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자 캐리어

체코 프라하-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구글을 믿었으나

브라티슬라바. 이름도 참 어렵다.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이 곳은 체코 프라하로부터 기차로 네 시간 거리에 있다. 프라하 역과 숙소의 직선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중간중간의 길이 굉장히 굴곡져 있었다. 이 곳에 도착하던 날 예상했던 대로, 나는 캐리어에게 몇 번이나 '빌어먹을'을 외치었다. 도대체 어떤 수준의 체력과 근력을 가진 사람을 기준을 했기에, 구글 지도에서는 도보로 14분 정도라고 나와있었는지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낑낑대며 캐리어를 이끌고 다니는 사람의 사정 쯤은 고려하지 못 한 게 분명했다. 9시 52분 기차였는데, 혹시 몰라서 아주 일찍 나온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더없이 다행스런 결정이었다. 역에 도착한 시각은 9시 47분이었다. 14분이 아니라, 41분이 걸렸다. 그 41분 동안, 나는 바위같은 캐리어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끌어서 당기는 시지프스의 바위 같기도 했고. 임수정이 주연을 했던 영화 <각설탕>의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 오버랩 됐다. 어쩐지 내 캐리어가 그 영화의 늙은 말이 되어버린 듯 했다. 드는 것과 끄는 것에 별 차이가 없었다. 아, 내가 혹시나 드라마를 쓰게 된다면, 그 땐 반드시, 캐리어도 생명이잖아요, 혹은 캐리어는 우리의 친구에요, 따위의 대사들을 삽입할 것이다. 제목도 몇 개 떠올랐다. '캐리어 연대기', '캐리어와 죽음의 성물', '캐리어 : 뜻밖의 여정' 등등.

프라하 기차역

급한 마음에 역에 설치된 전광판을 바라보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탈 열차는 10분 지연된 상태였다. 덕분에 조금은 여유있게 플랫폼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언덕을 바삐 오르다보니 땀이 무척이나 많이 난 상태였다. 저런, 이리도 불쾌할 수가. 아침에 아주 깔끔하고 씻고 나왔는데, 허무했고 허탈했다. 땀을 식히며 열차를 기다렸다. 그래도 이제 네 시간 정도의 이동 쯤은 가볍게 다닐 수 있는 면역이 생긴 것도 같았다. 오늘 예약한 열차는, 침대칸이 아닌 좌석이었는데도 침대칸과 비슷한 객실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그와트행 급행열차와 비슷한 구조였다. 음, 역까지 오는 게 그렇게 힘들었던 건, 마치 킹스크로스역의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벽을 향해 돌진하는 것과 비슷한 시련이었구나. 그렇다면 이제 이 객실에 엠마 왓슨만 타면 되는 건데. 오지도 않을 엠마 왓슨을 떠올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는데, 아까 흘린 땀냄새가 나면 어쩌나 싶어 미리 무안하기도 했다. 선반 위에 올려놓은 캐리어를 노려봤다. 임마, 다 너 때문이라고. 엠마 왓슨도, 엠마 스톤도, 론 위즐리도, 그 누구도 없는 상태로 열차는 출발했다. 표까지 검사하고 나니 긴장이 풀리며 피곤함이 찾아왔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육체 노동을 한 탓이었다. 벽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잘 잤다. 덜컹이는 기차에서 아주 잘 잤다. 그것도 오래도록 잤다. 두 시간을 취침으로 때웠다. 꽤 괜찮은 행운이었다.


