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끼의 감동

노르웨이 베르겐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세상 행복이 이곳에 있었네

오늘만 사는 놈을 이기는 건 정말 어렵다. 우리 인생의 최강의 적은 오늘만 살았던 어제의 자신일지도 모른다. 뒷 처리를 해야할 건 미래의 나지 오늘의 내가 아니라는 생각에, 우린 무모한 실수들을 '과감'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저지르곤 한다. 마치 오늘의 내 저녁 식사처럼. 여행 경비를 획기적으로 아끼려면 무조건 식비를 줄여야 한다. 숙소 비용과 교통비는 무조건 지출되는 고정값이다. 아무리 줄여도 반드시 써야할 금액의 하한선이 존재한다. 하지만 식비는, 마음만 먹으면, 물론 조금은 독하게 먹어야 되는 게 문제이기는 해도, 어떻게든 유동적으로 줄일 수 있다. 덜 먹거나, 저렴한 음식을 먹거나. 맛있는 음식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만은, 지속 가능한 여행을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게 분명 있다. 현지에서 유명하다는 음식들을 다 챙겨 먹다가는 장기 배낭 여행을 할 수 없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주된 논리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그렇게 떠날 돈 있으면 한국에서 편하게 쉬면서 맛있는 걸 먹는 게 낫다는 것이다. 배낭 여행도 성향과 체질에 맞아야 가능하다. 나는 여행할 때만큼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 이런 마인드다.

식당 전까지 베르겐의 거리와 골목

그러니 보름 이상을 패스트 푸드만 먹어도 크게 문제되진 않았다. 조금 물리긴 했지만, 그게 주식이 되니 익숙해지는 경지에까지 올랐다. 여행을 다니다가, 혹은 다녀온 후에, 여행에서 먹은 것들 중에서 뭐가 제일 맛있었냐는 질문이 내게는 가장 답하기 어렵다. KFC 징거 버거의 맛은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가서 프랜차이즈 햄버거를 먹냐고 타박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가 아니었다면 프랜차이즈 햄버거를 그리 자주 먹을 일 조차 없었을 것이다. 먹는 걸 조금 줄이거나 질을 낮춤으로써 여행을 지속하는 게 전략이라면 전략이고, 작전이라면 작전이다. 나는 이 작전에 정말 충실히 복무하는 중이었다. 오늘까지는. 내일의 피오르드 관광을 위해 투어리스트 센터에 올라갔다가, 근처에 음식점을 하나 발견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원래 먹으려고 했던 건 해산물 버거였다. 싱싱한 해산물들이 진열대에 놓여 있었다. 토핑을 어떤 걸 고를까 메뉴판을 훑어보는데, 정식 메뉴가 자꾸 눈에 밟혔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유혹을 참아야 하는 데. 그건 3일치 숙박비의 금액이었다. 먹을 것의 유혹이 이토록 강하게 느껴진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앞에 놓인 싱싱한 해산물들이 정말 매혹적이었다. 여기서 해산물 버거를 먹는다고 한 들, 그 아쉬움이 다 채워질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주문할 차례가 되었고, 분명 그 때도 머릿속으로는 어떻게든 버거를 시키라고 난리였긴 했는데, 입에서 나온 말은 정식 메뉴였다. 아, 사고쳤다.

투어리스트 센터
식당
해산물 재료들, 저버릴 수 없었다.

안내 받은 자리에 앉아서, 자, 이제 최대한 다른 생각은 집어 치우고 오직 먹는 데에만 집중하자고 다짐했다. 포크도, 나이프도, 스푼도, 모두 나에게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아냐고 타박하는 듯했다. 마치 <미녀와 야수>에서 살아 움직이는 도구들 같았따. 하지만 저 싱싱한 해산물들에게서 눈길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걸 어떡하리. 게다가 한 때 영국에서 20일 넘게 햄버거로만 하루 한 끼를 먹은 적도 있으니, 50일 만에 처음 저지르는 사치인데, 물론 리버풀에서 축구본 것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어쨌든 그래도 먹는 것 만큼은 열심히 아껴왔으니, 오늘 하루만 사치를 부려보면 안 될까, 하며 어떻게든 죄의식을 줄여나갔다. 옆에 사람들이 없었다면 머리를 쥐어 뜯으며 '씨발'이라며 소리치고 싶었다. 방금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후회와 번민 사이에서 지쳐갈 때 쯤, 와인과 홍합 요리가 나왔다. 크림소스를 베이스로 한 홍합 요리였다. 맛 없기만 해봐라 평생 저주할 거야, 라는 결연하고도 비장한 마음으로 첫 홍합을 뜯었다. 음, 맛있네. 존나 맛있네. 소리내어 감탄했다. 죄의식이고 뭐고, 숙박료가 부족해지면 그건 노숙하면 되지. 갑자기 엄청나게 너그러운 사람이 됐다.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이 훌륭한 음식에 화이트 와인이라니, 전율이 돋았다. 홍합의 씹는 맛도 좋았고, 소스도 맛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메인 요리 접시가 나왔다.


