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스톡홀름-아비스코 (2016~2017 세계 여행)
꼭, 제발.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영화 <인터스텔라>이 명대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는 것 이외에는 마땅한 도리가 없는 경우들도 상당히 많다. 실연의 상처가 아무는 것도 그럴테고. 군대의 전역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이미 탑승해버린 야간 열차도 정말 막막할 따름이다. 스톡홀름에서 출발하여 스웨덴 북부의 아비스코로 향하는 기차는 총 18시간 가까이 소요된다. 스웨덴이 이렇게나 광활한 나라라는 걸, 어제의 야간 열차가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그 18시간 동안, 평생을 모르고 살아도 괜찮은 것들이 역시 세상에는 꽤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학창시절 수업 시간에 '통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몇몇 교사들은 통일이 되면 육로로 유럽 여행을 갈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곤 했다. 물류면 몰라도, 사람이, 유럽을, 서울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간다고? 이 시대에? 맨정신으로 그럴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 광활한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데만 며칠이 걸릴 텐데, 거기에 기차 표값이 아주 싼 편도 아니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저리 단순하게 주지시키는 교사들은 정말 반성해야 한다. 난 당당히 얘기할 수 있다. 그런 날이 오더라도, 가급적 비행기를 타고 다니라고. 스웨덴 남북부를 종단하는 18 시간도 그렇게 답이 없었는데, 서울에서 유럽은 오죽할까.
오후 다섯시 반에 출발하여 다음 날 오전 열 한 시에 도착하는 기차였다. 18 시간은, 도무지 엄두도 안 나고, 감도 안 잡히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사납고 큰 맹견들을 보면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 나도 기차 타는 걸 참 좋아하기는 해도, 이 아득한 여정 앞에서는 그저 숙연해졌다. 오전에 스톡홀름 근교 도시를 하나 다녀올까도 싶었지만, 이후 장거리 여행에 지장이 있을까봐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내내 카페에 앉아 있었다. 스톡홀름의 숙소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지만, 체크아웃 시각이 열시 인 건 다소 당혹스러웠다. 그렇게나 빨리 투숙객을 내보내서 뭐 하려고. 카페에서 커피를 몇 잔 마시며 지난 여행 사진들을 주욱 살펴 보았다. 얼굴살이 조금은 빠진 듯하여 잠시 기쁘기도 했다. 런던에서 찍은 첫 사진에 비하면 그래도 사진 찍는 게 나름 발전했다 싶기도 하고. 초콜릿과 과자, 그리고 물 등을 비롯한 이런저런 전투 식량들을 구매한 뒤, 표를 찾고 플랫폼으로 나갔다. 내가 탈 기차는 스톡홀름에서 출발하여, 스웨덴의 키루나와 아비스코를 거쳐 노르웨이 북부 지역까지 이동하는 열차였다. 워낙 장거리라 침대칸을 이용했는데, 표를 예약하기 전에 아주 잠깐, 좌석에 앉아 가도 상관없지 않을까 했던 고민이, 이 후에는 다소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행스런 결정이었다.
침대칸은 난생 처음이었다. 사실 3년 전에 바르셀로나에서 파리로 이동할 때 거의 이용할 뻔 했었으나, 어떤 사정으로 열차가 취소되면서 그 기회를 놓쳤다. 침대칸은 6인실의 좁은 방이었고, 그 좁은 방에 여섯 명이 다 들어찼다. 좌석을 침대로 바꾸기 전에는 다닥다닥 붙어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 명의 독일인과 네덜란드, 뉴질랜드, 스웨덴 사람 한 명씩, 그리고 나, 이렇게 6명이 함께 객실을 썼다. 침대칸이라고 하여 으리으리한 침대가 처음부터 있는 건 아니다. 좌석의 등받이가 가운데 침대가 되는 식으로, 변신에 가까운 설치 과정이 필요하다. 그건 곧, 남이 앉았거나 등을 기대었던 곳에 머리를 대고 잠을 청해야 한다는 소리지만, 그 정도의 불결함이 문제였다면 처음부터 이 열차를 이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독일인 한 명의 인도 여행기를 들으니, 그 곳의 기차에 비해 스웨덴의 야간 열차는 아주 고급이라고 한다. 저녁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서로 두서없이 떠들어 대다, 물론 영어를 무지하게 잘했던 그들에게는 두서가 있었겠지만, 침대를 설치하고 잠을 청했다. 편하지 만은 않은 침상에 누워 어찌 잠을 자나 싶었는데, 잘 잤다. 