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할 추억이 방울방울

체코 프라하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안녕, 프라하

온갖 게으름이란 게으름은 다 부리다가, 아주 느즈막하게야 하루를 시작했다. 그것도 정말, 이제는 일어나야지, 하는 마음을 몇 번 씩이나 먹다가 드디어 기상한 것이었다. 모든 것들이 하염없이 귀찮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넓은 침대 를 혼자서 한참 동안 뒹굴거렸다. 돈 많은 백수야 말로 모두의 장래 희망이지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건 알람 소리 없는 아침일지도 모른다. 날이 많이 따뜻하여 오늘은 후드 짚업 하나만 걸치고 숙소를 나섰다. 무거운 패딩을 입지 않고, 또 배낭도 숙소에 두고 거리를 나서니 훨씬 더 산뜻한 기분이었다. 정해진 목적지는 딱히 없었기에, 오늘은 어제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보았다. 골목골목이 복잡하긴 하지만, 길을 찾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은 프라하다. 도시 중심부를 흐르는 볼타브 강을 기준으로 하여, 왼쪽 오른쪽만 판단하면 숙소로 쉽게 찾아올 수 있다. 어제는 구시가지의 오래된 건물들에서 즐거움을 발견했다면, 오늘은 골목 사이사이의 아기자기한 느낌이 못내 좋았다. 산책하듯이 걷다보니, 어느새 관광지 비스무리한 곳에 도착했다. 프라하는 한국 사람들을 오랜만에 많이 발견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의 연령대도 다양했다. 예전에 호스텔에서 만난 누군가가, 프라하나 런던은 서울과 다름없는 곳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확실히 이 전과 비교할 땐 많은 한국인들이 보이기는 했다.

숙소에서 시작한 프라하 골목 여행

최근 2년 간, 내게는 책을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건, '읽는'이 아니라 '모으는'이다. 언젠가 읽겠지 싶은 마음으로 굉장히 많은 책들을 구매했다. 그 시작이 됐던 작품들 중 하나가, 체코가 배출한 거장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였다.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군대에서의 초창기에 이 책을 읽었는데, 아주 난해했다. 사실상, 무의미의 독서였다. 지금도 그 책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쿤데라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있다. 한국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 알려진 영화의 원제이기도 하다. 이건 순전히, 지적 허영 때문에 구매한 책이다. 제목부터가 어쩐지, 대학생이라면 이 정도 책쯤은 읽어줘야 할 듯한 위압감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역시 참을 수 없는 독서의 지겨움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쿤데라의 소설을 예찬하지만, 내게는 너무 어려운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오늘 거리를 걷다 보니, 유독 그 두 작품들이 많이 생각났다. 이해하는 것과 생각나는 건 분명 다른 영역일테니까. 생각이 났다고 귀국하여 다시 읽을 것 같지도 않다. 정말 문자그대로, 생각만 났다. 역시 너무 난해하게 느껴졌던 존 버거의 <그리고 사진처럼 남겨진 우리들의 얼굴, 네 가슴>런던에서 참 자주 떠오르기도 했다. 구매한 책을 다 읽어본 것도 아닌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책들이 벌써 세 권이나 된다. 책상 위의 장식품 정도로써의 기능만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책들이 참 많다. 이게 다 주인의 무지함 때문이다. 미안 얘들아.


