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고

스웨덴 스톡홀름(웁살라)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여행 중의 작은 여행

사람들마다 그들에게 동심, 혹은 원초적 욕구에 비슷한 향수를 불러오는 것들이 각각 다르게 존재한다. 내게 있어 그건 기차다. 호불호의 가치관이 미약하게나마 정립되기도 전이었던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기차만 보면 괜히 가슴이 뛰고 설레곤 했다. 돌이켜보면 참 다행스러운 애정 형성이었다. 부웅, 하고 지나가는 고급 스포츠카에 마음이 동했다면 어쩔 뻔 했는가. 더군다나 내 동심이 더욱 자극되는 건 KTX 같은 고속 전철보다는, 새마을호나 무궁화호처럼 조금 느린 열차들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의 교외선이 사라진 건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교외선 기능을 하는 경의중앙선이 있기도 하나, 그건 너무 현대식 전동차다. 외관 뿐만 아니라 내부 역시도 영락 없는 전동차인 게, 나의 탑승 의욕을 대폭 하락 시키는 주범이다. 모름지기 '기차'라 불리기 위해서는, 좌석 배치가 오직 벽면에 일자로 붙어있어서는 곤란하다. 좌석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가, 그 어릴 적 내가 유일하게 견지할 수 있던 '기차'와 '지하철' 사이의 유의미한 구분 기준이었고,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작용한다. 정말 가끔씩 서울을 벗어날 용무가 있는 날이면 일부러라도 경의중앙선을 탑승하기도 하는데, 바깥으로 보이는 기찻길의 풍경이 좋긴 해도 썩 예전 기분은 안 나는 게 사실이다. 거기에, 2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서울역이나 홍대입구역의 기나긴 환승통로를 걸어야 한다면, 그냥 버스를 탈 걸 내가 미쳤지 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어제 스톡홀름의 이곳저곳을 걸어다니다 보니, 도시를 가로 질러 이동하는 수많은 기차들을 보게 되었고, 오늘은 꼭 저 교외선을 타보리라 결심했다. 스톡홀름 근교들 중 어떤 곳을 갈까 검색하다, 북쪽으로 한 시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웁살라'라는 도시를 발견했다. 아무리 봐도 아랍 국가의 지명 같은 곳이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의 최대, 최고의 성당도 이 도시에 존재한다고 한다. 음, 그렇군. 아무렴 상관없었다. 오늘만큼은 기차는 이동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였으니. 숙소 근처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스톡홀름 중앙역으로 향했다. 날이 밝음에도, 날씨 자체는 어제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아침 햇살만 보고 오늘은 가볍게 입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했으나, 두텁게 걸치고 나오기를 참 잘했다 싶은 날씨였다. 참 별 거 아닌 결정이고 선택인데, 이런 게 뜻대로 될 땐 은근히 소소하게 기쁘다. 티켓 판매기에서, 60일 넘게 여행을 다니고 있는 사람답게 아주 능숙한 손놀림으로 표를 샀다. 이것도 은근히 기뻤다. 터치스크린을 몇 번 누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지만, 어쩐지 베테랑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기차 표의 모양새가 별로인 게 조금 아쉬웠다. 영수증 같은 종이 한 장이었는데, 이건 예전의 영화표가 자취를 감추고 성의없는 영수증으로 대체되던 과도기에 느꼈던 당혹스러움과 비슷했다. 그래, 효율성이 중요하겠지. 극장이든, 기차역이든.

