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를 누리며

아일랜드 더블린-킬라니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기대감을 증폭시키기에 부족함 없었던 하루

전날의 귀찮음이 싫어 오늘의 빠듯함을 택했고, 언제나 그랬듯 어제의 내 선택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씻고 짐을 쌌다. 캐리어의 가방이 잘 잠기지 않았다. 그 위에 앉아, 부피를 어떻게든 줄이는 동시에 머리를 말렸다. 저주받고 흉물스러운 캐리어라고 시도때도 없이 악담을 해대지만, 얘도 나름대로 제 몫을 다하느라 고생 중이기는 하다. 한국에서 가져 온 샴푸가 오늘 아침 마침내 다 떨어졌다. 고국에서부터 함께해 온 친구들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작별할 때 마다 조금 기분이 묘하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 그런가 이젠 이런 애들한테도 전우애를 느끼고 있다. 보온병에 커피를 담을 여유도 없이 곧장 체크아웃을 하고 호스텔을 뛰쳐나왔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정류장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초행길이니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킬라니행 버스에 탑승했다. 그래도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환승을 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었다.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전 날 깊게 잠들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버스 좌석에 앉자마자 오늘은 여행이고 뭐고 다 필요없고 호스텔에 체크인 하자마자 내일까지 자리라 결심했다. 그런 결심을 한 두 번 정도 더 되새기자 졸음이 쏟아졌고, 킬라니까지 가는 길 내내 잠을 잤다. 중간중간 보이는 풍경들이 꽤 괜찮은 듯했지만, 그건 알 바 아니었다. 당장의 피곤함부터 처리하는 게 무조건 우선이었다.


킬라니는 아일랜드의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더블린에서 버스를 타면 4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아일랜드는 작은 나란데, 그렇게 작은 나라는 아니다. 그 동안은 영국 옆 작은 섬 정도로만 인식했었는데, 이제 이 정도 면적 역시도 얼마나 넓은지 새삼 실감났다. 덕분에 도착 30분 전 즈음이 되자 아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버스는 완전 시골길을 다니는 중이었다. 그래도 도로의 포장 상태는 어제 'Cliffs of Moher'로 갈 때 보다는 괜찮았다. 최소한 이번에는 멀미 증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국적인 풍경들이 펼쳐졌다. 스뒤코틀랜드에서 본 것 같으면서도, 또 미묘하게는 다른 목가적인 모습이었다. 킬라니 근처의 'Ring of Kerry'라는 곳이 아주 유명한 관광지다. 'Ring'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반지 모양의 도로 코스인데, 그렇게나 경관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더블린의 호스텔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이곳을 추천했다. 어제 온갖 환승들을 거치며 'Cliffs of Moher'로 찾아갔던 게 조금 진저리가 나서, 여기는 반드시 투어를 신청해야겠다고 일찍부터 다짐해놓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찾아갔던 절벽도 참 좋았으니, 투어로 편안하게 방문하는 관광지는 더 할 나위 없을 듯했다. 킬라니의 정류장에 버스가 멈췄고, 숙소까지 한 번에 찾아왔다. 어려운 길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한 번도 헤매지 않고 잘 찾아온 게 못내 기특했다. 나는 사실 엄청난 길치다. 내게 있어서 지도와 나침반이란, 위험한 야생 동물을 만나면 던지고 튈 용도의 호신용 무기 정도로 밖에 쓸모가 다. 줘 봤자 읽을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숙소를 한 번에 찾다니. 장족의 발전이다.

킬라니의 거리

아담한 크기의 호스텔은 다행히 깔끔했고, 또한 친절했다. 호스텔의 시설이 너무 안 좋거나 직원들이 불친절하면 그 도시 전체에 대한 첫인상이 아주 나빠진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까지 오래가는 경우들도 흔하다. 맨체스터가 그랬다. 마치 훈련소 변기가 놓인 것 같은 그 참상에 할 말을 잃었다. 버스에서는 단잠을 자고, 또 한 번에 찾아온 숙소는 꽤 괜찮은 편이고. 거기에, 오늘은 이번 여행중에 가장 '쨍쨍'한 날이었다. 침대에 짐을 풀고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리셉션의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해준 곳이었다. 여기로 온 주된 목적은 내일 있을 'Ring of Kerry'에 투어로 다녀오는 것이고, 오늘은 그 주변을 맛이나 보자 싶은 마음에 숙소 5분 거리의 국립공원으로 잠시 나간 셈이었다. 그런데, 좋았다. 아니 아일랜드가 이렇게 예쁜 나라였나 싶을 정도로 멋진 공원이었다. 처음에는 이거 한국에서의 뒷산과 크게 다를 거 없는데, 뭐 이런 게 국립 공원인가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공원 중심부로 들어갈 수록 아주 평화롭고도 한적하며, 또 고요한 자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얼마나 평화로웠냐면, 울타리 너머에는 이름모를 짐승들이 아주 한가롭게 낮잠을 자거나 어울려 놀고 있을 정도였다. 주변 자연이 그만큼이나 아주 잘 보존되어 있는 공원이었다. 차도 다니지 않았다. 여기서의 교통 수단은 자전거와 마차뿐이었다.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그 마차가 맞다. 잠깐, 마녀는 <신데렐라>구나. 마차가 다가올 때는 잠시 길을 피해주어야 했다. 그런 게 굉장히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엄청난 건축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 거대한 공원 자체가 주는 색다름이 있었다.

호숫가를 지날 때 경관은 절정에 달했다. 아직은 추운 계절이고, 그래서 나무들에도 잎은 없고 앙상한 풍경들이 주를 이뤘지만, 그게 적막함과 어우러져 기분 좋은 쓸쓸함을 연출해냈다. 기분 좋은 쓸쓸함이라는 게 조금은 어불성설 같기도 하지만,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모처럼의 여유를 즐겼다. 공원에서의 산책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여행 초반부의 런던과 카디프 이후로는 거의 처음인 듯 할 정도다. 정신 없이 체크아웃을 마치고 이곳으로 달려와서 그런지 더 각별한 여유였다. 도시를 정처 업이 걸어다니는 것과, 거대한 공원 안에서 자유로이 산책하는 건 조금 다른 느낌이기도 했다. 4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와야 하는 곳이지만, 관광하기에 꽤 괜찮은 곳 같다는 어렴풋한 확신도 들었다. 내일 투어에 대한 기대감을 더 증폭시킬 수 있던 하루였다. 먹구름이 조금 보였던 게 걱정거리긴 했지만, 내일 투어 시간대에는 다행히 강수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 부디 내일만큼은 날씨가 오늘만큼이나 괜찮기를 바란다. 더블린에서 두 시간 정도를 더 잘까 고민했지만, 그래도 아침 일찍 준비한 게 꽤 잘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그 시간동안 이 좋은 공원을 산책할 수 있었다. 내일은 어떤 풍광이 기다리고 있을지 몹시 궁금하다. 거기에, 아주 오랜만에 아침을 주는 호스텔을 만났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기분 좋게 투어를 시작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성시경의 '희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