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멋진 하루

스웨덴 스톡홀름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쉽게 속단해서는 안 된다는 새삼스런 깨달음

잘 잤다. 이렇게 상쾌할 수가. 새벽 두 시와 다섯 시에 잠깐씩 깨긴 했으나, 다시 자는 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오랜 시간 잠을 잤고, 밤샘 이동의 여독과 짜증이 말끔히 가셨다. 여유있게 씻고, 느긋하게 준비했다. 이 여유가 왜 이리 낯설고 반가운지 생각해봤더니, 최근의 일정이 확실히 벅찼기는 벅찼다. 늦잠을 잘 수 있던 건 베르겐에서의 첫 날 이후 처음이었고, 날짜상으로는 근 일주일 만이었다. 예약한 투어나, 정해진 체크아웃 시간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했던 날들이 있었고, 그 와중에 또 이틀은 각각 야간 열차와 버스로 이동하느라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늘 시간에 쫓기며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대충 짐을 쌌는데, 오늘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정말 즐거웠다. 이것도 스톡홀름 신드롬의 일종인가. 악랄한 여행 일정이 잠시 선사한 여유에도 탄복하고야 마는 이 심리가 말이다. 빡센 일정은, 나같이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조차도 이토록 작은 소소함에 감동하게 만든다. 이 정도로 소소한 감동을 위해서 굳이 그런 일정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 앞으로 몇 번은 더 야간 열차나 버스를 이용하게 될 테니, 숙소에서 맞는 아침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건넸다.


상당히 많은 기대를 안고 도착한 도시가 바로 스톡홀름이었다. 하지만 오전까지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나게 된 '영국스러움'만 가득했다. 그 '영국스러움'이라는 건 우중충한 날씨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특유의 분위기인데, 얼마 전까지 그 곳에 40일 이상 머물렀던 내게 '영국스러움'은 전혀 이국적인 광경이 못 된다. 건축물들의 외관도 예쁜 편이었으나, 아주 특별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거기에 약간의 보슬비까지 내렸다 말았다 하는 중이었다. 남은 여행에서는 제발 지랄스러운 날씨가 없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그 바람을 지닌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지랄스러움을 마주하니 도대체 이 도시가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스톡홀름은 물의 도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구조적으로 비슷한 곳이기도 하다. 그건 곧장 걸어가면 얼마 되지도 않을 짧은 거리를, 다리가 있는 곳까지 빙 둘러 돌아다녀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 와중에 비까지 내린다니, 그게 어떻게 불쾌하지 않을 수가. 날씨까지 이러니, 비를 핑계대고 숙소로 돌아가 그저 뒹굴고 싶은 충동이 잔뜩 들었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인 게 분명했다. 아주 강한 극성을 지닌 자석, 그 와중에 나와는 전혀 반대 극성의 존재. 침대에게서 중력을 느꼈다. 중력이라고 하니, 3년 전 이 즈음에 발매된 넬의 'Newton's Apple' 앨범이 떠올랐다. '중력 3부작'이라 불리는 프로젝트의 마지막이자 그들의 정규 6집 앨범이었다. 그래 어쩐지, 자꾸 내가 뉴턴의 사과가 된 느낌이 들더라니.

왕궁
멀리서 바라 본 왕궁
오전, 조금씩 비가 내릴 때의 스톡홀름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으나, 말했다시피 이곳은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빙 둘러 다녀야 하는 도시고, 그러다 보니 비가 그쳤다. 음, 그러니 내가 숙소로 돌아가야 할 중요한 명분이 사라졌다. 혼자하는 여행이라고 매 순간 줏대없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속는 셈치고 관광을 조금 더 계속해보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 그때까지는, '마음을 먹어야'할 정도로, 스톡홀름은 그저 그런 도시였다. 목적지는 관광지들이 몰려있는 감라 스탄이었다. 스톡홀름에서는 구 시가지 정도 되는, 서울에서는 인사동 같은 곳이라고 한다. 잠깐, 인사동이 구 시가지였던가. 4대문 안에 있으니 위치적으로는 맞긴 하겠다. 인사동이나 명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감라 스탄이 스톡홀름의 인사동 같은 동네라는 설명을 보았을 때 흥미를 잃었었다. 인사동과 명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내가 한국에 살기 때문이라는 걸 간과했던 착각이었다. 나는 스톡홀름에서는 당연히 외국인 관광객이고, 현지 사람들에게 이 곳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게는 여행 욕구가 재점화된 곳이 오히려 바로 감라 스탄이었다. 오로지 유명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방문했지만, 그 좁은 골목들과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스톡홀름의 재미란 이 곳에 있었구나, 하는 즐거움도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스웨덴 최고의 축구 선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감라 스탄 지구

