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아비스코-덴마크 코펜하겐 (2016~2017 세계 여행)
더 기운차릴 수 있는 내일을 기약하며
오로라 하나를 보겠다고 스톡홀름에서 아비스코까지 18시간을 달려 올라간 여정이었고, 다행히 그 오로라 하나를 첫 날 밤에 보았으니, 아주 마음 편히 이동할 수 있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분명 나도 오로라를 '보긴 봤다.' 찍은 사진을 보니 생각보다는 선명하게 나온 듯했다. 허리까지 눈 속에 푹푹 빠져가며, 내가 종군 기자도 아닌데 이 와중에도 저 희미한 걸 찍어야 하는 마음에 셔터를 아무렇게나 눌렀는데, 빈약하기는 해도 사진에 오로라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이기는 하다. 물론 아주 주의 깊게 들여다 봐야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이지만. 오로라를 보고 들어와서는, 온 몸에 건조가 아니라 해동 작업을 해야 했다. 아비스코의 기온 자체가 워낙 낮기 때문에, 그곳에 '젖는'다는 개념은 없었다. 오로지 '얼' 뿐이었다. 신발에든, 겉옷 주머니에든, 얼음이 가득했고, 잘 떼어내지지도 않았다. 들고 들어온 얼음을 어느 정도 제거하고 라디에이터 근처에 옷가지를 다 쌓아놓았다. 아침이면 어떻게든 말라 있겠지 하는, 될 대로 돼라 식의 마음이었다. 오전에 기차 시각 전까지 낮의 아비스코를 한 번 더 돌아볼까 하는 악마의 유혹을 잠깐 받기도 했지만, 절대 그러지 못 할 것이라는 걸 내 머리도, 몸도, 모두 알고 있었다. 눈이라면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체크아웃까지 여유있게 시간을 보내다가, 바로 기차역으로 향했다.
아침에도 추운 건 여전했으나, 순백의 세상이 밉지 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미운 사실이기도 했다. 전 날 밤 보이지 않는 눈과 그것의 확인할 수 없는 깊이에 그토록이나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차마 미워하지는 못 할 새 하얀 세상이 아비스코에는 아침부터 펼쳐져 있었다. 그래, 이렇게 날이 청명하니 오로라를 구경이라도 해 볼 수 있었다. 문득 어제 밤에 그 고생을 한 호숫가가 어떻게 생겼었지 궁금해져, 물과 과자 등을 사러가다가 잠깐 살펴 보았다. 밤이 되면 조금만 걸어내려가도 그저 무서웠던 곳이었는데, 낮에는 세상 그렇게 평온하고 고요하며, 시야 또한 탁 트여 있을 수가 없었다. 아주 조금, 고작 저 정도에 물에 빠진 것마냥 허우적댄 것이 새삼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눈길을 따라 올라 아비스코 기차역에 도착했다. 열차가 출발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으나, 다행히 역에는 온풍이 잘 되고 있어 따뜻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언제 또 이렇게 온통 새하얗고 고요한 동네에 와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조금 애틋해지기도 했다. 열차가 들어오기 전 역사 이 곳 저 곳을 사진으로 남겼다. 아비스코, 일주일 전까지는 이런 곳이 있다는 것 조차 몰랐던 도시. 다음의 일정이 어떻게 될 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어쨌든 당분간은 내가 발을 디뎌본 세상의 지평에서 가장 북단의 지점으로 남을 이 곳. 볼 수 있을 지 없을 지도 모를 오로라를 기대하며 무턱대며 표를 끊고, 18 시간의 야간 열차를 타고 아비스코까지 찾아온 이 모든 과정의 총체가, 어쩌면 이 여행의 상징 같은 여정으로 기억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스톡홀름에서 아비스코로 오는 야간 열차가 18시간이 소요됐으니, 스톡홀름보다 더 남쪽의 코펜하겐으로 가는 데에는 그 보다도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비스코에서 코펜으로 가는 열차는, 두 번의 환승을 포함하여 총 25시간 동안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내성이나 면역은 한 번의 경험으로 바로 형성되지 않는다. 한 번 18 시간의 열차를 탔다고 하여, 다음의 이동이 수월한 것도 역시 아니다. 이 곳에 올 때는 환승 없이 한 번에 왔는데, 이번에는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거기에, 침대칸의 자리가 없어서 모든 여정을 좌석에 앉아서 보내야 하는 지옥의 일정이었다. 그게 살짝 암담하긴 했지만, 주머니 사정과 앞으로의 일정 등 가능한 물리적 변수들을 계산해보았을 때, 체력적으로는 조금 무리가 되어도 간 김에 끝까지 가는 게 차라리 나을 듯했다. 가진 건 몸뚱이 뿐이다. 두 번 환승을 하는 거니, 환승역에서 다음 열차를 기다릴 때 조금은 피로를 풀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피로를 풀기는 무슨. 허리를 펴고 누울 수 있다는 건 참 어마어마한 축복이었다. 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있는 것도 아닌, 멍하디 멍한 상태로 스톡홀름까지 왔고, 거기서 다시 두 시간 정도를 더 기다렸다가 코펜하겐 행 열차를 타게 되었다. 어쩐지 음산한 분위기를 자랑하던 스톡홀름 중앙역의 대합실에 앉아, 쏟아지는 잠을, 그 잠 보다 더 많은 안간힘을 쏟으며 견뎠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졸았다가는 기차를 놓칠 수도 있겠다는 실존적인 위협까지 들 정도로 거대한 피로함이 덮쳐왔다.