열차가 출발한지 3시간이 조금 넘은 오후 1시 7분 경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의 국경을 통과했다. 국경을 건널 때마다 귀신 같이 웰컴한다는 문자가 온다. 국가로만 따지면 이번 여행에서 여덟 번 째다. 10분 정도 지연되어 출발했지만, 도착은 제 시각에 했다. 역 앞의 다소 무질서한 교통 상황이 슬로바키아의 첫 인상이었다. 숙소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25분. 구글 지도 기준이었다. 당장 오늘 아침에 구글 지도에 뒷통수를 맞았기 때문에, 나는 불신 가득한 눈초리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걸었다. 끌려오는 캐리어가 잠깐만 쉬었다 가자고 조르는 듯했다. 그래 잠깐 쉬자. 근처의 카페로 들어가, 음료수 한 잔을 시켰다. 캐리어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내가 화장실이 급했다. 걱정을 내려놓고 나와, 주문한 음료를 마셨다. 코폴라(Kofola)라는 탄산 음료였다. 체코나 슬로바키아 등의 국가에서 마시는 콜라 같은 음료라고 한다. 맛은 레드볼과 비슷했다. 어쩐지 시험 기간에 마셔야 할 듯한 음료수 같았다. 멋모르고 흑맥주인 줄 알고 마셨다가, 뭔 이딴 희한한 흑맥주가 다 있나 싶어 인터넷을 검색했고, 이것이 코폴라란 이름의 탄산음료라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숙소까지로 가는 길은, 우려대로 멀고도 험했다. 왜 이런 건 항상 우려와 일치하는지 모르겠다. 우려와 달리, 아주 평탄하였습니다, 뭐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꽃길은 바라지도 않으니 아스팔트 포장 도로만 되면 더 좋을 게 없을 텐데. 기차에서 엠마 왓슨을 기대했던 게 죄라면 죄였나 보다.

프라하발, 부다페스트 행 열차. 나는 중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내렸다.
코폴라가서 브라티 한 잔.

한참을 걸어 호스텔에 도착했다. 리셉션 직원이 상당히 친절한 편이라 기분이 누그러졌다. 방을 안내받고 대충 짐을 푼 뒤에, 바로 샤워를 했다. 도시 지도를 리셉션에서 받고 관광에 나섰다. 어차피 보지도 않을, 그리고 본다고 해도 지도대로 길을 찾을 순 없겠지만, 우선 받긴 받았다. 여행 중 가장 따뜻한 날이었다. 고작 열 흘 전에 내가 있었던 곳이, 영하의 온도가 지극히도 평범한 스웨덴 북부의 아비스코였기에, 거기서부터 남쪽으로 내려올 때마다 기온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는 중이다. 직전의 프라하가 너무 압도적인 관광지였고, 그렇기에 브라티슬라바는 다소 한산하고 평범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 한적함 만의 여유가 있었다. 당장 어제까지 카를교 위의 바글바글한 사람들 속에서 혹시 모를 소매치기 등을 내내 주의하며 다녀야 했는데, 오늘은 다소 긴장을 누그러뜨려도 괜찮았다. 물가는 아주 쌌다. 아주, 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쌌다. 여행을 거치며 나는 저렴함 감별사가 되어가는 중이다. 70일이 넘는 여행동안 사치라고는 베르겐에서의 충동적인 해산물 식사 딱 한 번만 했던 배낭 여행자의 입장에서, 내가 싸다고 느끼는 건 정말 싼 거다. 사랑스럽디 사랑스러운 이곳의 물가에 경의를 표하며, 나는 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스테이크를 먹을 생각이었으나, 그 밑에 밑에 적혀있던 전통 돼지 족발이 눈에 밟혔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학센이라는 요리를 먹을 때 야만적인 포식자가 된 듯한 기분 좋은 느낌을 받은 적이 었어, 이번에도 그 비슷한 기분을 내고자 족발을 선택했다.

오늘의 식사
나름 명물이라던 조형물.

