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열차에 대비하는 자세

노르웨이 베르겐(보스)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이 죽일놈의 야간

여행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묻는다면, 단연코 앞에 '야간'이 붙는 교통 수단들이다. 야간열차, 야간버스, 모두 해당 된다. 자도 자는 게 아니고, 다음날 아침에 도착해봤자 체크인 시각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있으며, 그러니 거의 그로기에 가까운 상태로 만 하루를 보내야 하는 지옥의 시작이 바로 야간열차나 야간버스다. 하지만, 여행에서 돈을 아끼고 싶을 때 가장 효과적인 게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것 역시도 앞에 '야간'이 붙는 교통 수단들이다. 일단 하루치의 숙박료를 자연스럽게 표함되어 절약할 수 있다. 혐오 수단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이용할 수 밖에 없는 필요악이다. 필요악은 너무 약하다. 필요적 절대악에 가깝다. 몇 년 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비롯한 남서부 유럽을 다녀오며, '야간'이 붙는 것들에는 학을 뗐다. 술 한 잔을 안 마셨는 데도 숙취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달까. 그러고 보면 '야간'이 붙는 것 치고 좋은 게 별로 없다. 야간 할증도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절약이 철칙인 배낭 여행자에게 선택권은 별로 없다. 나는 오늘, 오슬로로 향하는 야간 열차를 탄다.


22시 59분이라는, 보기만 해도 흉물스럽고 공포스러운 시각에 출발하여 익일 06시 25분에 오슬로 역에 정차하는 여정이다. 59분이라니. 23시면 23시고, 22시 50분이면 50분이지, 홈쇼핑의 3만 8,900원도 아니고 저게 무엇인가. 저것이야 말로 너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엿먹여 주겠다는 일종의 메타포 아니겠는가. 이도 저도 아닌 시각처럼이나,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마냥 깨있을 수도 없는 그런 지옥으로 승객들을 보내 버리겠다는 지옥철도 59다. 아침에 표를 끊고 22시 59분이라는 숫자를 빤히 지켜보았다. 하, 개새끼. 체크아웃을 11시에 했으니, 기차를 타기 전 12시간 동안은 어디 머무를 곳도 마땅히 없다. 캐리어를 숙소에 두고, 나는 시간을우기 위해 베르겐에서 1시간 10분 거리의 보스(Voss)라는 도시로 향했다. 이곳의 숲이 멋있다는 소리를 들어서였지만, 솔직히 말해서는 정말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든 보내버리기 위해서였다. 야간, 야간, 야간. 세상 모든 게 야간으로 보이는 하루였다. 숲을 거닐다가 그늘이 나타나면 그래, 야간도 이렇게 어둡겠지 싶었고, 열차를 보면 그래, 야간에는 저걸 타야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06시 25분 도착이라니, 그 새벽에 숙소나 잘 찾아갈 수 있을까. 믿는다 구글아. 네가 유일한 희망이다.

보스로 갈 때 탔던 기차
이렇게 보니 조금 멋진 곳 같기도.

정말로, 물론 언제나 그랬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유독 아무런 정보도 없이 보스에 도착했다. 보통은 구글 지도 정도는 다운 받아가는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는 한다. 하지만 오늘은, 이 후에 야간 열차를 타야 한다는 압도적인 사실 때문에 그 전까지의 모든 일정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구글에 노르웨이 보스라고 검색하니, 정말 멋진 사진들이 많이 나온다. 내가 정녕 저기를 오늘 다녀온 건가 싶을 정도다. 조금이라도 꼼꼼한 사전 준비가 있었다면 더 잘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약간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보스 지역의 숙박료는 하루에 최소 10만원이 넘었다. 보스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못해도 하루는 거기서 자면서 트래킹을 하든 뭘 하든 해야 되는데, 10만 원이라니. 그저 '찍고 왔다'에 의의를 둘 수 밖에 없는 금액이었다. 그나저나 예쁜 도시였다.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 싸여 있었는데, 그 산의 꼭대기에는 눈이 내려 있었다. 그걸 보자 문득 스키를 타고 싶어졌다. 스키를 못 탄 지 너무 오래 되었다. 아마 초급자 코스에서 넘어지는 연습부터 다시 해야 될 듯 싶다. 이건 내 안전보다는 남들의 생명을 위해서다. 스키를 '탄다'는 생각이 드니, 그 '탄다'가 열차를 '타다'로 이어져, 의식의 흐름은 다시 야간 열차로 수렴되었다. 오늘의 야간 열차는 심지어 침대칸도 아니다. 게다가 애완 동물 반입도 허용되는 칸이다. 짖어대는 개만 없기를 바란다. 울어대는 아이는 물론이고.


