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 (2016~2017 세계 여행)
떠나가고, 떠나보내고
정말 오랜만에, 그러니까 말하자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주 성의있고 정성들여 미술관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관람했다. 태곳적, 아니, 태굣적 이후 최초의 사건이었다. 미술 작품에 대해 오늘 '전향'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 건, 마치 900년을 살아 드디어 만나게 된 처음이자 마지막 도깨비 신부에게서처럼 이 곳 오슬로 미술관의 작품들에게 운명적인 끌림과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는 물론 아니고, 다만 시간을 때울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은 시간을. 오후 11시에 스톡홀름으로 출발하는 야간 버스를 탈 때까지 마땅히 있을 곳도, 할 것도 없었고, 그러니 미술관에서라도 최선을 다하여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한국처럼 시간을 '때울'만 한 소소한 유희거리들이 많은 나라도 정말 드물다. 거리 곳곳마다 있는 무슨무슨 '방'들의 존재가치를 새삼 느끼고 있다. 작품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보니, 아주 미약하게나마 진품의 아우라 비슷한 걸 느낄 수 있었다. 덧칠한 붓 자국이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은 바랜 색 등, 인터넷 검색으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물론, 인터넷으로 미술 작품을 검색하는 일 자체가 일상에서 거의 없긴 하다만.
오슬로 국립 미술관에는, 그 유명한 작품, 뭉크의 '절규'가 있었다. 그랬다, 그 작품이 있었다. 그걸 실제로 봤다. 저것이, '절규'구나,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작품은 인터넷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똑같겠지 그럼, 그걸 말이라고. 감흥이 이렇게나 없어도 되나 싶기도 했다. 내 미적 감각들아, 어서 잠에서 일어나 볼래. 너네 지금 그 '절규'를 보고 있거든. 양심이 있으면 뭐라도 좀 느껴야 되는 거 아니니. 걔네는 자는 게 아니라, 이런 쪽으로는 아예 감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탯줄 끊을 때 함께 사라진 존재들이다. 한국에서도 20년 넘게 없던 그 감각이 노르웨이에 왔다고 갑자기 피어날 리도 만무했다. 아주 유명한 이 작품을 실제로 보았다는 데에만 의의를 두었다. 그래도 나중에 자랑은 해야지. 저거, 내가 노르웨이까지 가서 실제로 보고 온 거야. 원래 삶이라는 게 허풍과 허세 사이를 오가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지. 이건 내가 못나서 그런 거지. 이번 여행에서 오슬로는 여행지보다는 거쳐가는 도시로서의 의미가 더 크고, 꼭 봐야지 싶었던 건 뭉크의 '절규' 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니, 오후 한 시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 작품을 보자, 오슬로에서의 모든 숙제를 다 해치운 듯한 후련함까지 들었다. 이젠 뭘 해야 하지 싶어 당혹스러웠고, 일단 다시 한 번 미술관을 한 바퀴 돌았다. 돌아다니다 보니 꽤 감동적인 작품을 하나 발견했다. 하리에트 바케르(Harriet Backer)라는 미술가의 '작별(The Farewell)'이란 작품이었다. 찾아 보니 노르웨이의 인상주의 화가라고 한다. 아, 미술에는 '주의'들이 너무 많다. '주의'들간의 세세한 구분이 오히려 내게는 미술에 쉽게 정을 붙이지 못하는 요인이 되는 것도 같다. 사실 그게 아니었어도 크게 관심은 없었겠지만.
'작별'이란 작품은, 딸이 어딘가로 떠나는 한 가정의 순간을 포착한 듯 했다. 그림 속 어머니는 고개를 돌리고 울고 있고, 아버지는 딸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으며, 역시 딸은 아버지를 아주 처연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모습이다. 과장해서 말하면, 이 작품에서 미술의 힘을 조금 느꼈다. 사진으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먹먹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림이다 보니 작품 표면의 질감이 물론 일정하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슬픔이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는 듯했다. 거기에, 딸의 처연한 눈빛이 너무나도 아렸다. 한 순간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화가는 사진가보다 몇 배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자연스럽게 그림 작품에는, 피사체의 순간을 그대로 '포착'해내는 사진보다는 조금 더, 작가의 감정이나 의도가 더 짙게 배여있게 된다.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사진도 잘 못 찍고, 미술은 아예 잼병이라 이 두 분야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얘기하기가 조금 민망하긴 하다.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딸의 처연한 시선에도 작가의 안타까움이 반영되었을 테니, 그게 자연스럽게 뭉클하게 다가왔던 듯 하다. 다시 느끼지만 미술은 너무 어렵다. 그냥, 그림에 묘사된 순간 자체가 참 먹먹하게 슬프고 뭉클했다. 이 그림에 대해 내가 말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상이다. 그래도 미술관을 거닐다 보면 꼭 하나씩은 마음에 와 닿는 작품을 발견하게 되는 듯하다. 한 미술관 당 세 개 씩만 되었어도 미술 서적을 읽어볼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도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이것도 허풍이긴 하다.