고기는 맛있었다. 하지만 고기를 에워싸고 있던 검은 채소는 입에 맞지 않았다. 역시 남의 나라 전통에는 그만한 진입 장벽이 존재한다. 단백질 보충이나 하라는 소리인가보다 하는 마음에 열심히 고기를 뜯었다. 포크와 나이프로 섬세하게 살을 바르니 한 웅큼의 고기가 떨어져나왔다. 족발이다보니 약간의 콜라겐도 함유돼 있었다. 아, 갑자기 보쌈이 먹고 싶어졌다. 한국에서도 족발보다는 보쌈이었는데. 새우젓이 생각나기도 했다. 나의 고국만큼이나 야식의 종류와, 야식을 접할 수 있는 방안들이 다양한 나라도 또 없을 것이다. 만족 반, 실망 반의 식사였지만, 고기는 나름대로 괜찮아 굳이 따지자면 만족에 더 가까웠다. 가벼운 포만감을 느끼며 다시 골목들을 걸었다. 하수구에 빠져 있는 듯한 동상도 있었는데, 이것이 브라티슬라바의 명물이라고 한다. 코펜하겐에서는 되도 않은 인어상을 명물이라 하더니. 그냥 다짜고짜 명물이라고 우기면 되는 건가. 숙소 근처의 '데빈 성'의 성곽을 오르며 일몰을 감상했다. 여길 한국어로 찾으니 '데빈 성'인데, 현지어나 영어로는 'Hrad 성'이다. 영 이해되지 않는 언어의 매커니즘이었지만, 일몰의 하늘과 주변 경관이 예뻐 여기에 집중하다 보니, 여기가 뭐로 불리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래에는 다뉴브 강도 보였다. 저 강은 오스트리아까지 흘러가겠지. 강 건너편에는 신시가지로 추정되는 지역이 있었는데, 성냥갑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었다. 한강 근처에서 많이 본 듯한, 참 지루하고도 멋없게 생긴 아파트 단지들이었다. 유럽이라고 해서 꼭 멋진 건물들만 득실대는 건 아니다.

주간 시간대의 브라티슬라바. 저 강이 다뉴브 강이다.

해가 지고, 야경까지 본 뒤에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분위기가 괜찮아 보이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 마시기도 했다. 이게 다 물가가 싼 덕분이다. 삶의 질이 모처럼 만에 제고되는 느낌이다. 와이파이가 당연히 될 줄 알고 들어간 카페였는데, 인터넷이 안 되어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카페라면 빵빵한 와이파이 천국이라는 인식이 있어서인지, 여행을 하다 가끔 이렇게 인터넷이 안 되는 카페에 들어가게 되면 꽤나 당혹스럽다. 스마트폰이라지만, 이게 마땅히 쓸모가 없어진다. 인터넷이 안 되는 관계로, 그저 오늘 발표된 정준일 새 앨범의 수록곡들을 집중하여 들어보았다. 타이틀곡 '바램'도 정준일스러웠지만, 내겐 그 다음 트랙 '하루만큼 하루만 더'가 가장 좋았다. 작년 3월에 그의 단독 공연에 간 적 있었는데, 라이브 실력이야 뭐 말 할 것도 없었고, 음악과 노래를 대하는 그의 진지함에서도 큰 감동을 받았었다. 멘트도 의외로 재미있어서 놀랐고. 여기서 굳이 자랑을 하자면, 그 때의 콘서트가 2016년 초에 발매된 그의 'Underwater' 앨범의 수록곡들을 모두 들을 수 있던 유일한 공연이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이동진 평론가가 젖은 날개의 노래라고 앨범 소갯말을 써주었던 그 EP 앨범이다. 감각적인 영상이 상영되고, 정준일이 'Useless', 'Plastic', 그리고 'IAN' 세 곡을 연달아 부르던 때가 그 공연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었다. 그런 그가 정규 앨범을 발매했으니, 아주 반가웠다.

브라티슬라바의 골목골목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신보 마지막 트랙 '그랬을까'까지 다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라티슬라바에 그리 인상적인 볼거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정준일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 도시 이름이 자연스레 생각날 듯하다. 이것 역시도 오감으로 도시를 기억하는 방법들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한 음악이 재생될 때, 그 음악을 들었던 도시의 풍경과 이미지가 함께 떠오르는 건, 마치 기억이란 감독이 연출해낸 한 편의 기가 막힌 뮤직비디오와 같으니.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정준일의 '하루만큼 하루만 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