비가 그쳤다고 해까지 쨍하게 뜬 건 아니었으나, 이전보다 걸어다니기는 훨씬 수월했다. 낙관적인 마음을 먹는다고 모든 일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결되는 건 절대 아니다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여긴 별로야'에서 '여기 괜찮네'라고 마음이 전향되며 꽤나 유의미한 감상의 차이를 얻을 수 있었다. 분명 이전까지는 그저 그런 건축물에 다름 없던 왕궁과 의회마저도, 오, 저렇게 생겼구나 하는 놀라움으로 승화되었다. 구역과 구역을 잇는 수많은 다리들도, 짜증나고 귀찮기보다는 이 도시를 매력 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처럼 느껴졌다. 감라 스탄의 작고 좁은 골목들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중간중간 예쁜 카페들도 있었고, 나는 그 중 한 곳에 들어갔다. 여유있게 시작한 하루였던 만큼,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느긋하게 마시고 싶었다. 직원이 무척이나 친절하고 상냥했다. 어디를 여행하든 이렇게 친절한 현지인을 만나게 되면 도시 전반에 대한 인상과 이미지도 동시에 제고된다. 북유럽 사람들은 몹시나 까칠하고 몰인정할 것 같다는 부당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운전자들의 매너도 상당히 좋은 편이라 이곳 신호 체계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나를 줄곧 배려해주기도 하고. 북유럽에 대한 나쁜 편견들 중 정확한 건 물가가 높다는 것 이외에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것도 아주 옳지는 않은게, 물가가 높은 걸 넘어 정신 나간 듯한 경우들도 꽤 있. 특히나도 공포스러웠던 노르웨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

우연히 들어갔지만 참 좋았던 카페

아침에 하루치 대중교통 표를 살까말까 하다가 구입하지 않았는데, 참 잘한 결정이었다. 덕분에 도시 전체를 걸어다니며 음미해 볼 수 있었다. 오후 세 시쯤 되어서는 오늘 유일하게 쨍한 햇빛이 도시를 비추었다. 아침부터 돌아다녔기에 약간의 피곤함을 느껴 숙소로 돌아가려는 찰나였는데, 그 와중에 햇빛이 비추자 나는 기회다 싶어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저팔계도 아닌데, 선글라스만 쓰면 이상한 자신감이 샘솟는다. 세상 모든 거리가 런웨이로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고, 발걸음이 세상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그런 위풍당당함으로 숙소로 돌아가기에는 못내 아쉬웠다. 아까의 카페에서 내일쯤 가보려고 마음에 검색해 둔, 스톡홀름 전망을 볼 수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이미 나는 이 도시에 매료된 상태였다. 거기에 선글라스의 효과까지 더 해서, 계단을 내려올 때는 '폴짝'까지 해버리는 약간의 추태와 조증 증세도 보였다. 내가 내딛고도 조금 민망한 걸음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다리 끝마다 있는 계단들이 특히 중요하다. 그걸 놓치면 훨씬 더 비잉 둘러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나치는 사람들 중 일부가 가끔 내 선글라스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도 같았으나,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가는 길에는 아주 큰 배들도 몇 척 보였다. 영국에서 아일랜드로 갈 때 만큼의 크기였다. 크루즈 선박들이었는데, 내가 탔던 것보다는 조금 더 타이타닉스럽게 생긴 고급 배들이었다. 고작 그 거리를 이동하는데 배를 탄다고 홀로 신이 났던 몇 주 전이 생각나 조금 웃기도 했다.