샐러드, 굴, 킹크랩, 랍스타가 있었다. 하, 이 곱고도 고운 자태란. 레몬즙을 살짝 뿌려 굴을 호로록 마시듯 먹었다. 나는 원래 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최근에서야 조금 먹기 시작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생굴의 향이, 입 전체를 기분좋고 신선하게 감쌌다. 호로록 넘어갈 떄의 느낌은 또 어찌나 좋은지. 이어서는 킹크랩 차례였다. 버터로 요리한 듯했다. 정말 알뜰하게 먹었다. 내장까지 다 먹었다. 내장까지도 맛있었다. 살이 꽉 차 있었다. 그 부드럽고도 풍성한 식감. 세상에. 천국은 이 곳이었구나. 누가 보면 우는 줄 알았을 거다. 고개를 숙인 채 정말 집중해서 먹기만 했으니.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느꼈던 죄의식이나 걱정 같은 건, 포만감과 행복이 찾아오자 재빨리 자취를 감췄다. 항구 도시 답게 해산물이 유명하다는 건 익히 들었었지만, 그게 이렇게나 맛있을 지는 몰랐다. 음식 맛의 팔 할은 정말 재료 그 자체다. 해산물들에 별 다른 요리법을 가미하지 않았음에도 이리 맛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화이트 와인까지. 랍스터를 먹기 전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나처럼 혼자 이 모든 걸 다 먹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그 동안 너무 게걸스럽게 보였을 까봐 티슈로 입가를 잠깐 닦으며, 마치 이런 음식을 늘상 먹는 사람인 듯한 도도함을 연출했다. 그리고 마지막, 랍스터 사냥을 시작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오, 이건 킹크랩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두툼한 속살은 사랑스러울 지경이었다. 세상의 경이는 바닷 속에 있었구나. 내 일상이 권태로운 건 너네처럼 맛있는 해산물들을 자주 먹지 못해서였어. 살을 파내자 두두두둑 하며 떨어져 나오는 그 경쾌함이 정말 즐거웠다. 그래. 무엇을 먹는 행복도 이리 큰 것이었지. 먹어봤자 다 똥이라 생각하며, 그 동안 식비에 있어서는 대북 경제 제재와 비슷한 수준의 강도 높은 엄격함으로 긴축 재정을 행해왔는데, 맛있는 음식의 향을 맡고 맛보는 것 자체가 정말 너무나도 감격스러울 정도로 즐거운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감탄을 멈추지 않으며 모든 접시를 다 해치웠다. 입가와 손에는 지금도 여전히 게와 랍스터의 냄새가 배여있다. 이 향이 다 없어질 때까지 오늘은 양치질도 안 하고 손도 안 닦을 거다. 비록 앞으로 5일 동안은 더 식비를 절약해야겠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줄이라면 줄이지 뭐. 행복했다. 50일 동안은 거의 포기했다시피 했던 미각적 행복이었다. 설사 아주 나중에, 부족한 내 잔고때문에 지난 날의 스스로를 원망하더라도, 오늘의 내 선택 만큼은 예외다. 노르웨이 베르겐에서의 근사한 식사. 오늘부터의 내 소울 푸드는 이것이다.

식사 후 걸었던 베르겐

배부르고 맛있게, 또 비싸게 먹었으니 돈 값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베르겐의 뒷산을 산책해볼까 싶었다. 중턱까지 올라갔다가 비가 너무 심하게 내려 그만두었다. 말이 비지, 눈과 비의 경계에 있는 얼음 알갱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식사를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했다고 해서, 그게 진짜 오늘만 여행한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내 비가 왔지만, 입가를 머금고 있는 바다의 향 덕분에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다만 이 비에 그 향이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는데, 숙소로 돌아와서도 아직 유효하다. 정말 목이 마르지 않는 이상 물도 최대한 안 마실 거다. 남아있는 그 맛이 씻겨 나갈지도 모르니까. 이러니 너무 못 먹고 자란 사람 같은데, 대부분의 끼니를 샌드위치나 햄버거로만 채우다가 이런 근사한 식사를 한 번 했다고 생각해보자. 그게 얼마나 감동적일지. 돈은 비쌌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 정도로 충분하고도 풍성한 식사였다. 비싸긴 해도, 낸 만큼은 먹은 듯하여 손해보는 생각도 많이는 없었다. 물론 내일이 되면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될 지 모르겠지만. 들을 수 없는 어제의 나에게 바가지를 박박 긁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철저히 내일의 일이니, 오늘은 이 행복만을 간직하고 싶을 뿐이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옴므의 '밥만 잘먹더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