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다, 그 야경

노르웨이 베르겐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내일의 걱정으로 오늘을 채우더라도

베르겐의 최대 관광거리는 피오르드 지형이다. 몇 개의 코스들이 존재하는데, 그들 중 가장 대표적인 건 송네 피오르드와 하랑게 피오르드다. 송네 피오르드의 인지도가 조금 더 높긴 하다. 노르웨이에서는 최장, 또 전세계적으로도 두 번째로 긴 피오르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하랑게 피오르드를 선택했다. 조금은 마이너한 것들을 개척해보겠다는 선구자적 마음에서, 는 물론 아니고, 송네 피오르드로 가는 철길이 눈사태 때문에 눈에 매몰되어 이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번 아일랜드 킬라니에서도 두 선택지들 중 'Ring of Kerry'라는 조금 더 대중적인 옵션을 골랐기에, 이번에는 그렇게 많이 선택받지 않은 곳을 다녀오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하랑게 피오르드 코스는 오로지 배로만 이루어진다. 아침 8시 50분에 출항하여 10시 40분 즈음에 로젠달이라는 곳에 도착한 뒤, 다시 오후 2시 25분에 배를 타고 베르겐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20170223_093038.jpg 사진 찍을 때 수평이 제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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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3_101214.jpg 배에서 창 밖으로 바라 본 풍경.

아침에 일어나는 게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배를 탔다. 가는 길에 물 두 통을 샀는데, 비타민 워터도 포카리 스웨트도 아닌 어정쩡한 맛에 입맛을 잡쳤다. 잡쳤다라는 말 만큼 그 음료에 어울리는 표현도 없었다. 함께 사 온 콜라를 마시며, 새삼 이 몸에 나쁜 탄산음료의 아득한 맛에 감탄했다. 배를 타고 가던 중의 주위 경관은, 예쁘긴 했으나 그리 특별할 건 또 없었다. 스코틀랜드 지방이나 아일랜드를 거치며 조금은 감흥이 무뎌진 듯도 했다. 그런데, 눈으로 덮인 산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자리를 박차고, 그 추위에, 그 바람에, 갑판으로 나갔다. 갑판에서는 정말, 딱 얼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어폰은 바람에 흘러 내려 그냥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 상태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다보면 내가 항상 몇 걸음은 더 뒤로 물러나버리곤 했다. 바람 때문이었다. 차가운 파란색의 바다 위에 하얗게 눈덮인 산이 있는 건 마음을 뛰게 만든 풍광이었다. 지겨움은 사라졌고,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굉장한 시간이 앞으로 펼쳐지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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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기라 그런지 배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로젠달에 도착하자 그 마저도 뿔뿔이 흩어졌고, 나는 언제나처럼 혼자만의 관광을 시작했다. 혼자만의 관광은 주로 걷는 일이다. 트래킹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주욱 걸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었지만, 마음에 안식이 됐다. 어떤 길을 직접 걷게 되면 다른 감흥과 즐거움을 얻는다. 자동차로는 순식간에 지나버리는 한 순간의 풍경과 움직임들에 더 집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집들이 듬성듬성 있었고, 인적은 거의 닿지 않은 곳이었다. 아무래도 혼자 다니는 여행이다 보니, 이러다 여기서 변을 당하게 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도 잠깐 들었지만, 이토록 조용하고도 순박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나를 해코지하지는 않겠지 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길은 참 예뻤다. 트래킹을 하다 보니 계곡도, 산 골짜기도 만날 수 있었는데, 한 눈에 눈을 사로잡지는 않았지만 걷는 내내 그저 즐거웠다. 반환점을 지나 더 걷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배 시간을 놓칠 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중간의 강, 혹은 천을 건너 반대편의 숲길을 걷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게 오늘 있었던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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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3_105619.jpg 로젠달의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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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3_125128.jpg 젖은 발을 말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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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3_140102.jpg 하랑게 피오르드와 로젠달 지역의 경관. 역시 비슷해 보이지만 감상하자.

