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전 봤니, 그럼 됐다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 오스트리아 빈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미혹되지 않았던

어제 반나절 정도 브라티슬라바 관광을 했고, 이곳이 볼거리가그렇게 많은 도시는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오늘 아침 미련없이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내릴 수 있었다. 국가가 다르고, 또 브라티슬라바와 빈 모두 각 나라들의 수도라서, 두 도시의 이름만 들으면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은 서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 정도에 위치해 있다. 혹자는 이 두 도시들을 가리켜 쌍둥이 도시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찾아보니, 빈을 관광하는 사람들이 겸사겸사 브라티슬라바까지 들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다녀온 바로 역관광이라 부르는 건가. 호스텔에서 아침으로 제공되었던 사과를 두 개 정도 들고 숙소를 나섰다. 푸른 아오리였는데, 생각해 보면 올해 첫 아오리인 듯했다. 정말 딱 한 시간 만에 오스트리아 빈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빈에 대해 아예 무지한 상황이었다. 원래는 버스 안 와이파이로 이것저것 검색해 볼 예정이었지만, 워낙 짧은 구간이라 그런지 와이파이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다. 버스 터미널이라면 도시 중심부에 위치해있겠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지만, 딱 봐도 후미져보이는 곳이 버스의 종점이었다. 이런, 이건 내가 알고, 또 상상했던 빈이 아닌.

슈테판 성당 근처
에곤 쉴레

정류장 반대편에 전철역이 하나 있었다. 무엇도 모를 땐 우선 시내로 가는 게 장땡라는, 여행 헌법의 1조 1항과도 같은 행동 강령에 따라 전철을 타고 시내로 나갔다.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곳에서 나도 따라 내렸다. 역 앞을 나오니 거대하고도 웅장한 성당이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음, 뭔가 의미가 있어보이는 걸. 검색하니 이 곳이 '슈테판 성당'이었다. 그렇구나. 웅장하네. 일단 빈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 상태였으니,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진을 치고 검색 작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지구촌에서 가장 인기있는 커피숍, 스타벅스를 찾는 게 의외로 꽤 오래 걸렸다. 이런 아메리칸 커피는 안 마시는 동네인가, 하던 순간에 드디어 스타벅스 하나를 발견했다. 들어가서, 그란데 사이즈의 아메리카로를 한 잔 주문했다. 커피는 아메리카노지, 비엔나 커피는 무슨 비엔나 커피. 사실 무식한 소리이기는 하다. 이 위에 휘핑크림만 올린 게 바로 비엔나 커피이니. 여행 동안 마신 커피들 중 가장 맛있었던 건 아일랜드에서의 아이리쉬 커피다. 위스키 조금, 커피 조금, 거기에 약간의 흑설탕과 생크림이 들어간 환상의 조합. 이것도 칵테일이라면 칵테일일텐데, 여태껏 마신 모든 칵테일 중에서도 가장 맛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역시 위스키란. 어딜 들어가도 그 존재를 빛내주시는 우리의 주님.

