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네

노르웨이 오슬로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온통 새하얀 세상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눈이, 많이, 내린다. 새벽에 도착한 숙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났더니, 정말 새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북유럽은 북유럽이구나. 생각해보면 이렇게 많은 눈은 이번 겨울에서는 처음이다. 눈에 대한 환상과 로망 같은 걸 잃어버린 지는 벌써 몇 년 되었다. 운전 면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싫다. 교통 체증이 일어나고, 길은 질척거리며, 시야는 방해되고, 또 걸어다니다 미끄러지기도 쉽기 때문이다. 대체 아이 때의 순진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니, 그때 순진하긴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단단히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눈정말 쏟아지듯 내리는 중이었다. 입을 아, 벌리고 눈을 맛 보았다. 아무 맛도 안 났다. 쌓인 눈을 한 웅큼 집어보기도 했다. 몹시 차가웠다. 눈은 여기든 저기든 거기서 거기고, 맛도 없고, 참 공평한 놈이구나. 하긴, 노르웨이 눈이라고 바닐라 아이스크림 맛이 날 리도 없으니. 새벽에 숙소를 찾아올 때까지는 눈이 내리지 않아 천만 다행이었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첫인상은, 오늘의 함박눈 때문에 '새하얀'이다.

종일 밖에 내놔도 아무 일 없는 돼지 가방
베르겐의 야경
베르겐 역에서. 굿바이 베르겐.

전 날 야간 열차 때문에 몸이 많이 피곤하기도 했고, 또 눈 때문에 제대로 관광하기도 어려운 만큼, 오늘은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뭉크 미술관만 잠깐 다녀오기로 마음 먹었다. 미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미술관을 가야 하는 이 슬픈 운명이여. 미술관은 여느 때처럼 무척이나 지루했고, 이해할 수 없는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곳의 사람들은 그 이해할 수 없는 그림들을 바라보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감상하는 중이었다. 그게 무척 지적으로 보였다. 그들이 부러웠다. 우리나라 미술 교육의 지향점이, 예술 작품들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안목을 함양하는 데 설정되었다면, 내 여행이 조금 달랐을까. 아니다, 이건 순전히 내 탓이다. 그냥 내가 미술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한 시간도 안 되어 뭉크 미술관을 나왔다. 여전히 많은 눈이 내리는 중이었다. 공원을 가로질러 숙소로 돌아왔다. 새하얀 숲길을 걷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어쩐지 북유럽의 눈은 조금 다른 것 같기도고. 이런 게 바로 사대주의인가. 돌아오는 길에는 작은 스케이트장과 그 옆에 아이스하키 경기장이 있었다. 스케이트를 신고 두 발로 서 있기도 힘든데, 현란한 스텝을 밟으며 스틱까지 들고 퍽을 운반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아이스하키도 참 멋진 종목이다. 굉장히 속도감 있고, 시원시원하고. 예전에 캐나다와 어떤 국가의 아이스하키 결승전 경기를 보며 감탄한 적 있었다. 그 멋진 아이스하키를 생활 체육으로 하는 동네라니, 새로운 볼거리였다.


항구 도시인 베르겐보다 오슬로에는 조금 더 현대적인 건축물들이 많다. 노르웨이는 입헌군주국이기 때문에 이 나라의 왕궁 역시도 수도인 오슬로에 위치해 있다. 기상 예보를 보니 내일은 눈이 오지 않을 거라고 하여, 눈이 덧입혀지지 않은 맨 얼굴의 오슬로를 볼 수 있을 듯하다. 눈이 오면 생각나는 영화가 몇 개 있다. 대표적으로는 오겡기데스까의 <러브레터>가 유명하겠지만, 내게는 작년에 개봉했던 <남과 여>라는 작품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핀란드의 하얀 설원 위에서 펼쳐지는 가슴 시리고 아름다운 불륜 이야기. 라고 하기에는 영상미도 참 멋지고, 먹먹한 듯 시린 애틋함도 풍겨오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배우 공유 역시 이 작품에서 가장 멋있다고 생각했으나, 그 놈의 도깨비 때문에 이건 다시 생각해봐야 될 것 같기는 하다. 이 영화를 만든 이윤기 감독만이 연출해낼 수 있는, 절제되면서도 담담하고, 또 때로는 담백한 그런 분위기가 참 좋다. 전작 <멋진하루>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과 여>까지 모두 관통하는 그런 감성이다. 특히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한 번이라도 '추잡한' 이별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간절히 꿈꿀 만 한 이별의 판타지다. 외도 사실을 알리고 이별을 통보한 임수정에게 보이는 남편 현빈의 태도는, 혹시 저 남자가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지막까지 침착하고 따뜻하다. 감정을 저 정도로 참아내는 건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별 영역의 SF 영화일 수도 있는데, 현빈의 행동에서는 헤어짐의 최종적인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까지 상대방에게 자신과 나눈 시간을 후회하지 않게 하는 성숙한 결별을 완성하려는 숭고함까지도 엿보인다. 정말 이상적인, 그래서 조금은 이상한 이별이다.