아침 10시에 체크아웃을 했던 덕분에 몸이 많이 피곤한 상태였고, 음악 몇 곡이 실행되자 바로 잠을 잤던 듯하다. 물론 중간중간 뒤척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이 정도면 더 없이 훌륭한 편이었다. 너무 심각하게 걱정해서 그랬는지, 생각보다는 아주 괜찮았다. 물론 좌석에 앉아갔다면 정말 죽어났겠지만. 또 그렇다고 18 시간이 마냥 괜찮기만 했던 것은 역시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세상은 정말 설국이었고, 열차는 설국 열차 그 자체였다. 하얗게 눈이 내린 숲 속을 가로지르고, 양쪽에는 온통 새하얀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정말 경이로운 아침이었다. 오늘의 야간 열차에 대한 기억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건, 바로 이 장면 덕분일 지도 모르겠다. 눈을 엄청나게 싫어하는 나지만, 참 사랑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창 밖의 광경이었다. 뭐 세상이 전부 눈이니, 그걸 싫어하고 미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거대한 무력감도 한 몫 했겟지만. 열차에서 창밖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원이 끝 없이 이어졌고, 도착한 아비스코 기차역도 온통 '새하얀 색' 뿐이었다. 그 깨끗한 하얀 색에 더러운 발자국과 캐리어 흔적을 남긴다는 게 다소 미안할 지경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체크인 시간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고, 짐을 맡겨 놓은 채로 아비스코 국립 공원으로 산책 아닌 산책을 다녀왔다. 산책이라 하기에는 눈 길을 걷는 게 조금 벅차 몇몇 구간은 차라리 하이킹에 가깝기도 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알파인 스키를 이용하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스노 모빌을 탔으며, 도보 여행자들은 중무장을 한 상태로 하이킹을 했다. 나는, 아무런 장비도, 대책도, 준비도 없이, 평소와 다름 없는 운동화로 그곳을 걸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아주 춥지는 않았으나, 생수에 살얼음이 잡혔던 것으로 보아 기온 자체는 상당히 낮은 듯했다. 아비스코처럼 눈이 많이 내리고 추운 지역은 차라리 어느 정도의 영하 기온이 낫다고 한다. 영상이 되는 순간 눈이 녹기 시작하여 굉장히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리 미끄럽지 않아 보이는 곳들을 골라 걸었음에도, 두 번 정도 넘어지기도 했다. 넘어지는 김에 옆에 쌓인 눈을 맛 보기도 했는데, 역시 여기 눈이라고 별다른 맛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비스코는, 어쩌면 이 여행의 거대한 하이라이트가 될 수도 있는 장소다. 전세계에서 오로라가 가장 잘 보인다는 곳이 바로 여기기 때문이다. 오로라는 날이 맑을 때 더 선명하다고 하는데, 다행히 오늘 이곳의 하늘은 아주 푸르다. 다만 우려되는 건 오로라가 어제 굉장히 활발했다고 하여, 오늘은 그에 미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뭐 그래도, 전반적인 조건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은 날이다. 내가 이 여행에 가진 행운의 총량이 얼마나 되는지, 혹시 부족하다면 먼 미래의 행운을 좀 끌어다가 쓰고 싶은, 그런 기회다. 나중에 복리로 열심히 살아 그 행운을 갚을 테니까, 어떻게 좀 땡겨줄 수는 없는지, 내 팔자에 간곡히 호소해보는 중이다. 오로라는 겨울에만 볼 수 있고, 오늘이 아니라면 사실상 당분간은 기회가 없기에, 어떻게 보면 조금은 절박한 심정이기도 하다. 아비스코의 자연 경관 그 자체도 정말 예쁘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오로라, 오로라, 오로라 뿐이다. 뭐가 됐든 우선 오로라를 봐야 이 자연의 아름다움도 마음 속에 남을 듯하다.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 18 시간 동안의 여독을 잠시 푼 뒤, 이런저런 채비를 시작해야 할 듯 하다. 부디, 물론 그 동안 운이 지지리도 나빴던 건 아니지만, 굳이 또 뒷끝을 부려보자면 영국 여행에서 날씨가 지랄 맞았던 적이 많았으니, 오늘만큼은 행운이 나의 편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잊어버리고 싶어요'다. 아마 이 노래를 들을 때 쯤 열차에서 잠이 들었던 듯하다. 그런 평안과, 행운과, 기적이, 몇 시간 후에도 펼쳐지기를. 꼭. 제발. 이거 하나때문에 18 시간을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