돈을 들여 멀쩡한 길을 만들어 놓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숲길의 낭만은, 어쩌다 계곡물에 신발이 젖으면서 붕괴되기 시작했고, 그 후에 바지까지 젖으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자, 다시, 새삼스럽게도 이곳은 노르웨이고, 북유럽이며, 가끔은 오로라도 보이는 동네다. 이 의미는, 겁나, 아니, 존나 추운 국가라는 소리다. 아무리 날이 맑다고 한들, 최고 기온은 영상 1도에 머물렀다. 고작 이게 최고 기온이다. 트래킹 코스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산의 기온은 땅의 그것보다 보통 낮다. 아마 영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젖은 다리는 '존나' 추웠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나마의 숲길도 끝나고, 아예 계곡을 횡단해야 하는 지경까지 마주한 것이다. 하나님 맙소사. 이 추운 강을 건너라니. 이것도 낭만일 거야,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신발을 벗고, 양말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바지를 걷었다. 비장한 각오로 맨발을 물 숙에 집어넣었다. 오, 씨발. 영화 <라라랜드>에서 엠마 스톤의 이모는 맨 발로 센 강에 뛰어들었고, 그 짓을 또 하겠다 말했다고 한다. 고증이 필요하다. 정말 그녀가 그 짓을 또 했는지. 모르긴 몰라도 센 강의 온도는 훨씬 따뜻하겠지. 생의 모든 감각들이 그 얼음장 같은 물에 깨어나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힘겨이 계곡을 건넜다. 낭만은 얼어죽을.


어기적거리며 조금 볕이 드는 곳으로 찾아갔다. 거기서 양말을 좀 말리려고 했으나, 이곳의 기온이 워낙 낮은 지라 별 효과는 없었다. 젖은 양말을 신으니, 불쾌하고 말고를 떠나서 우선 발이 너무 시려웠다. ­낭만은 이런 곳에 있지 않았다. 나는 왜 그랬던 걸까. 트래킹 코스를 내려오고, 아직 배가 출발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항구 주변을 감상했다. 물이, 정말, 오직 파란색이었다. 파워포인트 등의 그라데이션 효과도 이보다 예쁠 수는 없을 듯한 그런 파란색이었다. 나는 파란색을 좋아한다. 응원하는 야구팀의 유니폼도 파란색이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가장 따뜻한 색, 블루>다. 그런 내게 이런 파랑은 상당히 벅찬 정도의 색감이었다. 한참 사진을 찍다가, 아침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주 여유롭게 페리에 승선했다. 젖은 양말이 계속 거슬리기도 했다. 구석 자리로 가서 신발을 벗고 발을 막 굴러댔다. 그럼 좀 양말이 마를까 싶어서였다. 냄새가 심했다. 혼자 와서 참 다행이라고, 역시 중얼거렸다. 다음부터는 무조건 양말을 두 개씩은 챙겨가야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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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3_162519.jpg 범행 장소의 그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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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3_172759.jpg 식당 근처의 브리겐 지역. 산을 본격적으로 오르기 전.

베르겐 항구에 도착하고, 마치 범죄자가 범행 장소를 찾아 오는 것처럼, 나는 어제 과소비를 했던 식당을 한 번 더 찾았다. 오늘은 제정신이어서, 연어 버거만 하나 시켰다. 그래도 노르웨이까지 왔으니, 노르웨이산 연어는 먹어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햄버거는 맛있었다. 분할 만큼 맛있었다. 이것도 이렇게 맛있는데, 왜, 나는, 어제, 그런 과소비를. 하아. 잊자. 잊어야 한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나는 식당을 나와 베르겐의 뒷산으로 향했다. 정식 명칭은 플뢰엔(Fløibanen)인데, 뒷산이라 부르는 게 훨씬 편하다. 이곳에 오른 건 베르겐의 야경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사실 이 때까지는 생각이 조금 많았다. 영국에서와 달리, 아일랜드부터는 한 도시에 많아봤자 2~3일 정도를 머무는, 내 용어로 말하자면 '끊어 치는' 여행을 다니고 있다. 몸은 관광지를 구경하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다음, 그리고 또 다음 도시의 숙박과 일정을 고민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그마저의 긴장과 초조함도 나중에는 추억 비슷한 것으로 승화될 테지만(제발), 당시에는 순간순간을 온전히 즐기는 것을 지난하게도 한다. 오늘도 내내 이런 생각이 머릿 속에 가득했다. 피오르드의 감흥이 기대보다 덜 했던 것도 실은 이 스트레스가 계속 자리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피오르드는 정말 좋긴 했다. 다만, 문득문득 드는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다는 소리다.


