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더블린-노르웨이 베르겐 (2016~2017 세계 여행)
익숙해진 것들과 이별하던 날
족히 잡아 40분이 소요되는 더블린 공항을, 완행 노선을 타느라 1시간이 훨씬 지난 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려 이 정도의 완행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완행이 아니라 만행에 가까운 수준으로 버스 정류장들이 배치돼있었다. 앞에 차가 없어도 기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기사가 엄청나게 착한 사람이라서, 내 눈에는 도저히 안 보이는 앞차와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려 애 쓴 모양이었다. 전혀 초조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그렇게 여유있는 시간을 두고 숙소에서 나왔지만,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는 체크인 카운터까지 부리나케 뛰어가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을, 나의 친애하는 적 캐리어 가방과 매 순간 함께했다. 체크인 시간에 딱 맞춰 공항에 도착한 건 생전 처음이었다. 나는 해외 여행의 경험이 그리 많은 사람이 아니고, 그렇기에 공항으로 가고 거기서 머무는 것 자체가 이미 무지하게 설레는 일이며, 시간이 촉박하느니 넘치는 게 낫다 싶은 방어적 마음에서라도 아주 넉넉한 여유를 두고 공항으로 향하는 편이다. 그런 여유같은 건 전혀 없이 도착하니 딱 하나 좋은 건 대기 시간이 짧다는 것이었다. 면세점 구경이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바로 탑승 게이트쪽으로 향했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느낌도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느려터진 완행버스에서 온갖 안좋은 상상들을 다 해서 그런지 맥이 빠졌다. 상상했던 것들 중 최악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아 천만 다행이었다.
저가 항공이었기 때문에 기내식 같은 건 없었다. 운임료에 식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굳이 선택하면 할 수도 있었겠으나, 나는 공항 매점에서 샌드위치와 음료를 들고 타는 것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손에 음식 하나씩은 사온 듯했다. 더블린에서 베르겐으로 가는 항공편은, 물론 찾아보면 직항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건 비쌀 테니 처음부터 깔끔하게 포기했고,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경유하는 일정이었다. 저렴하면서도, 경유 시간이 1시간도 채 안 된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외국에서 외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건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나갈 때나 귀국할 때 다른 도시를 경유한 적은 있어도, 그건 출국과 귀국의 과정 중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외국에서 외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행기 속도의 경이로움에 새삼 감탄했다. 어제 킬라니에서 더블린까지 오는 데 버스로만 4시간 40분이 소요됐는데, 더블린에서 코펜하겐은 두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동 시간과 환승은 적을 수록 좋다. 근 며칠 간 세 네 시간 이상의 버스 여행을 여러 번 반복했다 보니, 두 시간의 비행은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코페하겐 공항에는 순식간에 도착했다. 영국과 아일랜드에 비교하여 이곳은 시간대가 한 시간 더 빠르다. 12시 10분에 출발한 비행기를 두 시간 탔는데, 도착하니 15시가 넘어있었다. 50일 넘게 맞춰 살았던 그 시간대와 여기서 작별했다.
작별해야 할 건 시간대 뿐만이 아니었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콘센트 구멍은 세 개였기에 어덥터를 사용해야만 했다. 나는 그 두 나라의 콘센트가 어떤 식인지도 알아보지 않고 여행을 떠나왔다. 런던의 호스텔에서 한참을 시도하다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늦은 밤에 근처 편의점에서 급한대로 구입한 어덥터였다. 그토록이나 급히 샀던 만큼 이것의 품질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늘 있었고, 언제 고장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일랜드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 이 어덥터는 최선을 다하여 나를 보좌해주었다. 50일을 넘게 세 개 짜리 콘센트 만을 봐왔더니 어쩐지 두 개 짜리 구멍이 허전해 보이는 착각도 들었다. 이미 익숙해진 이런저런 것들과 애틋한 석별의 정을 나누며, 아일랜드에서 노르웨이로 옮기는 건 영국에서 아일랜드로 이동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높은 차원의 긴장과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겠다는 불안함도 찾아왔다. 아, 언어도 다르긴 달랐다. 코펜하겐부터는, 더 이상 영어가 공용어가 아닌 나라들을 여행해야 한다. 내 영어 능력이 그리 좋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예 까막눈인 다른 언어들보다는 나은 편인데, 어후, 여행은 정말 머리 아픈 일들 투성이다. 간단한 환승 심사를 거쳐 베르겐으로 가는 비행기 게이트 앞에 다다랐다. 런던 히드로에서의 빡빡하고도 깐깐한 입국 심사가 트라우마처럼 남아, 나는 심사관들 앞에서면 정말 위축돼서 못살듯한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의 심사관은, 쉥겐 국가의 체류 기간이 최장 3개월이라는 이야기 외에는 별다른 질문도, 이야기도 덧붙이지 않았다. 고마운 사람.
