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킬라니 (2016~2017 세계 여행)
잔잔한 감동이 연이었던 하루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잔잔한 파동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Ring of Kerry' 루트였다. 자욱한 안개때문에 일부 구간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근사한 풍경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버스 제일 뒷자리에 홀로 자리를 잡은 나는 왼쪽과 오른쪽 창가를 열심히 오가며 그 광경들을 눈에 담았다. 투어에는 총 여덟 명이 함께했다. 다행히 가이드도 친절했다. 같은 모습의 풍광들이 연이어 등장했기에 확실히 박진감이 있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 산들을 천천히 구경하며 한 바퀴를 도는 여정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저께 찾아갔던 'Cliffs of Moher'가 입이 떡 벌어지는 굉장한 시각적 압도감을 자아내는 곳이라면, 'Ring of Kerry'는 식사 시간을 포함하여 총 7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투어로 주변 경관을 천천히, 또 잔잔하게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절벽이 주는 단정적이고도 확고한 느낌을 단 며칠 전에 받아서 그렇지, 오늘의 'Ring of Kerry'에도 참 놀라운 풍경들이 많았다. 더블린의 호스텔에서 만난 외국 사람들이 왜 여기를 그리 추천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패키지 투어 특유의 편안함도 한 몫 했다. 이 동네를 손바닥 내려다 보듯 알고 있는 가이드는 어디서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잘 나올지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런 포인트들로 데려가 주었다. 이동 수단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여행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곤 한다. 오늘은 그런 애로사항은 전혀 없이 오직 감상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아침의 안개가 너무 자욱하여 혹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허탕만 치고 오는 건 아닐까 우려됐는데, 다행히 이 후 날씨가 그리 나쁘지는 않아 아주 긴 시간동안 잘 즐기고 올 수 있었다. 킬라니에서 시작한 투어는, 먼저 근처의 전통마을로 향했다. 도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마을을 벗어나자, 더 작은 전통마을이 나왔는데, 거기서 약간의 입장료를 내고 아일랜드 전통 양식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몇몇 모형들과 건축물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몇 마리의 말들도 그곳에 있었다. 사람들이 다가가 포즈를 취해도 피하지 않는 걸 보며, 여기가 관광지로 유명하긴 유명한 곳인가보다 느꼈다. 작은 민속촌 같은 인상이었는데, 한국에서도 민속촌을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니 여기서도 크게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주변 자연이 더 좋아 이리저리 거닐다, 보존 마을 옆의 카페에 들어갔다. 뭘 주문할 지 몰라 망설이고 있으니, 앞에 계신 주인장이 끝내주는 아일랜드 음료수 하나 어떠냐고 물었다. 뭔지는 몰라도 끝내준다는 것에 혹해서 그거 좋겠다고 답했더니, 위스키잔에 아일랜드 위스키와 따뜻한 아일랜드 커피, 그리고 흑설탕과 약간의 크림을 얹은 정말 '끝내주는' 칵테일을 한 잔 타주었다. 섞어마신 술들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아주 옛날에 정종을 마셨을 때 이후로 따뜻한 술은 처음인 것 같은데,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하고, 또 후에는 위스키의 향까지 느껴지는 이 음료가 정말 맛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아일랜드 위스키도 상당히 유명하다고 한다. 종류도 아주 많고.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에 한 잔 정도는 마셔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여기서도 은총을 베푸시는 우리의 주님, 위스키.