오직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만 방문한 미술관에서, 그래도 '작별'이란 작품을 발견한 건 다행스런 일이었다. 뭐라도 건져갈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오늘의 관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런 작품이, 또 그런 화가가 있다는 사실조차 평생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다. 그걸 알았다고 하여 내 삶의 질이 확연히 제고되는 것도 물론 아니겠지만, 티끌 같은 교양이 쌓이고 쌓이면 또 모르지. 미술관에서 나오기 직전에 '작별'을 한 번 더 보았다. 다시 보니, <가족의 나라>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떠올랐다. 일본에 치료차 방문하여 잠시나마 가족, 그리고 옛 지인들과의 시간을 나누고 있던 주인공 성호가, 갑작스런 북송 명령을 받고 돌아가던 날 아침의, 집안 전체를 감돌았던 안타까운 상실감과 묘하게 접점이 있는 '작별'이란 미술 작품이었다. 급히 치료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상황이 안 좋았던 성호에게, 그를 치료할 능력과 환경 모두 없는 북한으로의 송환 명령은, 시한부 선고나 다름 없을 터였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가족들의 재회는 성호가 살아서는 불가능한 일에 가까울 것이었고,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지만 차마 말하지는 못했던, 그러면서도 할 수 있던 것 역시 아무것도 없이 무기력했던 그런 아침이었다. 무척이나 무력하게 안쓰러운 결말을 가진 그 영화를 생각하니, '작별'의 처연함은 더해졌다. '절규'에서 절규하는 모습보다 여기서의 먹먹함이 훨씬 더 아프게 느껴졌다.
어제의 눈이 무색할 만큼, 오늘은 아주 쾌청한 날이었다. 햇빛이 쨍쨍했고, 해가 떠있는 동안은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눈이 부시기도 했다. 눈의 국가 답게 도로 위의 제설 작업은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거리들에는 아직 꽤 많은 눈이 쌓여있었다. 눈이 워낙 많이 내리는 나라라서 그런가, 길을 다니다 보니 유모차가 아닌 유모 썰매 비슷한 것도 보였다. 공원의 언덕에는 눈썰매를 타는 아이들도 많았다. 미술관에서 나와서는 그런 한가로움을 내내 구경하고 다녔다. 덕분에 '작별'과 <가족의 나라>로 인해 다소 침체되어 있던 마음도 조금은 상기되었다. 어제 워낙 많은 눈이 내렸던 관계로 길 여기저기가 질척거렸지만, 그렇게 밉지만은 않았다. 내가 언제 또 노르웨이 오슬로의 질척거리는 거리를 걸어보겠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오늘 밤 이 도시와 '작별'해야 하기에 그런 너그러운 자세를 가져볼 수 있었던 듯하다. 일상을 살아내는 서울에서였다면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온갖 불평을 쏟아냈겠지만. 여행의 추억과 아련함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 도시와 작별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시적인 마지막은 똑같은 시간을 조금 더 소중하고 특별하게 만든다. 일상에게 줄곧 함몰되고 마는 삶의 진실들 중 하나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일상의 거대함에 묻혀있거나 잊히었던 것들이 참 많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게 꼭 좋은 것들만 모아놓은 건 아니어서, 그 중에는 일상의 익숙함과 안정감이 얼마나 편안했는지에 대한 뒤 늦은 각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제 2월도 다 갔다. 거의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3월을 앞 두고도, 올해는 준비할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게 조금은 엉성한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만남과 작별의 간격이 굉장히 짧은 여행을 다니다 보니, 삶의 주기 자체가 그 전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 카페에 들어와 다음 달의 숙소를 예약하다, 문득 내 인생에도 삶의 현실과 이토록 무관한 3월이 있을 수 있구나 싶었다. 외국으로 참 오래 나와 있었다 싶으면서도, 여전히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이 많다는 게 때때로 굉장히 놀랍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러블리즈의 '작별하나'다. 노르웨이를 떠나고, 2월을 떠나보내고, 뭐 그렇게 작별할 것들이 참 많은 여행이고, 또 세상이다. 이렇게 말하니 세상 다 산 것 같아서 별로긴 하네. 오늘은 유독 여행의 처연함과 쓸쓸함만 부각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표본이 많을 수록 확률은 평균에 수렴하고, 그건 여행에서의 기분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여행에서는 불현듯 다시 자극을 줄 파동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게, 그래서 새로운 내일을 꿈꿔볼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여행과 일상의 가장 큰 차이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