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킬라니-더블린 (2016~2017 세계 여행)
남아도는 시간을 투자하여 내가 모으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추억'
인류 역사상 가장 낭만적이면서 애틋했던 <비포 선라이즈> 속 기차 여행의 기원은 '소음'에 있었다. 기차 객실 안에서 알아듣지 못하겠는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무리를 피해, 책일 읽던 여자는 자리를 옮긴다. 건너편에 있던 남자는 그 여자에게 말을 걸며 그들의 사연이 시작되었다. 낯선 곳으로 가던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낯선 도시에서 낯선 방식으로 하루를 함께 보냈다. 혹시 그 '소음'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여자가 편안하게 원래의 자리에서 계속 독서에 집중했다면, 사랑은 시작되지 조차 못했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개별적 우연들을 필연이라는 이름의 별자리로 명명하는 일과 같다. 내게는, 북두칠성 등의 아주 선명한 별자리가 아니라면 그 이름들이 쉽게 납득되지 만은 않았다. 어거지같다는 느낌이 오히려 더 컸다. 별은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들을 한 데 묶어 작위적으로 이름 붙이는 건 오로지 인간의 몫이다. 여기저기 퍼져 있는 별들을 묶으며, 사람들은 갖은 이야기와 설화들을 만들어 냈다. 내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그건 정말 필요도 이유도 없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지금도 여기저기의 별들을 엮으며 하나의 근사한 서사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그들은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과 비슷하다. 순전한 우연에 지나지 않은 사건들조차 하나의 운명적 사연이라 착각하며 우린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다시 더 엄밀히는,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다고 믿는다. 우린 이렇게 사랑하기 위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거야, 라고 서로에게, 또 자신에게, 별자리를 그려내듯 가끔은 우악스럽게, 또 한 편으로는 황홀함 안에서 참 열심히도 설명하곤 한다. 스스로 이어붙인 그 서사 안에서 진심으로 뜨겁게 탄복하는 게, 사랑이 주는 행복일 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의 여행에 <비포>시리즈 같은 일이 없었던 건 순전히 그런 '소음'이 부족해서야, 라고 하기에는 내겐 한국어가 아니라면 대부분이 '소음'이기 때문에 그런 근원적 문제는 아닐 듯하고. 어쨌든. 유럽 기차 여행의 낭만이 <비포>에 있다면, 영화 <만추>에는 버스 여행의 낭만이 담겨있다. 물론 그 배경은 미국이라서, 내가 여행하고 있는 유럽과는 조금 다르기는 하다만. 거기에, 나 자신이 현빈과는 이래저래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도 크다. 이번 여행에서의 주된 이동수단은 버스다. 기차보다는 조금 더딘 속도로, 무심코 지나는 풍경을 음미하겠다는 감성적이고도 탐험적인 마음에서다, 는 물론 아니고, 다만 기차에 비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필요한 걸 크게 도식화 하면 단 두 가지다. 돈과 시간. 나는 시간 재벌이다. 시간이 진짜 많다. 이걸 화폐로 환산할 수 있었다면, 나도 요즘 같은 시국에 한 몫 두둑히 챙길 수 있었을 테다. 재래식 교통수단일수록, 똑같은 이동거리라도 그 시간은 훨씬 더 많이 소요된다. 하지만 나는 시간 부자기 때문에 그런 금액 정도는 쿨하게 지불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들고 있는 카드를 시원하게 긁을 때다. 소비의 희열. 이건 오직 필요의 소비 심리가 선사하지 못 하는 정말 중요한 요소다. 이제 내가 저 것의 주인이 된다는 걸 알리는 그 경쾌한 결제음. 시간이 남았고, 남고, 또 남아있기 때문에 나는 어지간한 이동 시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시간이라는 화폐로 양손 가득 들기도 벅찬 만큼을 지르고 있는 셈이다. 미국에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극 중의 현빈이 그 버스에 타게 된 것도 '저렴함'이라는 게 크게 기인했기 때문이었을 테다. 그런 걸 보면, 우린 참 닮은 점이 많네요 현빈씨, 이렇게 한 번 친한 척을 해 봅니다.
