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코펜하겐 (2016~2017 세계 여행)
둔해진 감각에 자극을 줄 수 있는 하루
어제 저녁에 들었던 러블리즈의 신곡 'Wow!'가, 오늘 오전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코펜하겐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혼잣말로 '쟤, 쟤, 쟤, 쟤 이뻐, 쟤 이뻐, 얘 이뻐, 얘 이뻐' 이러고 다녔다. 물론 러블리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목소리로. 이럴 땐 역시 혼자 다니는 여행이 좋다. 무슨 주책을 부려도 민망해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스페인을 혼자 돌아다닐 때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를 구경하고 내려오는 언덕 길에서 넬의 'Promise Me'라는 노래를 아주 크게 틀어놓고, 춤도, 율동도, 그렇다고 무용도 아닌 괴랄한 몸짓으로, 아주 그냥 망나니처럼 뛰어 내려온 적이 있었다. 우습게도 그 때가 2주간의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순간들 중 하나다. 여행지에서는 뭔 짓을 해도 상관 없다는 자유로움을 있는 그대로 만끽한 때였다. 아무리 경망스러워진들 눈치 볼 이유가 없다. 오늘은 그 만큼의 카타르시스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오로라를 기필코 보겠다는 집념 하나 만으로, 정말로 생각해보면 집착에 가까운 강박이었기는 했던, 그렇게 지난 3일을 모두 소비해버리고 나니, 오랜만에 찾아온 이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이 유독 반가웠다. 어제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날은 여전히 계속 흐렸다. 흐린 날이 유독 잘 어울리는 코펜하겐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여, 유독이라고 하기에는 맑은 날은 아직 보지 못하여 적확한 비교는 못 하겠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 살짝 쌀쌀하긴 했으나, 다행히도 그리 춥게 느껴지진 않았다.
여행이 길어지며, 그 도시가 그 도시 같고, 또 저 도시는 저 도시 같은 느낌이 자주 드는 것도 사실이다. 장기 여행의 묘미는, 그 도시가 그 도시 같고, 또 저 도시는 저 도시 같다고 느끼고 있을 때, 아냐 우린 달라, 라고 외치며 자신을 증명해내는 도시의 매력을 발견해내는 데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 코펜하겐의 니하운이란 지역이 그랬다. 운하 근처에 색색의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조금은 예쁘고, 또 조금은 귀엽기도 한 모습에 괜히 마음이 동했다. 북유럽의 어느 평범한 도시, 라고 하기에는 방문했던 북유럽 도시가 그리 많은 편도 아니라 표본이 무척 적기는 한데, 어쨌든 걸어다니기에 괜찮은 곳 정도로만 코펜하겐을 인식하고 있다가 새삼 발견한 예쁜 풍경이었다. 저렇게 색이 서로 다른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걸 베르겐에서도 봤던 것 같기는 한데, 거기는항구 도시라 바닷가 주변에 이런 건축물들이 있었고, 코펜하겐의 운하는 그 곳의 바다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폭이 훨씬 좁은 관계로, 그 아기자기함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해야 되나. 어쩐지 저런 형태와 색상의 건축물들은 운하에 더욱 적합한 듯 느껴졌다. 여행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새로운 여행지가 기억 속에 자리를 잡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조그마한 '남다름'도 굉장한 이국적임으로 인식됐던 여행 초반에 비해, 이제는 내 감성이 상당히 오만해졌기 때문이다. 낯섦이 적어지고 익숙함은 늘어난다. 익숙함은, 이 멀리까지 와서도 가끔씩, 또 '무려', 지겨움을 느끼는 데에 일조한다. 이미 자리를 잡은 지난 여행지들의 기억은 자꾸 텃세를 부린다. 그런 와중에 오늘의 니하운처럼 신선한 자극이 있는 지역을 지나게 되면 그저 즐겁고도 반가운 마음이다.