뒷 산을 오르기 직전까지 이런 고민이 가득했는데, 정작 등산을 시작하자 아무런 생각도 없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왜 어제 투어리스트 센터의 직원이 피나쿨라를 타고 올라가는 걸 추천했는 지 알 것도 같았다. 힘들었다. 몹시 힘들었다. 이게 뒷산이냐 하는, 육두문자 가득한 말들이 입에서 마구 튀어나왔다. 베르겐이 아니라 '시베르겐'이었다. 높은 계단보다 더욱 교묘하게 짜증나는 건, 가파른 경사로다. 마치 이 정도면 충분히 걸을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는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가진 건 몸뚱이 뿐이고, 명색이 청춘인데 어디 피나쿨라 따위를 타겠나 하는 미친 심정으로 걸어올라간 건데, 역시 세상 모든 미침은 기피해야 할 존재들이다. 오르는 길에 시내를 내려다 보니 하나 둘 불빛이 켜지는 게 보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더 이상 야경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젠 관광이 아니라 전투의 영역이었다. 나를 약올리며 올라갔던 저 피나쿨라 기계놈을 이겨내야 했다. 알파고에 진 건 인간이 아니라 이세돌이었고, 저 기계놈에게 내 의지까지 패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도 안 되는 같잖은 사명감을 갖고 계속 산을 올랐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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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눈 앞에 펼쳐진 야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부둣가의 불빛, 도심의 불빛, 그리고 도로의 조명들이나 가로등들까지. 그래, 올라올 만 한 곳이었다. 그러나 굳이 내가 걸어 올라와서 이 아름다움이 유독 더 빛났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원래 참 예쁜 곳이었다. 피나쿨라로 올라 왔어도 충분히 이런 감흥은 느낄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뿌듯함 정도는 있었다. 그래도 뭔가 해내긴 해냈다는 소소한 즐거움이랄까. 무엇보다, 한 시간 반 정도는 내일과, 모레의 내 삶을 생각하지 않아도 돼서 그건 좀 다행이었기도 했다. 그 화려한 불빛들을 보자마자 내게 든 생각은, 아, 또 저기 내려가면 짐을 싸고 체크아웃 준비를 해야겠구나, 라는 서글픈 생각이었다. 뭐 그건 내일 일이고, 일단 이 야경이 참 아름다워 한참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땀이 식어서 조금은 춥기도 했지만, 따뜻한 불빛 덕에 마음에까지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는 사실 오버고, 그냥 추위가 견딜만 할때까지 있다가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너무도 수월하여 억울할 지경이었다. 힘든 것 보다는 수월한 게 몇 배는 더 낫지만, 그래도 내가 여기를 어떻게 올라왔는데. 이렇게 허무할 수가.

20170223_140032.jpg 마음이라는 걸 한 번 정화해보자

숙소로 돌아오니 따뜻한 기운이 나를 반겼다. 라디에이터를 최대 온도로 해놓고 간 보람이 있었다. 아침부터 워낙 바쁘게 돌아다녀서 그런지, 거의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엎드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하, 제발, 누가 내 짐 좀 대신 싸 줘. 대략 한 시간 정도를 그런 말도 안 되는 칭얼거림으로 뒹굴거리다가, 비로소 조금 조금씩 내일의 준비를 시작했다. 쓰레기를 버리고, 이건 여기에 넣고, 저건 다시 저기에 넣고. 어쩐 일인지 캐리어 가방이 오늘은 쉽게 닫혔다. 이건 뭐가 빠졌다는 소리인데, 그게 무엇인지는 내일 아침에 확인해봐야겠다. 일단, 뜻밖의 입수와 의문의 산행에 원치 않게 고생했던 내 몸을 먼저 좀 쉬게 하는 게 먼저인 듯하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캐스커의 '산'이다. 사실 직전까지는 김연우의 '그곳에 올라'를 선곡하려 했으나, 뒷산 한 번 올라갔다 온 주제에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서 민망했다. 야경이 훌륭해서 천만 다행이었고, 아주 좋았다. 내일의 걱정으로 오늘을 채우더라도, 또 그 안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은 잊지 않은 하루였으니. 물론 등산은 전혀 소소하지 않았다. 천신만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것에 가까웠으니. 제목은 그 바다, 그 야경인데, 정작 바다의 야경은 없다. 부둣가의 야경 뿐. 아 참, 부둣가도 바다는 바다구나. 내일은 내일이고. 내일은 체크아웃이고. 이 지독한 세상사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