바닷가 근처에서. 스톡홀름은 물의 도시.
철교에 올라
철교에서 바라 본.
옆을 지나가던 열차


역시 골목
의회
걸어다니기 참 좋은 도시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 국가 간 이동하는 데 육해공의 모든 이동수단들을 다 이용했다는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남은 여행에서는 버스든 기차든 주구장창 육지 교통만 주로 이용할 듯하지만. 그것도 주로 야간으로, 하아. 목적지 근처에 도착하여 계단을 조금 오르자 테라스 비슷하게 탁 트인 평지가 나왔다. 보니까 그 곳의 이름 자체가 실제로 테라스였기도 했다. 좁은 골목들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다, 이렇게 넓은 시야로 도시를 내려다보니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 참 멋진 도시라고 몇 번을 더 감탄했다. 이 도시를 더 운치있게 만든 건 끊임없이 오가는 열차들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릴때부터 나는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보면 괜한 애틋함을 느끼고는 한다. 어디에서 어딘가로 떠난다는 기차의 특성 때문인 건가. 이건 어느 교통 수단이든 마찬가지인데 왜 굳이 기차와 철도에만 이런 애틋함을 느끼는 지 모르겠다. 서울의 학교 정문 바로 건너편에도 철교가 하나 있는데, 학교를 나서며 어쩌다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보면 그 날은 굉장히 운이 좋은 하루라 생각 되고, 그걸 기념하여 혼자서든 여럿이서든 술을 마시곤 했다. 그렇다. 원래 술은 이런저런 핑계로 계속 마셔대는 무언가다. 스톡홀름 중앙역을 기준으로 철도망이 도시 이곳저곳에 뻗어 있었고, 짧은 교외선을 비롯하여 아주 긴 노선들의 기차들까지 다양한 열차들이 쉬지 않고 오고가는 중이었다. 기차의 움직임은 해질녘의 도시와 더욱 잘 어울렸다. 한참을 지켜보다, 테라스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스톡홀름의 물가는, 노르웨이의 그것보다, 아주 약간, 싸다. 인간은 희망과 낙관을 먹고 사는 동물인 게, 여기서 방점은 '아주 약간'이지만, 마음은 오직 '싸다'에만 주목한다는 점이다. 북유럽의 물가는 너무 비쌀거야, 라는 선입견에, 그 선입견이 만들어낸 예상치마저 뛰어 넘었던 노르웨이의 물가를 겪고 나니, 스톡홀름의 '아주 약간' 저렴한 물가조차도 굉장히 낮아보이는 착각까지 일어났다. 이것도 스톡홀름 신드롬의 하나이지 않을까. 음, 그나마 아는 용어라고 너무 막 갖다 붙이는 듯하다. 자제해야지. 어쨌든 아주 약간이라도 저렴하다는 사실은, 오늘 무려 두 차례나 카페에 들어가도록 일조했다. 이번에는 맥주를 마셨다. 스웨덴 맥주라는데, 맛이 꽤 괜찮았다. 도대체 우리나라의 맥주는 어떤 성의 없는 공정을 거치기에 그런 참담한 맛이 나오는 걸까. 한 병의 맥주를 느긋하게 비우고 나오니, 기분은 이전보다 더욱 상기되었고, 해는 완전히 떨어져 잇었다. 어둑해진 거리를 좋은 기분으로 걸어왔다. 이젠 진짜로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호스텔로 복귀하려는 찰나마다 그 마음을 번복토록 하는 계기들이 있었다. 멋진 하루란 그런 소소한 우연들이 서로를 보듬고 도우며 만들어내 근사한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스톡홀름은 걸어다니기 참 즐겁고 예쁜 도시였다. 날씨가 변덕스럽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마저도 이 도시의 매력인 듯하다. 어쩌면 날씨보다 훨씬 더 변덕스럽고 지랄 맞은 건 나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1일권을 끊어 오늘 보았던 그 열차들로 이 도시를 다녀볼 생각이다. 여기저기 걸었던 곳을 열차로 지날 때마다 어쩐지 반가움이 들 듯 하다. 물론 내일 가장 먼저 할 일은, 오늘과 같이 아주 늦게까지 자는 것이겠지만.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태연의 'Time Lapse'다. 넬의 김종완이 작곡한 신곡으로,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음원 사이트에서 나를 선물처럼 기다리고 있던 노래였고, 상당히 좋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보였던 스톡홀름과도 잘 어울리는 곡인것도 같, 아니다, 이건 억지다. 그냥 오늘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라서 골랐다. 많은 시간을 걸어다니며 들었으니, 나의 여행과도 아주 밀접한 노래일 테다. 생각해보니, 진짜 '타임랩스'를 하여 미래를 보고 오지 않는 한, 한 도시를 쉽게 속단해서는 안 되겠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을 느꼈던 하루였다. 아주 조금만 더 걸어도, 혹은 아주 약간의 시간만 더 지나도, 굉장히 멋진 모습이 펼쳐질 수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