보존 마을 이후로는 끊임없는 자연이 계속 나타났다. 이곳은 정말 보면 볼수록 대중 교통으로 혼자 찾아오는 건 아예 불가능한 곳이었다. 혹시 조금 더 싼 가격의 대중 교통은 없나 찾아보다 얼른 단념했던 나의 빠른 포기가 고마웠다. 정말 감사하고도 다행스런 마음으로 가이드 분이 운전해주시는 버스를 즐겼다. 아까의 술맛이 입가를 맴돌았다. 그 달콤함, 그 쌉싸름함, 그 위스키. 기억해두고 싶은 레시피였다. 자연이 거의 그대로 보존된 곳이니 만큼, 양들도 아주 자유롭고도 평화롭게 넓은 언덕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 동물들을 볼 때 마다, 나는 저렇게 건강하게 자란 짐승의 고기만큼 몸에 좋고 맛있을 게 또 있을까 싶은, 걔네들한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다. 단순히 비교해보아도, 좁은 우리에서 공정에 가까운 방식으로 사육되는 가축들과 초원에서 뒹굴던 짐승의 건강상태가 같을 수는 없을 게 뻔하다. 한우는 도대체 왜 그리 비싼 걸까. 뭘 그리 좋은 걸 먹이길래 바다 건너 온 호주산 고기보다 훨씬 더 비싼 걸까. 점심 식사를 위해 들어간 식당에서는 마침 양 요리도 팔고 있었다. 제주에서 흑돼지를 먹는 기분으로 그 요리를 시켰다. 으깬 감자와 당근, 그리고 역시 구운 감자와 양고기 함께 나왔는데, 이 감자도 아일랜드 감자라 하니 새삼 신기했다. 양고기에 냄새는 별로 나지 않았다. 물론 양고기 특유의 향은 있었지만, 나는 여기에 큰 거부감은 없는 듯했다. 와인 한 잔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먹는 식사다운 식사였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는 식당 주변을 돌았다. 주된 목적은 급히 화장실을 쓸 요량으로, 어쨌든 주변 펍들 중 한 군데에 들어가, 기네스가 아닌 아일랜드 생맥주를 한 잔 주문했다. 풍미가 상당히 괜찮았다.
와인과 맥주 한 잔 씩으로 이전보다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진 상태로 버스에 탑승하였다. 후반부에는 주로 국립공원 내부를 드라이빙했다. 식사 전과 그리 다를 것 없는 풍경임에도, 날이 조금 더 걷히고 또 바라보는 각도가 달라짐에 따라 훨씬 더 새롭게 느껴졌다. 좋은 날이었다. 아무런 걱정거리 없이 오직 눈 앞에 놓인 자연만 뚫어져라, 또 질리도록 감상할 수 있는 게 이번 여행에서 며칠이나 됐을까. 폭포를 마지막 포인트로, 우린 다시 킬라니로 돌아왔다. 가이드는 7시간 동안 혼자서 운전과 설명을 병행하느라 아주 지친 얼굴이었다. 돌아와서 사진을 보니 이제야 어떤 곳들을 오늘 누비고 다녔는지 조금씩 실감나기 시작했다. 오늘 7시간 정도의 코스를 트래킹 하자면 3일에서 4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걸어다니며 맛 보게 될 이곳의 풍경 또한 상당할 거라는 기대감이 일었다. 'Cliffs of Moher'도 그랬고, 지금의 킬라니도 그렇고, 아일랜드의 수도는 더블린이지만 인상깊은 볼거리들은 오히려 반대편의 서쪽에 더 많이 분포되어 있는듯 하다. 더블린을 제외한 다른 모든 도시들에는 거의 전무한 상태로 아일랜드에 도착했는데, 이런저런 좋은 사람들 덕분에 훌륭한 여행지를 여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참 기분이 좋고 따뜻한 사실이다. 어쩐지 정말로 여행자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워낙 자연이 예뻐서, 오늘은 그저 사진만 업로드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오직 사진만 올려도 그걸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만큼 사진을 잘 찍지도 못할 뿐더러 정말 그러기에는 스스로에게 조금 성의없는 듯도 하여 약간의 여행기와 코멘트도 기록하였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말이 필요 없는 하루였다. 날씨까지 좋았다면 완벽했겠지만, 애초에 완벽함을 기대하지는 않으니, 크게 상관 없기도 했고. 그저 일곱 시간 동안 정말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열심히 눈 앞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감상했던 날이었다. 거기에 인간의 언어가 개입될 여지란 없었다. 어디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도 하다. 마음 뿐만 아니라 머릿속도 평화로워지고 말끔해졌다. 그러니 오늘의 여행에 '정말 좋았다 '이외의 표현들은 모두 사족처럼 느껴지고,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 여행문 자체는 가장 불만족스러운 글이 되는 중이다. 쓰는 내내 느끼고 있다. 이건 최악이라고. 역시 억지로 쓰는 글에게 품질까지 괜찮으라고 요구하는 건 조금 무리한 요구인가 보다. 글이 더 나빠지기 전에, 여기서 마무리 해야겠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James Bay의 'Hold Back The River'이다. 강물은 붙잡을 수 없다. 강물도, 시간도, 사랑도, 세상에는 붙잡거나 멈출 수 없는 것들이 참 많다. 그걸 알면서도 오늘의 투어 동안 꼭 붙들고 싶은 풍경들이 몇 번 있었다. 특히 아일랜드는 그리 쉽게 올 수 없는 곳이니 만큼, 꼭 잘 간직하고 싶은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