아, 이제 본격적으로 쉥겐 국가 체류의 카운팅이 시작됐다. 쉥겐 협정을 맺은 국가들을 여행할 때는, '출국일로부터 역산하여 180일 중 90일 이하'로 무비자 체류할 수 있다. 외교부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설명이 이렇다. 그리 길지 않은 문장임에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여행을 준비하다 말고 이 한국어 문장을 열렬히 해석했던 기억이 난다. 쉽게 말하면 쉥겐 국가를 최종적으로 떠난 날을 기준으로 거꾸로 180일의 기간을 잡은 다음에, 그 기간 동안 쉥겐 국가에서의 체류 일수가 90일 이상이 되면 안 된다, 이런 이야기다. 써놓고 보니 이것도 어려워 보이기는 한다. 여기에, 양자협정 우선 국가라고 하여, 쉥겐 조약보다 우리나라와 맺은 90일 무비자 협정이 우선적으로 적용된다는 몇몇 예외적인 나라들도 있는데, 그게 불확실하거나 부정확한 경우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쉥겐 협정을 맺은 국가들에 포함되지 않는다. 노르웨이나 스위스는 유럽 연합(EU) 소속은 아니지만 쉥겐 협정은 맺은 나라들이기도 하고. 복잡하다. 엿같이 복잡하다. 영국과 아일랜드에 50일 이상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머물렀던 건 이런 복잡한 제도 탓도 컸다. 장기 여행을 하려고 하는데 무비자 체류는 90일로 제한되고, 그렇다고 아예 생뚱맞게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자니 5월에는 아프리카를 가야하여 나름의 최선이었던 결정이 영국을 한 번 제대로 여행해보자 였다. 지금보면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운이 좋은 듯하다. '유럽'이 아닌 '영국'을 따로 돌아보자는 계획이 없었다면, 에든버러나 글래스고, 또 리버풀 같은 좋은 도시들은 오직 이름만 아는 곳으로 남을 수 있었다.
코펜하겐에서 베르겐으로의 비행 시간은 아까보다는 더 짧았고, 착륙할 때가 다가오자 저 아래의 불빛들이 보였다. 베르겐의 야경이 참 예쁘다고 한다. 이게 그 야경인가, 얼른 비행기에서 내려 조금 더 생생히 보고 싶었다. 베르겐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곳을 꼭 한 번 가보라고 아주 많이 추천했다. 특히 이곳은 피오르드의 관광지로도 아주 유명하다. 언젠가 지리나 지구 과학시간에 들어본 듯한, 하지만 오직 들어본 듯 하기만 한, 리아스식 지형 어쩌구 하면서 왜 피오르드가 이곳 베르겐에 그리 많이 발달했는지 설명해놓은 블로그가 있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과학은 내 취향이 아니다. 이는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모두를 가리지 않는, 아주 공평하게 그지 없는 '불호'다. 어느 하나도 덜 마음에 안 드는 게 없다. 고등학교 2학년에 진학하기 전 인문계열과 자연계열을 선택해야 할 때, 혹시 이과를 골랐다면 인생이 많이 고달파지는 수준을 너머 비참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었을 거다. 별다른 수속도 없이 곧장 수하물 클레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5분 쯤 기다리자 작고 세련된 다른 캐리어들 사이에서 유유하게 거대한 풍채를 뽐내는 나의 친애하는 적 중의 적 캐리어가 웅장히 등장했다. 오랜만에 보니 저 뚱뚱한 배가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는 무슨. 네 놈을 이 곳에서 또 다시 만났구나. 얘 덕분에 배낭의 무게를 조금 덜 수는 있긴 하다. 하지만 이걸 끌고 길을 오르내릴 땐 그 만큼 성가신 것도 또 없다. <반지의 제왕>에서의 프로도와 골룸의 관계랄까.