20170301_122311.jpg 스톡홀름 중앙역의 작은 출입구. 메인 출입구는 따로 있다.
20170301_122326.jpg 역사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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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1_123435.jpg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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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1_123628.jpg 웁살라 중앙역 행 기차
20170301_123744.jpg 열차 내부

교외선의 장점은, 느리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일상의 여유를 음미할 줄 아는 사람처럼 보일 테지만, 사실 나는 인터넷 로딩이 뜻했던 시간보다 단 1초라도 버벅돼도 굉장한 짜증과 불쾌함을 느낀다. 그러니 이렇게 성미 급한 내가 어쩌다 교외선 같은 느린 기차를 좋아하게 됐는 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창가 좌석에 자리를 잡고, 지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 매력적인 광경이 펼쳐지진 않았다. 런던이나 마드리드에서 교외선을 타면, 도심과는 전혀 다른 목가적인 분위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런던의 교외선에서는, 도시를 조금 벗어나면서부터 보이는 푸른 초원으로부터의 기분 좋은 이질감이 좋았다. 이곳은 북유럽이라서 그런가, 그런 모습은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 속도로 가는 기차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소 기분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대도시들을 여행할 때마다, 일정이 허락하는 한 가급적 많은 근교 지역들을 가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도심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단순하게 거기까지 가는 여정 자체가 우선 즐겁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마다 버스보다는 기차를 주로 이용했던 것도 한 몫 했을 듯하다. 근교 여행은, 말하자면 여행 중에서의 작은 여행이다. 보통 큰 도시에는 2, 3일 정도 '머무르게' 되고, 바쁘게 이동하는 여행에서 이 정도의 '머무름'은 '체류'와 같이 긴 기간이기 때문에, 근교 여행은 한 도시라는 베이스캠프에서 여행을 준비하는, 여행 속의 또 다른 작은 여행이 된다. 그냥 주변부에 잠시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환기가 될 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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웁살라의 대성당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여행하며 굳이 성당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겠다는 확신 이외에는 사실 별 감흥을 전달하지 못했다. 음, 저곳이 성당이구나, 그래서 뭐, 하는 마음이었다. 웁살라 투어리스트 센터의 직원은 이곳이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최대, 최고의 성당이라는 걸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성당 자체가 장엄하거나 압도적으로 느껴지지는 못했다. 웁살라라는 도시 전체는 마치 작은 대학 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찾아보니 무려 스웨덴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라고 한다. 그럼 여기가 한국으로 따지자면, 도시 규모나 수도와의 인접성 등을 고려해보았을 때 인천 정도 되는 곳이란 말인가. 그런 것 치고는 다소 심심하고 조용한 도시이기도 했다. 대학 도시라고 느낀 이유는, 역시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 교육 기관 웁살라 대학교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내일부터 한국에서 개강을 맞이해야 할 수많은 사람들과 조금의 동질감을 느껴볼 수 있었다. 나도 대학교에 오긴 왔다고. 도시를 걸어다니며, 여행의 아주 초반에 방문했던 옥스퍼드를 아주 오랜만에 떠올려보기도 했다. 옥스퍼드든 웁살라든, 대학가라고 하기에는 내게 있어 참 심심한 동네들이었다. 대학가라면 막 붐비고, 왁자지껄하고, 그래야 하는 건데, 어찌 이리 도시가 차분하고 조용할 수가. 이것이 바로 지성의 침묵인가, 아니면 침묵하는 지성인가.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위치한 성곽을 따라 산책했다. 중간중간 예쁜 건물들도 없는 건 아니었으나, 오늘의 여정이 기차 여행에 방점이 찍혀있지 않았다면 다소 아쉽게 느껴질 만한 도시였기도 했다. 물론 이 도시에 별다른 기대 자체를 품지 않았었고, 역시 큰 관심이나 궁금증 없이 방문했기에 감흥이 덜했을 수도 있고.