니하운의 덴마크 이름은 'Nyhavn'이다. 끝의 'vn'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몰라 한국 포털에 검색 해봤는데, 이미 니하운은 아주 유명한 관광지들 중 하나였다. 음, 나만 몰랐던 거구나. 괜히 좀 머쓱해지기도 했다. 이름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번 여행에서 코펜하겐만큼 다양한 표기법을 가진 도시도 또 없었다. 우선 영어식의 'Copenhagen'이 존재한다. 이건 쉽다. 아주 정직하게 코펜하겐 그 자체다. 덴마크어로는 'København'이다. 이를 발음하면 '쾨벤하운'에 가깝다고 한다. 덴마크에서의 'vn'은 '운'으로 읽히는 모양이다. 이 정도만 되어도 코펜하겐임을 알아보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을 텐데, 여기에 몇 가지가 더 있다. 가장 헷갈렸던 건 어느 사이트에서 보았던, 'Köpenhamn'이었다. 코펜하겐에서 다음 여행지로 이동할 버스표를 검색하다가 발견했는데, 여기가 그 곳이 맞나 싶어 다시 구글을 검색해야 했다. 저건 뭐라고 읽어야 되나. '쾨펜헨'? 이렇게 써놓고 나니 코펜하겐 같기도 하고. 언어는 정말 어려운 영역이다. 어쨌든. 끝이 'vn'이니 '니하운'이라 읽는 게 아마도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싶은 그 곳의 수많은 카페들 중 한 곳에 들어갔다. 칼스버그라는 유명한 브랜드가 덴마크 맥주라는 걸 그 카페에서 이제야 알게 댔다. 그렇게 좋아하는 맥주는 아니지만, 덴마크에서 덴마크 맥주를 마시는 기분을 내기 위해 칼스버그를 한 잔 주문했다. 날이 쌀쌀하지 않았다면 노천 좌석에 앉고 싶었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 그럴 수는 없었다. 따뜻한 계절의 코펜하겐은 어떤 모습일까 많이 궁금하기도 했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노천 카페에서 마신 칼스버그는 분명 다른 맛이었을 테다. 겨울이기에 가능한 것들도 많지만, 역시 겨울이라서 안 되는 것들도 많다. 그렇게 '라서 안 되는' 것들은 아쉬움이 되고, 이런 작은 아쉬움들은 다시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된다. '거주'와 '여행'을 구분할 수 있는 물리적 기준은 얼마나 많은 계절들을 한 도시에서 지켜보았나, 일 지도 모르겠다. 여행에서는, 한 도시의 극히 짧은 순간만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계절은 도시의 얼굴을 전혀 다르게 만든다.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여름철 백야의 아비스코와 오로라까지 보이는 겨울의 아비스코는, 분명 같은 도시지만 그 모습은 현저히 다를 것이다. 1년의 주기로 살아내는 도시들에 단 며칠만 머무르는 여행의 특성상, 한 도시의 모든 얼굴을 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다보니 다른 계절의 이 도시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이 궁금증은, 다시 약간의 '애틋함'으로도 이어진다. 다른 계절의 이 도시를 상상해보다, 다음 여행을 가늠해보고,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함을 확인할 때마다, 새삼 언제 또 이 곳으로 올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름 날의 코펜하겐이 무척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쩌면, 겨울의 이 모습이 내가 평생토록 기억할 코펜하겐의 유일한 얼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역시 공존했다. 젊음의 한복판에서 떠올리기에는 너무 세상 다 산 것 같은 생각이기는 하다만, 당장 언제 또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저 요원한 게 사실이다.
여행지에서의 감상은 참 복합적이다. 직접 경험한 느낌과, 받지 못한 느낌에 대한 아쉬움이 모두 섞여 그 감상을 만들어낸다. 좋았던 기억만 가지고 떠난 도시에서도 어쩐지 모를 먹먹함이 드는 건, 그래서 때로는 슬퍼지기도 하는 건, 앞으로 그 곳과의 재회가 '기약 없음'에서 비롯되는 지도 모르겠다. 스웨덴의 아비스코는, 공간적으로는 이 여행의 반환점 같은 도시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여행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도상으로는 그 곳을 정점으로 하여 다시 남쪽으로 향하는 여정이기에, 아비스코를 떠나며 '꺾였다'라는 느낌을 이 여행 동안 처음으로 받았다. 그래서인지, 오로라를 본 후,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코펜하겐으로 올 때 설명 못 할 애틋함을 특히 많이 느꼈다. 그 지겨운 기차를 타고 내려오며, 거기에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아주 많은 잡생각들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는 지금의 이 여행이, 어쩌면 내 삶의 화양연화로 남을 수 있겠다는 어렴풋한 추측도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바쁘고 벅찬 일상을 살아내다 이 여행을 돌아보면,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의 대사처럼 '무한한 애틋함'을 느낄 듯하다. 순간의 '순간성'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모든 순간들이 다신 오지 않을 날들이라는 것 역시 충분히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다신 오지 않을 날들로 다시 돌아가고픈 간절함 바람이 문득 들 때가 있다. 지금의 이 여행은 언젠가 가장 강한 감정적 중력이 되어 나를 종종 잡아당기지 않을까.
절대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의 화양연화로 남게 될 이 여행에서, 그에 응당한 만큼의 감흥과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날에는 괜히 스스로가 조금 밉기도 하다. 이게 어떤 날들인지는 아냐고, 어떤 기억으로 남을 여행인지는 알고 있는 거냐고, 나무란다고 될 일은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안타까워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여행의 날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자극과 감흥을 느끼는 게 더욱 어려워지는 건 당연하다. 연애 기간이 늘어날 수록 설렐 일은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의 유일한 모습이 설렘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러면서도 처음의 아찔함이 그리워질 때가 가끔씩 있다. 계속되는 여행동안 처음의 예민함을 그대로 유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랑을 할 때는 이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이 역시 물론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믿음 안에서 둔감함은 '익숙함'이나 '편안함'이라고 치환, 혹은 승화될 수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끝나리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여행에서는 가급적 피하고픈 감정의 관성이다. 여행과 연애가 비슷해보이기는 해도, 또 이럴 때는 상당히 다르다. 여행을 하며 조금 더 많이, 깊이, 또 선명하게 느끼기를 바라는데, 시간이 흐르며 많은 것들에 그러려니 하게 되는 마음의 변화가 썩 좋지는 않다. 그렇게 둔해진 감각에 자극을 줄 수 있는 하루는, 참 선물같은 날이다. 오늘은, 정말 고맙게도 그런 하루였다. 이런 하루를 선물받으면 새삼 고맙고도 애틋한 마음이 기특하게도 피어나는 걸 보며, 여행의 날들이 꽤 많이 흘렀음을 다시 느낀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사비나앤드론즈의 'So When It Goes'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