좋아하는 걸 너머 대사까지 달달 외울 지경에 이른 <뷰티 인사이드>의 이별도 눈 오는 날 이루어졌다. 그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 중 하나며, 볼 때 마다 가슴이 아린다. 눈 내리는 언덕을 함께 올라가다 김주혁이 한효주에게 나직하면서도 담담히 이별을 고하고, 들어가, 감기 걸리겠다, 며 마지막 남은 사랑을 애틋하게 전하던 모습. 생각해보면 나는 이런 종류의 침착하고 성숙한 이별에 대한 판타지가 있는 듯하다. 그건 지난 날까지의 내가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못난 사람이어서 더더욱 그렇다. 모든 관계에는 언젠가 끝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왜 인정하지 못했던 걸까. 확실히 그 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라고 느끼는 게 나이 먹는 일인 듯하다. 그 날의 못남을 단순히 어렸으니까, 라고 변명할 수는 없는 건, 그렇다고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자부할 수는 없는 데서 기인할 테다. 열렬히 사랑하며 헤어짐을 염두해두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기는 하나, 눈 앞에 닥쳐온 이별의 순간을 온갖 모진 말들과 행동들로 미루고 번복하려 한들 역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 동안, 허락된 마음을 다 하여 최선으로 사랑하고, 그러다 어떤 이유에서든 찾아온 이별의 과정도 어른스럽고 성숙하게 마무리지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는데. 잘 헤어지는 정말 중요하다. 그 짧은 이별의 순간이, 함께 나눈 사랑과 추억의 온도를 동결하는 시점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 않은 건 미련이 된다고 하지만, 오히려 이별의 순간에는 조금 더 참고, 견디고, 받아들이는 게 지금까지는 경험적으로 덜 후회스러웠다. 헤어짐이란, 대부분의 경우 불가역한 완전한 마침표이기에 더욱 그 모습에 성의를 기울여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새벽의 오슬로 역
숙소에서.
뭉크 미술관
숙소로 돌아오며.

숙소에서 <남과 여>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맥주와 청포도를 사왔는데, 정작 파일이 실행이 안 된다. 맥주 보다는 사케가 마시고 싶은 날씨이긴 한데, 여기는 유럽이니까. 이자카야를 찾을 수도 없으니. 오늘의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었지만, 대신 영화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선택했다. 헤어짐, 또 이별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더니 이 영화의 마지막 만큼이나 가슴 저밋한 헤어짐은 또 없었던 듯 하여서다. 한 사랑이 탄생하여 임종하기까지의 보편적인 기승전결을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만큼이나 상세히, 또 성실히 묘사한 영화 역시 마땅히 생각나지 않는다. 5년 이상의 시간 동안 내 인생 영화 1위였던 <파수꾼>을 제치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무한한 애틋함을 느낀다는 엠마의 대사는 볼 때 마다 울컥하게 된다. 침대에 누워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다가, 눈발이 조금 사그라들 때 잠을 청해야겠다. 망중한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 어제는 야간 열차를 탔고, 내일은 야간 버스를 타야 하는 빠듯한 스케줄인데, 정작 오늘은 한가하고 여유롭다. 그건 아마 모든 일정과 관광 욕구를 단념케 만든 엄청난 양의 눈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넬의 'Go'다. 겨울에 들으면, 특히 눈이 오는 날 들으면 더 '쨍'한 감정이 드는 좋은 노래다. 어둑해진 시간에도 여전히 흩날리는 눈발이, 그래도 창을 통해 바라보니 조금 아름다운 듯도 하다. 나가는 순간에는 아마 참혹하고 끔찍한 길이 펼쳐져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