코펜하겐으로 가는 기차에서도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네 시간 쯤 지났을 때 열차는 스웨덴에서의 마지막 기차역 '말뫼'를 통과했다. 한때 조선업으로 부흥했다던 이 도시는, 그 조선업이 몰락할 당시의 '말뫼의 눈물'로도 유명하다. 한진 해운을 비롯하여 국내 조선업의 상황도 그리 녹록지 만은 않은 현실 때문인지, 남의 일 같게만 느껴지는 도시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여기서 하루 정도를 머물러볼까 생각도 했지만, 스웨덴을 관광해본 사람들이 그렇게 추천하지는 않아 바로 코펜하겐으로 넘어왔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과 말뫼는 다리 하나를 두고 이어져 있다. 그 다리를 건너니, 핸드폰에 'Welcome to Denmark'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이렇게 또 한 번, 스리슬쩍 국경을 건넜구나. 육로 이동 자체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구조 상, 국경을 넘는다는 건 꽤 대단한 일이다. 김연수 소설가가 그의 책 '여행할 권리'에서 국경을 넘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던 것도 같은데. 생각해보니 그 책을 가져올 걸 그랬다. 가져왔다고 읽었을 확률은 물론 낮겠지만, 손에 쥐어 보지도 않을 '시지프 신화' 보다는 더 진입 장벽이 낮은 책이 아니었을까. 국경을 이렇게도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유럽 국가들간의 모습이 아직도 내게는 많이 낯설다. 말뫼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는 코펜하겐도 다를 바가 없었다. 눈을 징하게 봐서 그런지, 모처럼의 비가 많이 반가웠다. 역시, 눈보다는 비다. 기우제는 지내도 기설제를 지내는 곳은 없지 않은가. 그럴 이유도 없긴 하겠지만.
열차에서 워낙 잠이 안 와, 오죽하면 오랜만에 빗소리 어플리케이션까지 실행하였을 정도였다. 그렇게 들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모처럼 비 내리는 거나 좀 봤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마침 오늘 코펜하겐에 적은 양의 보슬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숙소까지 오는 동안 얼핏 둘러 본 코펜하겐은, 아주 화려하거나 번쩍이는 도시는 아니지만 언뜻 보이는 건물들에 꽤나 매력이 있는 듯했다. 아마 내일 관광을 하며 조금씩 더 알아가게 될 것 같다. 실은 오늘도 숙소를 체크인하고 잠깐이라도 도시를 둘러볼 생각이었으나,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나니 도무지 몸을 한 발 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극도로 피로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숙소로 돌아와, 밀린 빨래를 맡기고 이런저런 정리들을 하며 재충전과 휴식의 시간만을 누리고 있는 상태다. 3일 동안 두 번의 야간 열차를 탔더니, 이렇게 머물러 있는 저녁이 새삼 참 소중하게 느껴진다. 정말, 이러고도 오로라를 못봤다면 한 3년 동안은 너무 억울하고 분할 뻔 했다. 그 오로라를 '보긴' 봤기에, 이렇게 피곤해도 큰 짜증이나 불쾌함이 들지는 않는 거겠지. 조금은 더 기운차릴 수 있는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지선의 '그는 널 사랑하지 않아'다. 절망의 자기 확신과도 같은 이 음악을 들으면, 어쩐지 내일은 조금 더 희망이 피어날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