처음 계획은 보스에서 19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베르겐에 오후 9시에 돌아와, 이전 숙소에 들러 망할 캐리어를 끌고 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보스에서는 마땅한 볼거리를 찾지 못했고, 간단한 트래킹 코스만 산책한 뒤 곧바로 기차를 타고 다섯 시에 베르겐으로 돌아왔다. 아일랜드에서부터 요즘 며째 자연 경관만 내내 보고 있는데, 물론 예쁘고 장엄하고 아름답긴 하다만 자꾸 보니 감흥이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보스 역시 멋진 도시이긴 했으나, 겨우 반나절 만으 아주 깊은 매력까지 알 수는 없었다.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러 들어갔던 보스의 상점에서, 오늘 최대의 수확물을 발견했다. 상점 입구 50m 전부터 벅차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 희미해 보이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면임이 확실한 어떤 공산품이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상점의 문을 열었다. 세상에. 컵라면뿐만 아니라 봉지라면도 판매되고 있었다. 얘들아, 너네 여기에서 뭐하는 거니. 감격하며, 신라면 두 봉과 김치라면 한 컵을 골랐다. 그래. 내일 오슬로의 호스텔에서 이걸 끓여 먹자. 그걸 상상하며 야간 열차를 버티자. 라면이라니. 그 어떤 향신료도 흉내낼 수 없는, 무척이나 몸에 나쁜 화학 조미료의 맵고 강렬한 맛. 더블린에서 만난 어떤 고마운 분 덕에 컵라면을 한 번 먹은 적 있지만, 봉지 라면은 처음이었다. 그래, 세상에도 구원은 있구나. 야간 열차를 타는 날 이런 선물을 발견하다니.

라면을 샀다.
라면을 들었다. 예쁘다.
스프도 예쁘다.
면도 예쁘다.
곱다.

하지만, 두 봉 중 한 봉지를 생라면으로 까먹어버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 조미료 가루의 매운맛을 어서 빨리 맛 보고 싶었다. 호스텔에서는 신라면 한 봉지와 컵라면 하나를 먹지 뭐. 라면을 개봉하고, '수출용'이라고 명확히 적힌 스프를 뜯은 다음에 털어 넣었다. 그 후, 경건한 마음으로, 어쩌면 마치 무당이 제사를 지내듯 조금은 신내린 듯한 몸짓으로, 라면 봉다리를 흔들었다. 부서지는 면 조각들이 파우더칠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신부, 어서 화장을 마치시오. 내 그대의 얼굴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오. 가루와 면이 적당히 섞인 것 같았을 때 라면을 다시 개봉했다. 오, 냄새부터 좋았다. 못해도 1분 정도는 사람 수명을 단축시키는 저 지독한 화학 조미료 냄새. 코카콜라의 비밀스런 원액만큼이나 제조법이 궁금한 신라면 스프의 비밀이었다. 소스가 골고루 잘 묻은 듯한 면조각 하나를 집어 물었다. 뚝, 아삭. 오도독. 그래, 바로 이 맛이었어. 이토록 완벽하게 과학적이고도 가학적으로 설계된 라면맛을, 우린 얼마나 천대해왔던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걸 놓쳐온 자신을 반성했다. 오슬로에서, 내 인생 최선의 라면을 끓여주마. 그 때 만큼은 내가 이연복이고, 최현석이다.

노르웨이의 숲?
베르겐행 열차

라면때문에 짐은 늘어났지만, 오히려 기분은 더 좋아진 상태로 베르겐에 도착했다. 고작 먹을 것 하나로 이렇게 행복해하는 게 유치해보여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희망이 있다면 살 수 있다는 걸, 숱한 격언들이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척박하고도 열악한 야간 열차에서, 나는 한 나절 후의 라면을 떠올리며 그 모진 시간을 견딜 수 있을 테다. 꼭 비싼 음식만이 영혼의 식사가 되는 건 아니다, 라고 하기에는 비싼 게 맛있긴 맛있고 몸에도 좋으며 영혼을 울리기도 한다. 마치 그저께의 사치스런 식사처럼. 하지만 라면 한 봉지라도, 잊을 수 없는 추억과 설렘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 국물 맛은 또 어떨까. 크으. 다 쓴 물 병을 오늘은 버리지 않았다. 라면 물을 아주 정확히 계량하기 위해서다. 어차피 야간 열차를 타고 나면 숙취의 기분을 잔뜩 느낄 수 있다. 해장에는 라면이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신라면, 나의 조미료. 몸 성하게, 잘 지내고 있어야 해.

잘 있어, 베르겐

그렇다. 야간 열차는, 이따위 기대감이라도 있어야 견딜 수 있는 교통 수단이다. 여기에는 어떤 낭만도 없다. 그저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심야 시간대에 이동한다는 건조한 사실 뿐. 거기에 식사칸의 술들은 더럽게도 비싼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여기는 북유럽이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샌드위치를 포함하여 장을 조금 봐야겠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베란다 프로젝트의 'Train'이다. 이 노래만 들으면 야간 열차에 관한 로망과 낭만이 피어 오른다. 현실은 쥐뿔도 없지만.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떠나는 걸까, 떠나가는 걸까,' 둘 다 아니다. 떠나지는 거다. 불편한 좌석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이제 출발까지 두 시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