어제는 <뷰티 인사이드>의 촬영지를 가겠다는 소소한 목표라도 있었지,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결심하지 않은 채로 나왔다. 그러니 그냥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걸을 뿐이었는데, 70일 넘게 여행을 했더니 발에도 눈치와 감각이 생겨 의외로 괜찮은 순간들이 꽤 있었다. 용불용설이다. 하도 걸어 다녔더니 이젠 발에도 기초적인 수준의 인공지능이 탑재된 듯하다. 그럼 도대체 나의 캐리어는, 왜,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지는 걸까. 자기부상 캐리어가 만들어져도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전동식 캐리어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을 하며 거리를 쏘다녔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도 해야 혼자만의 여행이 덜 지겹다. 지나가다 보니 광장이 있었고, 거기에 여러 예술가들이 있었는데 특히 비눗방울을 만들어내던 사람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고기를 잡을 때 쓰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기구를 가지고 비눗방울을 제조 및 방출해냈는데, 프라하의 건축물들과 비눗방울이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조금은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놀이공원이 생각나기도 했다. 놀이공원. 거길 마지막으로 갔던 게 언제였더라. 어릴 때는 그렇게 스릴넘치고 짜릿했던 놀이기구들인데, 조금 더 자라고 나니 대부분이 시시해졌다. 롯데월드의 아틀란티스보다, 살아내는 현실이 몇 배는 더 스릴있고 무서워서 그런 것일지도. 그래도 대학에 들어와서도 가끔 친구들, 혹은 여자친구와 기분이라도 내러 가곤 했었는데, 그것도 오래 전이다. 비눗방울들을 보니 어쩐지 놀이공원이 많이 떠올랐다.

동심을 자극했던 비눗방울

해질녘이 되자, 일몰을 보기 위해 어제 방문했던 <뷰티 인사이드> 촬영지를 다시 찾았다. 해가 떠있을 때도 그렇게 밝거나 맑지는 않은 곳이 또 프라하였고, 그러니 일몰과 석양 역시 기대한만큼 굉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서서 강 건너의 광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충분한 시간이었다. <뷰티 인사이드>처럼 굉장히 뛰어나고도 섬세한 영상미를 러닝타임 내내 자랑하는 영화가 무려 마지막 엔딩의 배경으로 충분히 고를 만한 곳이었다.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담담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어제 사놓은 맥주 한 캔을 가져올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그 구시가지를 바라보며 한 잔 했다면 기분이 남달랐을 텐데. 아쉬운대로 옆의 노점에서 소시지 하나를 사 먹었다. 인과관계가 조금 안 맞는 것 같지만, 원래 혼자 하는 생각에는 두서가 없다. 길쭉하고도 아름다운 소시지여서,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맛도 의외로 좋았다. 몸이 나빠지는 맛이기는 한데, 원래 그런 게 더 맛있는 법이다. 먹는 데에만 집중 하느라 정작 소시지는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해가 지니 날이 갑작스레 쌀쌀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다. 방의 침대는 세상 가장 안락해보이는 포근함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주로 호스텔들을 이용하다가, 가끔씩 쓰는 1인실이 주는 편안함은 유난히 돋보인다. 나는 한국에서도 무조건, 그리고 반드시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이 있어야 했던 사람이었는데, 호스텔을 쓰다 보면 알게 모르게 꽤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어쨌든 그 곳도 단체 생활이니까. 그러는 중에 어쩌다 1인실을 쓰게 되면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카를교의 부질없는 자물쇠들
다시 찾은 카를교

열 두 살에 처음 이곳을 찾고, 그 때의 나이만큼 시간이 지나 12년 만에 찾아온 프라하였는데, 이 여행으로 프라하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바뀌게 되었다. 그 동안 나는 프라하를 그 명성에 비해서는 크게 볼 게 없는 도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릴 적의 내 기억으로는, 그저 힘들기만 힘들고 딱히 볼 거리가 많았던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자란 지금에는, 이 도시가 굉장히 아름답고도 멋지게 느껴진다. 골목골목도 예쁘고, 경관도 수려하며, 또 좋아하는 영화의 엔딩 장면 촬영지이기도 하고. 그런 걸 보면, 어릴 적에 정말 스칠듯 미약하게 경험했던 것도 경험이라고 과신하여, 그 본질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은 채, 부당한 선입견만 갖고 있는 것들도 세상에는 참 많겠다는 생각도 든다. 성장이란, 어릴적 형성된 부당한 선입견을 재심하는 과정일 지도 모르겠고. 머무르는 내내 즐겁고 좋았던 프라하였다. 여행의 기간이 길어져 마음의 공명을 울리기는 더더욱 지난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하의 순간순간은 참 인상적이었다. 멋진 오후였으니,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스윗소로우의 '어떤 오후'다.

그리고, 프라하의 일몰 시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