하지만 <만추>에서의 두 사람, 현빈과 탕웨이 모두 나 같은 시간 부자는 아니었다. 특히 탕웨이는,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감옥에 일정 보석금을 내고 단 며칠의 허가만을 얻은 채 외박을 나온 주인공이었다. 아, 외박이라니. 두 달에 한 번 있는 군대에서의 외박도 목숨같이 느껴지는데, 옥중에 갇힌 그녀에게 그 애틋함은 오죽했을까. 한 시라도 아까운 그녀가 선택한 교통수단은 '버스'였다. 버스 안에서의 유일한 동양인었던 그녀에게, 버스에 급하게 오른 현빈은 돈을 빌리고, 담보로 그녀에게 시계를 맡긴다. 그 시계로 말미암아, 현빈은 탕웨이에게 영화 내내 '지금 몇 시죠(What time is it?)'을 묻게 된다. 이를 두고 이동진 평론가는 '결국 사랑은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란 표현을 썼는데,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또 사유를 해야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은 이런 표현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저 부러울 뿐. 주어진 시간이 한정돼있다는 점에서 <비포>와 <만추> 주인공들의 애틋함은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비슷하다. 그들의 사랑은 '시한부'인 것이다. 하지만 보통 '시한부'에서 유추되는 이미지, 즉 죽음의 '시한부'와 그들의 '시한부'에는 약간의 온도차가 존재한다. 이별하는 순간에도, 이들에게는 훗날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있다. 꼭 다시 만났으면 하는 간절함도 공유하고. 그러니 당장의 작별이 최종적인 마침표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 소중한 만남이 큰 별자리의 시작으로 이어져야지, 홀로 빛나는 별이 되는 걸 둘 중 누구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인연이라는 건, 본디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별들을 묶어 별자리라 칭하는 행위와 유사하고, 그래서 생각보다 힘이 없고 유약할 때가 많다. 그렇게 우연으로 그 자리에 '놓여 있던' 별들이, '별자리'란 이름의 인연이 되기까지에는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한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비포>시리즈 주인공들의 재회는 10년에 한 번 꼴로 이루어지고, <만추>의 엔딩은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 조금 고민해보게 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물리적 재회는 불가능하게 된다. 해피일지 새드일지 고민해게되는 건, 편지도, 전화도, 그 어떤 다른 연락 수단도 없이 다시 감옥으로 들어간 그녀가 출소하기까지의 몇 년을, 잠깐의 외박동안 현빈과 보냈던 '시간'을 추억하고 떠올리며, 그 힘으로 살았을 날들의 벅찬 감정과 설렘이, 오직 물리적 재회가 불가능했다는 결론적 이유만으로 '세드'라고 단정짓는 게 그리 타당해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포>시리즈를 연출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또 다른 걸작 <보이후드>의 감독이기도 하다. <비포>와 <보이후드>는 똑같이 '시간'을 다루고 있지만, 그 방식과 시선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보이후드>에서 강조되는 건 '평범함'이다. 한 소년이 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성장하는 그 긴 시간 동안 발생하는 매 년 매 년의 에피소드들을 보여주지만, 정작 그 날들은 오히려 마치 1년 중 아무 날이나 고른 듯한 느낌이다. 주인공들의 대화와, 전후 맥락을 통하여 어떤 일들이 이 소년과 그 주위에 벌어졌는지 추론해볼 수는 있지만, 그런 극적인 이야기들 위주로 서사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소년의 어머니가 여러 차례 재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그들 남매를 양육했고, 또 그 과정 과정 역시 굉장히 굴곡지었을 정도니, 소년의 유년기는 분명 '쉽지 않았다'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정말 극적인 삶이었다. 하지만 <보이후드>의 감독은, 물론 그 스스로에게는 아주 치밀하게 고심한 결과물이겠지만, 관객들에게만큼은 한 사람의 성장은 오히려 1년의 대부분인 '아무 날'들로 더 많이 이루어진다는, 그래서 나도 그렇게 컸겠구나, 라는 잔잔한 감동을 받게 한다.
이 점에서 <비포>시리즈는 <보이후드>와 조금 더 선명히 대비된다. <비포>시리즈의 두 사람은 만 하루도 안 되었던 그 날의 기억을 평생의 여비로 삼아 두 사람은 생을 살아낸다. 총 세 개의 시리즈들 중 내게 가장 슬프고도 먹먹한 건, 두 번째 <비포선셋>이다. '만약' '혹시나' 등의 감정과 애틋함이 서로의 얼굴을 교차했던 마지막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만추>의 탕웨이에게 있어서도, 현빈과 함께 보낸 만 3일도 안 되는 시간은, 그녀가 감옥에서 '희망'을 갖고 살아있게해 주었을 소중한 기억이었을 테다. 극 중의 탕웨이는, 남편과의 다툼 중에 우발적으로 그를 죽이고, 생의 의미는 대부분 잃어버린 채 잔존하던, 혹은 '살아만'있던 사람이었다. 그건 오직 물리적 생존이었다. 출소 후, 혼자 창가에 앉아 현빈을 기다리던 그녀의 표정이 그리 슬프거나 침체되어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동안 그녀가 '희망'을 통하여 '살아내는' 인생을 살고 있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자라고 성장케 하는 것은 지극히 사소하고도 평범한 '아무 날'일 지도 모르겠으나, 그 사람에게 살아갈 힘을 주고 견디게 하는 건 '어떤 날'의 비범한 기억이다. 야구를 두고 인생의 축소판이라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야구 뿐만 아니라 인생의 축소판은 여기저기에 있다. 사랑도 그렇고, 여행도 마찬가지다. '시작'과 '끝'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탄생과 소멸을 닮아있는 걸테니, 생의 메타포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러니 사랑과 여행을 통하여 인생을 배운다는 게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특히 사랑이 그렇다. 한 존재가 미약하게 탄생하여 경이롭게 빛나다 이윽고 임종에 다다르는 그 보편적 과정은 생로병사를 퍽 닮았다. '끝'이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안타깝게도 지리멸렬하고 또 자주 권태롭다. 그럼에도 여행과 사랑을 반복하는 건, 다를 바 없던 어느 날에 발견한 크고 강력한 희열 때문이다. 그런 여행과 사랑은,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비범한 어떤 날들'로 승화된다.