합스부르크 궁전 근처

빈의 몇몇 관광지들을 알아냈다. 공원에는 슈베르트 동상이 있고, 또 스타벅스 근처의 슈테판 성당이 있으며, 궁전으로는 도심의 합스부르크 궁과, 도심과는 조금 떨어진 쉔부른 궁전이 유명하다. 에곤 쉴레라는 화가의 작품들도 많이 전시돼 있는 도시라고도 한다. 에곤 쉴레. 화가라고는 채 다섯 명도 모르는 내가 이 사람을 어디서 들어봤더라. 어떤 영화였던 것 같은데. <가장 따뜻한 색, 블루>였던 듯 하고. 뭐 어차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 있다고 해도 굳이 들어가 관람할 건 아니니, 이건 그냥 알아만 두었다. 커피숍 와이파이를 누릴만큼 누리다 길을 나섰다. 어제 브라티슬라바가 따뜻하여 옷을 얇게 입으려다 그래도 혹시 몰라 패딩을 걸쳤는데, 잘 한 선택이었다. 검색 결과에 따르면 빈의 날씨가 따뜻할 때는 얼마 없다고 한다. 슈베르트 동상이 가까워, 우선 그곳부터 찾았다. 동상이, 있구나, 싶었다. 이런 것도 관광지가 될 수 있다니. 12년 전 가족 여행에서 이곳에 왔던 기억이 어렴풋하게도 스쳤다. 동상을 보면 이청준 작가 <당신들의 천국>이란 작품이 생각난다. 재미있게 읽었고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어릴 때 필독도서로 처음 접했을 때는 '동상, 동상, 동상'을 반복하는 주인공 때문에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뻔했. 동상이나, 동상이 있는 공원 모두 그리 특별할 건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동상이 세워질 정도의 음악가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여기 사람들에게는 꽤 부듯한 사실일 듯했다.


도시 곳곳에,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을 다닐 때 들어보았던 음악가들의 이름이 있는 건 조금 부럽기도 했다. 이럴 때, 저 사람의 피아노 협주곡 몇 번은 진짜 명곡이야, 와 같은 멋진 멘트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핸드폰 음악 어플리케이션을 뒤지니, 그래도 슈베르트의 음악이 세 곡이나 있었다. 왜지, 해킹 당했나. 아니면 술에 미친 듯 취했었나. 이걸 내가 다운 받아 놓은 게 맞나, 이런 게 왜 있지. 이전에 어떤 영화의 음악들을 통으로 받으며 함께 집어넣었나. 영화 <아무르>의 삽입곡이었다는, '악흥의 순간(3악장)'이란 곡을 들었다. 클래식의 도시에서 클래식을 들으니 조금 클래시컬한 매력을 갖춘 사람이 된 듯도 했다. 그래, 음악은 원래 분위기로 듣는 거지. <아무르>에서의 피아노 솔로면, 노부부의 집에 제자가 찾아와 들려주었던 그 곡인 건가. <아무르>를 떠올리니 영화 마지막 장면의 아픈 마무리가 새삼 기억났다. 동감은 할 수 있겠으나, 과연 나도 그런 선택을 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주인공의 행동이었고, 결말이었다. 클래식을 들으며, 안락사, 혹은 존엄사라는 이슈까지 떠올리니 어쩐지 교양인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기분 나쁜 착각은 아니라 그 흥을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역시 프라하의 후유증인지, 아주 경탄스러운 순간은 빈에 없었다. 그래도 종종 보이는 오래된 건물들이 나쁘지 않아, 한참을 걸어다녔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세 번 정도 다시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어차피 브라티슬라바로 돌아갈 버스 시간까지는 꽤 남아 있으니, 쉔부른 궁전을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와이파이가 되는 지점으로 가서 거리를 검색해보았는데, 걸어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다. 구글 지도 상으로는 대중 교통이 없다고 나왔다. 남는 게 시간이니, 걷기로 결심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쉔부른 궁전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또 예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40분 이상 걸어 조금 힘이 들 때 즈음에, 눈 앞에 '장로교'라는 한글 단어가 보이기도 했다. 이상하다, 그래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그 새 천국에 왔나. 이동욱도 안 보이고, 나는 개신교인이 아닌데. 선명한 한글에 마음이 조금 놀랐다. 다행히 제대로 본 것이었고, 이건 이 나름대로 또 신선한 깜짝스러움이었다. 쉔부른 궁전에 다 와 갔지만, 이 곳 주변에 궁전이 있다는 신호가 없어 불안했다. 큰 규모의 기차역만 하나 있었는데, 혹시 구글맵이 쟤를 궁전으로 잘못 알려준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 조금 더 가니 궁전이 있었다. 안녕, 너도 12년 만이구나. 밥 때를 놓쳐, 우선 매표소 안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한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랬다. 궁전 안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정원만 볼 생각이었다. 국제학생증까지 꺼내며 정원 티켓을 달라고 오피스에 말했더니, 정원 입장은 무료라고 했다. 올레. 즐거운 마음으로 정원에 들어갔다.량한 풍경이 펼쳐져도 어쩐지 예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공짜의 미덕이자 은총이다.