20170301_135335.jpg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가장 높고, 크다는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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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1_141336_003.jpg 성곽 근처에서 바라본 웁살라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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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1_143200.jpg 꼬마가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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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1_145330.jpg 웁살라 공원과 거리들의 모습. 한적하고 조용한 대학 도시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역시 기차를 탔고, 스톡홀름 중앙역에 내려서는 이곳저곳을 그냥 발길 닿는대로 돌아다녔다. 겨우 3일째 있는 거면서, 여기가 내 '나와바리'지 하는 으쓱함까지 조금 느꼈다. 일종의 자만심이었는데, 그러다가 잠시 길을 잃어버리면서, 스스로에게 굉장히 민망하고 우스운 꼴이 되고야 말았다. 역시 어디서든 방심은 금물이다. 스톡홀름은 특히 해질녘에 아름다운 도시다. 아마 전세계 모든 도시들이 해질녘에는 유독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겠지만, 그래서 이 말은 해질녘에도 볼품 없는 도시는 관광지로서는 최악 중 하나다, 와 같은 의미인데 어쨌든, 스톡홀름은 분명 그 중에서도 상위권이다. 이번 여행으로만 국한시켜 보면, 스톡홀름은 영국의 에든버러 만큼이나 해가 질 때 멋진 경관을 연출하는 중이다. 정말 생각없이 이리저리 걸어다니다, 문득, 나와는 다른 분야를 전공하고 있는 남들은 같은 곳을 여행할 때 어떤 감상을 받을지 궁금해졌다. 이를테면, 아까의 성당을 보며 과연 건축공학이나 역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조금 더 특별한 감회를 느낄지, 아니면 유럽의 숱한 미술품들을 볼 때 있어서의 미대생들의 감정은 어떤지. 도시를 걸어다닐 때 도시공학과 전공자들은 뭔가 다른 감상을 받게 되는 지. 이렇게 생각해보면 내가 공부하는, 아니지, 전공이라고 이름만 걸치고 있는 경영학은 참 매력 없는 학문이다, 라고 하기에는 그냥 나의 상식과 식견이 모자란 탓이겠지만, 여행을 다니며 가끔씩은 다른 이들과 느낌과 감상을 공유하고 교류하는 일이 인생에서 꽤 유의미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혼자 하는 여행이 가끔은 이렇게 아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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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1_165227.jpg 돌아올 때 이용했던 열차

다시 찾아온 감라 스탄 지구에는 역시 예쁜 카페들이 많았다. 그 중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한 곳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스톡홀름의 숙소 위치가 정말 좋다. 어찌 이리 최적의 장소를 골랐을까 내가 대견스러울 지경이다. 어떻게 골랐긴, 어플 뒤지다 저렴한 거 선택했는데 그게 어쩌다 얻어 걸린ㅍ거지. 입지를 설명하자면, 숙소가 중앙역에서는 걸어서 10분이고, 감라 스탄으로 가는 건 2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찾아가는 길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고. 그러니 늦은 저녁에도 괜찮은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는 여유를 부려볼 수 있었다. 교외선을 왕복 두 시간 탄 것도 여정은 여정이라고, 맥주 한 잔에 피로가 가시는 듯했다. 이 짧은 여행에도 피로가 남았다니. 도대체 내 몸의 체력이란. 하긴, 웁살라에서 또 적지 않은 거리를 걸어다니기도 했구나. 지도를 보며, 내일은 스웨덴 서쪽의 발트해 근처로 다녀올까 하는 계획을 얼핏 세웠다. 스톡홀름 주변의 날씨도 상당히 변덕스러워, 아마 내일이 돼 봐야 최종적인 결정을 할 수 있겠지만. 스웨덴 맥주가 은근히 맛있다. 호가든 비슷한 향인데, 내가 좋아하는 맛이다. 두 병을 비우고, 약간의 취기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어디 머물 곳이 있다는 게, 또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새삼 참 반갑고 고마운 저녁이기도 하다. 넬의 '시간의 지평선'이란 노래에는 '세상 어딘가에 버려져도 다시 돌아갈 곳이 있었고'라는구절이 있는데, 어쩐지 이 숙소가 그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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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1_173927.jpg 해질녘의 스톡홀름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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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1_174820.jpg 감라 스탄 지구의 골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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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1_180301.jpg 예쁜 카페에서 오늘의 마무리

술을 마시니 혼자 괜히 또 애틋해진다. 꽤 몰려오는 피로를 다독여 줄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이소라의 '너에게'다. 어느덧 3월이다. 곧 완연한 봄도 시작되겠지. 두터운 옷차림으로 돌아다닐 날도 그러고 보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