여행을 통하여 살아있음을 느낀다. 여행을 통하여, 아주 가끔은, 살아있는 게 참 좋다는 것도 느낀다. 그 '가끔'이 바로, 여행을, 그리고 삶을 놓아버리지 않도록 기능하는 순간들이다. 50일 넘게 여행을 다니고 있지만, 여행을 통하여 내 존재나 탄생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건 앞으로도 요원한 일이다. 나는 여전히 한 개인의 탄생에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누군가의 생일마다 그리 요란한 의식들을 다 떨어대는 건 존재 이유를 주입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내 기억이 틀릴 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세상에 나오고 싶다고 삼신 할매에게 떼 쓴 적은 없다. 내가 기억하는 한은 그렇다. 어쩌다가 존재하게 되어버린 이 삶을 이어가는 가장 큰 원동력은 호흡하는 관성과 습관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오로직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영역에만 해당한다. 그러니 살아가거나 살아내는 것이 아닌, 다만 살아있고 살아지는 상태다. 다만 살아있을 뿐인 삶을 살아가거나 살아내는 인생으로 승화하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그 화폐는 추억이다. 남아도는 시간을 투자하여 내가 모으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추억'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하는 게 여행이고, 그 일상이 녹록지 만은 않을 게 또 현실일테니, 그 빡빡한 '아무 날'의 현실 속에서 '어떤 날' 같은 비범함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비록 태어난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추억이 많은 인생이라면 소중까지는 못 되더라도 가치있게 느껴질 수는 있다. 나라는 사람을 만든 건 여행을 다니지 않은 대부분의 날들이었다(보이후드). 하지만 낯선 곳을 여행하고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 짧은 순간들 덕분에, 비슷한 군상들 속에서 나를 알아보고, 그를 외면하지 않을 수 있다. 감히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말하자면 말이다. 여행의 하루하루들은 <보이후드>의 '아무 날'들 처럼 때때로 무료하고 무력하며 회의감이 드는 경우들이 많지만, 삶이라는 거시적 측면에서 여행의 날들이란 <비포>시리즈의 하루나 <만추>의 3일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게'하는, 그런 힘 있는 기억의 조각들이다.
물론 영화 <보이후드>에서, 모든 에피소드들에 '아무 날'만 있었던 건 아니고, 어떤 해의 이야기를 다룰 때에는 꽤 중요하고 극적인 사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리 <보이후드> 같은 여행이라고 해서, 늘 평탄하고 건조하게 진행되어야 할 당위란 없다. 그런 당위란 전혀 없는데, <비포> 같은 설렘이 50일이 넘어가도 없다. 그 와중에 버스 뒷편의 아기는 세 시간 가까이 고래고래 울고 있는 중이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싶어서 이어폰 볼륨을 높였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내 귀만 아파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옆에 아기가 운다고, 자리를 내쪽으로 옮겨 책을 읽는 줄리 델피도 없다. 내가 에단 호크도 아니긴 하지만. 역시 그건, 줄레 델피의 큰 그림이었던 건가. 도착을 위해서는 아직 한 시간 반이 남았다. 조금이라도 '덜' 재래식의 이동 수단을 이용하면, 이런 불상사는 피하거나 최소화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게 다 세금인 셈이다. 나는 시간 부자니, 재산세에 소득세에 여기저기 많이 뜯길 수 밖에 없다. 내일은 노르웨이로 이동할 거라 그런지, 내게 북유럽식 세율을 적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준비성이라니. 원래 세금을 내는 건 유쾌하지 만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70%에 가까운 버스에서의 내 시간을 피로함, 피곤함, 짜증, 불쾌함 등의 명목으로 다 지불하였다. 북유럽의 복지 같은 건 단 하나도 없는 채로. 내가 아무리 시간 부자이긴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니 꼬마야. 이건 인연도 우연도 아닌, 오직 악연인걸. 혹시 설마 나중에는 이 마저도 추억으로 되긴 되는 거니. 나는 나 스스로 자꾸 물어봤다. 어차피 혼자 하는 말이니까 이왕이면 현빈의 말투로, '훳 톼임 이짓?' 이 망할 버스는,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건가, 뭐 그런 의미에서였다. 혹시라도 오늘 숙소가 시끄럽고 왁자지껄할 거에 대비하여 미리 액땜한 정도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다비치의 '우리의 시간은 다르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