45도 각도로 기울이고, 그 마크까지 1차적으로 맥주를 담은 다음에 조금 시간을 두고 기다린 후, 이후에는 산소가 없는 맥주 원액을 수직으로 부우면 마침내 흰색 거품이 살짝 일어있는 그럴싸한 기네스 파인트 한 잔이 완성된다. 생각해보니 여행동안 꽤 많은 기네스를 마셨었는데, 그 때 마다 술집의 점원들이 이 비슷한 절차들을 거쳤던 듯한 기억이 났다. 다들 자신의 직업윤리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정성에 경의를. 완성된 기네스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시음을 시작했다. 음. 이 깊은 풍미. 이 맛있는 흑맥주를 왜 몇몇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복음이라도 설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국에서의 생맥주는 단 몇 종류로 제한되는 게 조금 아쉽다. 기네스는 특히, 캔 보다는 생맥주가 몇 배는 더 맛있는 맥주다. 물론 어느 맥주나 안 그러겠냐 만은. 영국이나 아일랜드의 펍에는 최소 네 다섯 가지의 생맥주들이 비치되어 있다. 이들 국가의 대표적인 주종이 맥주이니 우리의 실정과 조금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다양한 생맥주들을 굳이 맥주 전문점에서 비싼 돈을 내지 않더라도 즐길 수 있는 건 큰 축복이다. 악순환 같기도 하다. 생맥주를 받으면 재고가 많이 남아서 클라우드를 포함한 단 몇 종류의 생맥주만을 가게에서는 취급하고, 그러다 보니 공급이 모자라 어지간한 외국산 생맥주들은 한 잔에 만 원 가까이 호가하기도 하는 불행한 연쇄고리가 이어지는 셈이다.
기네스 스토어하우스의 꼭대기에는 전망대도 있었다. 지난 여행에는 이런 전망대나 탑에 뻔질날 정도로 올라갔던 듯한데,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이런 곳에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다. 그 만큼이나 높은 곳도 별로 없긴 했지만. 오후가 되니 아침의 작별로 인한 허전함과 서운함이 다행히도 조금 가셨다. 그건 아마 순전히 기네스 덕분이겠지만. 그래도 돌아와서 깨끗이 정리된 이들의 침상을 보니, 또 괜히 아쉽고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이럴 때는 역시 기네스를 먹어야 하는 건가. 그 깊고 진득한 맛이 떠오른다. 어쩌면 어제 그들과 함께 마신 술이 기네스여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고.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Innocence Missin의 '500 Miles'다. 쓸쓸한 노래다. 때론 이렇게 쓸쓸함을 깊게 느껴보는 것도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이겠고. 그렇겠지, 아마?
*이번 글의 제목은 김동영 작가가 공저로 참여한 <당신이라는 안정제>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