12년 전 쉔부른 궁전에서 예쁜 정원을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었다. 그 잔상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때는 여름이었고 지금은 아직 초봄이라는 사실을 관과했다. 황량은 아니지만 풍성하지도 않은 거대한 정원이 그 안에 펼쳐져 있었다. 조금은 허탈했지만, 돈을 내고 실망하는 것보다는 몇 배는 더 나았다. 꽃들이 개화하기까지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정원의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천천히 내려왔다. 이 때, 숙소에서 들고 온 사과 두 개를 먹었다. 참 맛있었다. 정원에 볼 것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한 시간 반을 걸어 이곳에 왔다는 것 만으로도 어쩐지 이미 많은 걸 경험한 느낌이었다. 아직 피지 않은 꽃들에게 열심히 자라라는 덕담을 건네고, 정원을 나왔다. 다시 시내 중심부로 걸어가야 했다. 가는 길에 보니 지하철 역이 있긴 있었다. 망할 구글 지도. 대중 교통 없다며. 탈까,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어쩐지 걷고 싶어 그냥 걸었다. 그리 비싸지도 않은 지하철을 바로 옆에 두고도 발걸음을 계속하는 게 바로 여행의 본질 아니겠는가, 하는 자기 세뇌를 했다. 브라티슬라바나 빈이나, 도시 자체의 매력이 크게 느껴지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브라티슬라바에 숙소를 잡아 두 도시를 하루씩 둘러볼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일정이었다.

빈의 쉔부른 궁전
슈테판 성당 근처의 저녁

시내에서 궁전까지의 도보 왕복 시간이 세 시간이나 되어 그런지, 내내 걷다가 쉔부른 궁전의 정원만 잠깐 본 기억밖에 안 남았다. 가장 유명하다는 쉔부른 궁전을 보긴 봤으니, 그럼 됐지 뭐. 다소간의 피로감을 안고 브라티슬라바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국경을 통과하니, 다시 웰컴 투 슬로바키아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아까는 오스트리아라더니. 두 곳이 가까워도 정말 가깝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 어두워 살짝 무섭기도 했으나, 그래도 무사히 잘 찾아왔다.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사 온, 역시 동유럽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저렴함을 자랑하는 맥주를 마시니 오래 걸었던 피로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다. 다 좋은데, 독일 함부르크 이 후 동쪽으로 이동하면 이동할 수록 와이파이의 상태가 불량해지는 느낌이다. 설비 자체가 없는 곳들도 꽤 있고. 다른 데는 몰라도 호스텔만큼은 빵빵해야 되는 거 아닌가. 독서가 내 취미가 기어코 될 수는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와이파이가 안 되면 책이라도 한 두 페이지 읽을 텐데, 나는 스마트폰을 붙잡고 되지도 않는 와이파이를 몇 번 씩이나 새로고침하고 있다. 몰라, 맥주나 마셔야지.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요나의 '용서해요'다. 영화 <파닥파닥>의 OST였기도 했다. 이 노래의 피아노 버전도 좋은데, 오늘은 원곡이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아 근데, 쉔부른 궁전까지 걸어서 다녀온 건 다시 생각해도 조금 뿌듯한 사실이다. 특히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그 수 많은 지하철 역들의 유혹을 다 물리친 듯한 느낌이고. 미혹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내 여행의 불혹이었나. 책을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 것 같아, 뭔가 유식한 척 좀 해봤다. 혼자 이렇게라도 잘 놀아야, 와이파이가 잘 안 되더라도 여행이 덜 지겹게 느껴진다.