시내로 가는 공항 버스를 타고, 숙소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되는 거리에서 내렸다. 베르겐은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비라니. 아니 잠깐만, 아까 익숙한 것들과 이별할 때 너도 간 거 아니었니. 영국과 아일랜드도 모자라 베르겐에서도 보슬비를 그대로 맞아야 하는 건가. 밝은 날의 캐리어가 그저 깝죽거리는 스미골이라면, 비오는 날의 캐리어는 반지를 빼앗기 위해 미쳐 날뛰고 눈 돌아간 골룸 그 자체다. 하지만 나에게는 반지도 없는 걸. 도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나한테. 아니지, 내가 가방에게 기대하는 거구나. 저게 인공지능이 있어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이미 어두워진 베르겐 골목골목 마다 애증의 캐리어와 내내 사투를 벌여댔고, 그러다가 어느덧, 이라고 하기에는 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숙소 정문 앞에 도착했다. 이번 숙소는 공용 아파트다. 조금 편하게 쉬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는 아니고, 도심과 그리 멀지 않은 곳들 중에서 그나마 싼 걸 찾다보니 이 숙소가 가장 훌륭했다. 베르겐에서는 어지간한 호스텔이 더 비싼 경우들도 허다했다. 명불허전 북유럽. 거기에 얘네들은 숙박 요금과 침대 시트료를 따로 받는 곳들이 참 많다. 여행을 많이 다닌 경험이 있는 내 지인은, 그 비싼 영국 물가도 북유럽에 비하면 동남아 수준이라고 평했다. 짐을 풀고 장을 보러 갔는데, 어느 정도는 사실인 듯했다. 파운드도, 유로도, 그렇다고 달러도 아닌 '노르웨이 크로나'에 완전히 적응 되지 않아 직관적인 계산이 어려웠던 이유도 있겠지만, 얼핏 봐도 공포스러운 가격표들이 돋보였다.
물과 콜라 한 병 씩, 맥주, 그리고 저녁으로 먹을 작은 컵라면 하나와 스시 한 팩을 구매했다. 초밥과 컵라면을 함께 먹으며, 일식집에 온듯한 기분을 냈다. 물건을 사들고 오는 길에, 교통 체계 또한 달라졌음을 느꼈다. 자동차들의 진행 방향이 이전 두 국가들과 반대였다. 내일 날이 밝고 본격적으로 관광을 시작하면 뚜렷한 차이점들이 더 많을 테다. 익숙해진 것들과 이별하는 일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소중한 추억이나 이런 건 우선 둘 째 치고, 아예 낯선 것들에 완전히 새로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활이 아닌 여행자로서는 숙명같은 번거로움이다. 그 익숙한 것들을 밀어내고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에 여행의 기대감과 또 다른 놀라움이 존재하고, 그렇기에 이 지리멸렬함을 반복하는 건 아닐런지. 물론 이렇게 되려면 내일부터의 북유럽이, 그 살인적인 미친 물가에도 불구하고, 한 번은 꼭 와 볼 만 하다 싶을 정도로 좋아야겠지만. 아일랜드에서 노르웨이로 넘어오느라, 오늘은 한 시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양 시간대의 접점에서 사라진 그 시간과, 언젠가 어느 때의 놀랍고도 굉장한 한 시간으로 서로 재회할 수 있기를 역시 간절히 바란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Frances의 'Don't Worry About Me'다. 아직 낯설고, 또 그 전과는 다른 것들도 많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너무 걱정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을까,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